Round 312. 세계 정상
경기장 관중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유럽 정상에 올려놓은 아시아의 거인 존 Y. 리.
그에 맞서는 남미 챔피언 CA 페냐롤이 자랑하는 마법의 머리 알베르토 스펜서.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두 사람이 격돌했다.
‘더 이상은 못 간다!’
‘반드시 뚫어 주마!’
몸을 흔들며 페인트 동작을 펼쳐 보인 알베르토가 잽싸게 준영을 제치고 나가려 했다.
하지만 준영은 속지 않고 그가 가는 방향을 막아섰다.
이에 알베르토는 여기서 한 차례 접으며 슈팅을 시도했다.
‘아니, 슈팅이 아니군!’
알베르토의 눈은 골대를 바라보지 않았다.
재빠르게 준영의 배후로 침투하는 쿠비야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히 쿠비야에게 패스를 한다.
이렇게 판단한 빌 포크스는 황급히 쿠비야를 마크했다.
하지만 알베르토의 선택은 패스가 아닌 돌파.
그는 준영의 다리 사이로 공을 빼내고 재빨리 옆으로 돌아 들어가려 했다.
‘내가 이겼…….’
하지만 그가 가려는 방향은 준영이 먼저 어깨를 넣으며 선점해 버렸다.
‘젠장, 눈치를 챘나?’
‘차라리 슈팅을 하는 게 나았을 거라고.’
알베르토는 황급히 뿌리치고 가려 했지만, 준영은 등진 상태로 적절히 그를 밀어냈다.
그사이 공은 골키퍼 해리 그렉이 안전하게 잡아챘다.
「캡틴 리, 위험한 상황을 적절히 막아 냅니다. 자, 다시 반격에 나서는 유나이티드!」
해리 그렉이 길게 내찬 공을 알렉스 퍼거슨이 헤딩으로 떨어트렸다.
그 공을 잡은 바비 찰튼은 페냐롤 박스로 들어가다가 순간 힐킥으로 뒤로 공을 흘렸다.
‘이런, 속았다!’
바비 찰튼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마르티네스.
그는 때맞춰 달려 들어온 짐 박스터가 그대로 슈팅을 때리는 모습을 보았다.
마르티네스와 수비수들은 황급히 몸을 날렸다.
하지만 슈팅하는 척, 공 밑동을 차서 띄워 올린 짐은 페냐롤 수비수들을 따돌리고는 그대로 골문으로 돌파해 들어갔다.
마이다나 골키퍼가 몸을 날렸지만, 짐이 날린 슈팅은 그의 손끝을 스치고 골대에 꽂혀 들어갔다.
그리고 한동안 잠잠하던 관중석이 또다시 크게 들썩였다.
“추가 골이다!”
“이건 완전히 쐐기 골이군!”
점수는 4 대 1.
다시 3골 차로 벌려 놓는 짐 박스터의 골은 사실상 승부를 결정지어 버렸다.
패배라는 단어가 페냐롤 선수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젠 틀렸어.’
‘점수 차를 줄여도 시원찮을 판에 또 벌어지다니…….’
‘이길 수 없어. 올해 우승은 날아갔어.’
전반전 3점 차는 그래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따라잡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있었다.
실제 알베르토가 만회 골도 넣었고.
하지만 후반전도 절반 가까이 지나간 상황에서 뼈아픈 실점을 당하고 보니, 좌절감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경기가 재개되지만, 페냐롤 선수들의 발이 무거워 보입니다. 역시 경기를 뒤집기 힘들어 보이기 때문일까요?」
규율과 전술을 중시하는 유럽과 달리, 남미 축구는 자율과 개인기 위주로 경기를 풀어 갔다.
그렇다 보니 경기력에 기복이 있는 편이었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알베르토가 봉쇄당하고, 뼈아픈 실점까지 하다 보니 사기가 급감했다.
거기다 짧고 푹신한 유럽의 잔디는 그들의 피로를 점점 가속시키고 있었다.
“뭐 하고 있어? 어슬렁대지 말고 뛰어!”
알베르토는 여전히 최전방에서 고군분투하며 동료들을 독려했다.
다른 선수들과 달리 그의 눈빛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돼!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의 외침에 호응하는 동료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패배에 순순히 순응하는 그들의 모습에 알베르토는 화가 났다.
‘난 이대로 물러서지 않아! 쓰러트릴 수 없다면 콧대라도 부러트려 주겠어!’
종료할 때까지 끝까지 뛰고 부딪쳐 보리라.
투지를 피워 올리는 알베르토의 눈빛이 붉게 타올랐다.
***
네 번째 골이 터진 후, 경기 분위기는 맨유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최전방의 알베르토와 마이다나 골키퍼, 그리고 주장 마르티네스가 분전했지만, 페냐롤 선수들은 이에 호응하지 못했다.
지치고 낙담한 그들은 더 이상 실점 없이 이대로 경기가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버스비의 붉은 악마들은 그들의 심정을 헤아려 주지 않았다.
「고~ 올! 알렉스 퍼거슨, 다섯 번째 골! 측면에서 던컨이 올린 크로스를 기가 막힌 헤딩슛으로 꽂아 넣습니다!」
후반 38분, 알렉스가 헤딩슛을 할 때 그의 주변에 있던 수비수들은 전혀 경합해 주지 못했다.
이 경기를 취재하러 왔던 우루과이 기자들은 힘없이 고개를 떨군 페냐롤 선수들의 모습에 분통을 터트렸다.
“빌어먹을, 이건 안 먹어도 되는 골이잖아!”
“고국의 팬들을 생각해서라도 끝까지 맞서 싸워야지!”
아무리 승패가 결정 났다 해도 이렇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다니!
이는 원정 경기라고 해서 납득할 수 없었다.
맨유도 1차전 몬테비데오까지 와서 경기를 했고, 값진 무승부를 거두고 돌아갔으니까.
그런데 왜 페냐롤 선수들은 그리 못한단 말인가?
‘유나이티드가 그만큼 강해서?’
‘그렇더라도 끝까지 당당하게 맞서야지!’
‘알베르토가 저렇게 열심히 뛰어 주고 있는데…….’
최전방에서 고군분투하는 알베르토.
그는 공을 잡으면 맨유 진영으로 돌파해 들어가며 찬스를 만들려 애썼다.
실제 단독 찬스도 만들어 내 날카로운 슈팅도 몇 차례 날렸다.
하지만 다른 공격수들이 제대로 호응해 주지 않으니, 공격에 무게가 실리지 않았다.
‘젠장, 조금만 더 힘 좀 내 주지.’
거친 숨을 토하는 알베르토는 원망스러운 눈길로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상대는 확실히 강했다.
체구도 큰 선수들이 많고, 다들 체력이나 스피드도 뛰어났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전술, 그리고 경기에 임하는 자세.
공격수들도 전방에서 강하게 견제할 정도로 수비를 거들었고, 수비수들도 틈만 나면 전진해서 공격을 지원했다.
거기다 공격이나 수비를 할 때도 홀로 해결하기보다 주변에서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면서 함께 경기를 풀어 나갔다.
‘축구는 단체 스포츠지. 우리가 무너진 건 상대보다 단합력이 부족해서야.’
자유롭고 개인 기량을 중시하는 축구는 상당히 변칙적이다 보니 상대가 예상치 못한 플레이를 만들어 내곤 했다.
경기가 잘 풀릴 때는 매우 좋은 결과가 나오지만, 한번 틀어지면 걷잡을 수 없다.
바로 오늘 경기처럼.
「정규 시간이 모두 끝났습니다. 심판이 시계를 보고 있는 가운데, 공을 잡은 알베르토 선수는 끝까지 한 골 더 넣어 보려 애쓰고 있습니다. 과연 뜻을 이룰 수 있을지?」
알베르토의 분전은 맨유 팬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맨유 골대를 향해 돌파해 들어가자 야유가 아닌 환호성을 보냈다.
‘이 녀석, 정말 끈질기구만.’
‘마지막 기회다. 반드시 한 골 더……!’
남은 기운을 긁어모은 알베르토.
그는 즉석에서 따로 배우지도 않은 터닝 스킬을 펼쳐 보이며 준영을 제쳐 냈다.
‘이건 맥기디 스핀?’
‘어? 내가 방금 뭘 한 거지?’
자신도 모르게 준영을 제쳐 내는 데 성공한 알베르토.
그는 곧장 공을 잡아 슈팅을 날리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달려온 던컨이 태클을 날려 공을 라인 밖으로 내보냈다.
삐익- 삑!
알베르토의 마지막 공격이 무산되자마자 심판이 종료 휘슬을 길게 불었다.
그와 함께 우레와 같은 관중들의 환호성이 올드 트래퍼드에 울려 퍼졌다.
***
「우승, 마침내 우승입니다! 잉글랜드의 자랑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세계 챔피언으로 등극했습니다!」
감격에 찬 캐스터의 말과 함께, 환호하는 맨유 선수들의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비췄다.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는 알렉스 퍼거슨과 짐 박스터의 모습, 감격에 젖은 바비 찰튼과 100만 파운드짜리 미소를 짓는 던컨 에드워즈 등등.
그리고 수고한 모든 선수들을 얼싸안으며 치하하는 주장 이준영까지.
“다들 수고했어. 모두가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야.”
“우리가 뭐 한 거 있나요. 주장이 제일 고생했죠.”
“맞아요. 존이 없었다면 우린 정말이지…….”
갑자기 목이 멘 바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가장 어두운 날, 추락하는 비행기와 함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그날이 생각난 것이다.
그때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다.
이렇게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는.
그 사건을 겪었던 던컨과 해리 그렉, 빌 포크스도 눈시울을 붉혔다.
그들의 감정에 이입된 준영도 시큰해지는 콧잔등을 훔쳤다.
“우린 함께 뛰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고, 다 같이 역경을 이겨 내 왔어. 그런 점에서 다 같은 형제라 할 수 있지.”
준영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출신도 다르고, 성격도 제각각, 생각하는 점에도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붉은 유니폼을 걸치고 함께 피와 땀을 흘려 온 버스비의 아이들.
형제라는 단어 말고 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다들 지금 이 순간을, 그리고 여기까지 오면서 겪은 일들을 절대 잊지 말자. 그럼 앞으로의 힘든 여정도, 벅찬 고난도 이겨 낼 수 있을 테니까.”
“Yes, Captain!”
우렁차게 대답한 선수들은 준영에게 달려들어 헹가래를 쳐 주었다.
그렇게 기뻐하는 그들의 모습을 중계 카메라인 양 눈에 담는 이가 있었다.
바로 알베르토 스펜서.
그는 맨유 선수들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하지만 챔피언이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오늘 경기에서 페냐롤이 우승을 했다 하더라도 저들이 부러웠을 것 같았다.
‘나도 저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오늘 경기를 겪으면서 훨씬 더 간절해진 알베르토의 소망이 마음속에서 크게 부풀어 올랐다.
***
맨유가 인터콘티넨털 컵 우승을 거둔 그날 밤.
올드 트래퍼드 가까이 있는 고급 호텔에서 성대한 축하 파티가 열렸다.
FA와 UEFA뿐만 아니라, FIFA와 남미 축구 연맹의 인사도 찾아와서 맨유의 우승을 치하했다.
이런 축구계의 높으신 분들뿐만 아니라, 맨체스터 인근의 유명 축구 선수들도 찾아와서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군. 자네들은 영웅이야!”
“매튜스 씨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스탠리 매튜스의 칭찬에 준영은 쉬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살아 있는 전설, 잉글랜드 축구의 영웅에게 이 같은 찬사를 듣다니 정말이지 가슴이 웅장해졌다.
“빨리 내년 3월이 왔으면 좋겠군. 세계 챔피언을 꺾을 것을 생각하니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1961년 3월 31일에 맨유와 블랙풀의 리그 경기가 있다.
그래서 매튜스가 3월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설마 우리 팀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물론, 내가 직접 득점까지 할 생각인걸.”
“아이고, 이거 준비 철저히 해야겠네요.”
준영이 너스레를 떨고 있을 때, 노장 선수 한 명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실례합니다, 매튜스 씨. 세계 챔피언은 12월에 우리 맨체스터 시티가 먼저 꺾을 겁니다.”
“이런, 버트 씨도 우리 팀을 노리고 있었습니까?”
맨시티의 철벽 수문장 버트 트라우트만.
준영은 그의 호언장담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지난 시즌에도 펠레의 슛을 완전히 틀어막아 연전연승을 하던 리버풀에 패배를 안겨 주었으니까.
‘근데 맨시티 전에 리버풀이 먼저 덤벼들겠군.’
11월 5일에 맞붙는 리버풀.
빌 섕클리 감독과 붉은 제국의 축구 황제 펠레도 오늘 이 자리에 와 있다.
그들은 지금 인터콘티넨털 컵 우승 트로피를 살펴보고 있었다.
***
함께 역경을 이겨 내 아주 끈끈한 사이가 된 사례로 2002년 월드컵 4강에 올랐던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이 있습니다.
따로 친목계까지 맺어서 현재까지 으리으리하게 지내고 있지요.
2012년에 10주년 기념으로 올스타전을 치렀었는데, 내년엔 어떤 이벤트를 보여 줄지 기대… 하고 싶은데, 망할 코로나 때문에 20주년 파티가 이뤄질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