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09. 형님, 힘내세요
7월의 독극물 과자 사건 이후, 오스왈드 모슬리와 화이트 디펜스 당원들은 최대한 몸을 사리며 지내고 있었다.
여왕 폐하께서도 즐겨 자시는 주전부리에 저질러진 테러이다 보니, 그냥 흐지부지 끝날 리가 없었기 때문.
실제 경찰의 수사와 언론의 보도 또한 매섭게 이뤄지고 있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며 싱클레어가 주범이라는 사실도, 그가 화이트 디펜스의 간부라는 점도 알려졌다.
이에 대해 오스왈드는 뻔뻔하게 대처했다.
‘그자가 우리 단체에서 활동한 건 사실이지만, 이미 사건 이전에 무지하고 우둔한 행각으로 인해 퇴출되었습니다. 우린 이번 사건과 무관합니다.’
그러면서 싱클레어의 행방에 대해 아는 바 없다며 딱 잡아뗐다.
이러한 대응에 대해 마거릿 대처를 비롯한 몇몇 정계 인사들과 진보 언론에서는 꼬리 자르기를 한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흥, 실컷 짖어 봐라. 그런다고 우리가 털릴 구석이 있는지.’
실제 싱클레어의 단독 범행이기 때문에 화이트 디펜스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다만 그와 별개로 화이트 디펜스에 대한 여론은 매우 나빠졌다.
여기엔 노팅힐 사태 이후 인종 차별에 비판적인 여론이 커진 것도 한몫했다.
이에 우려하는 간부들도 있었지만, 오스왈드는 코웃음을 쳤다.
“흥, 우민들의 반응 따위 일일이 신경 쓸 필요 없다. 열등 인종들에게 일자리를 뺏기고, 손해를 보게 되면 금방 돌아설 테니까.”
그리고 어리석은 대중은 금방 잊어버리고 자극적인 뉴스에 눈을 돌리고 새로운 이슈에 열광한다.
안 그래도 최근 런던에는 새로운 이슈가 일고 있지 않은가.
“당수님, 어제 맨체스터의 노란 원숭이가 토트넘에게 패했다고 합니다.”
“나도 알고 있네.”
오스왈드는 소식을 듣고도 고소하게 여기기는커녕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맨유를 격파하는 데 수훈을 세운 선수들은 영국인이 아니었으니까.
“스스로 역량을 키워도 시원찮을 판에 검둥이 꼬마랑 크라우트 놈의 활약에 기대다니…….”
이러고도 과연 축구 종가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작년에도 펠레라는 남미에서 온 검둥이가 날뛰더니, 이번에는 모잠비크에서 온 튀기 놈이 설치고 있었다.
한심하게도 군중들은 그 열등 인종들의 활약에 열광하고 있었고.
“우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열등 인종들이야 몸 쓰는 거 말고 자랑할 게 없지 않습니까.”
“멍청한 소리 하지 말게. 체력은 곧 국력이야. 그런 역량부터 뒤처져서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겠나!”
백인이, 대영제국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건 모든 면에서 월등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역량을 쌓지 못하면 게르만 용병들에게 국방을 맡기고 향락에 빠졌던 로마인들처럼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나저나 싱클레어에겐 아무런 연락이 없나?”
그놈과의 접선은 피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소식을 안 들을 수는 없었다.
그 우둔한 것이 잡혀서 어설프게 입을 털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니까.
“현재 이탈리아에 있다고 은밀히 연락이 왔습니다. 근데 그냥 저렇게 놔둬도 될는지?”
“놔두지 않으면?”
오스왈드의 물음에 보고한 간부가 서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영원히 입을 닫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멍청하긴! 그랬다간 우리가 의심을 사게 될 게 뻔하지 않나! 쓸데없이 일을 키울 생각은 하지 마!”
지금은 조용히 있어야 하는 상황.
여론이 다시 이쪽을 주목하게 해서는 곤란했다.
“그나저나 이탈리아라……. 지금 한창 올림픽이 진행 중이겠군.”
영국은 1908년 런던 올림픽에서 1위를 차지한 이후, 성적이 썩 좋지 않았다.
전후에 열린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도 12위에 그쳤을 정도.
현재 메달 레이스 소식을 봐도 영국은 신통찮았다.
오히려 영연방인 오스트레일리아의 성적이 훨씬 좋았다.
‘죄수 놈들의 땅 파던 식민지에게도 뒤처지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
이렇게 쇠락하는 대영제국의 현실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입지를 높일 방법이 없을까?
오스왈드는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히틀러의 나치당이 1차 세계 대전 때 패전한 독일을 장악한 일이 있으니, 불가능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
이탈리아 중부 투스카니의 그로세토.
이곳에 있는 올림피코 카를로 제키니 경기장에서는 로마 올림픽 축구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9월 1일 오늘 열리는 경기는 B조 3차전 영국과 한국.
조 1위만 준결승에 진출하는 진행 방식 덕분에 1무 1패인 영국과 한국은 이미 조 예선 탈락이 확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팀 선수들은 전의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대론 돌아갈 수 없다! 적어도 1승은 챙기고 가야 해!’
영국은 체면이라도 차리고 싶었고, 한국은 혁명 후 재건에 땀 흘리는 국민들에게 조금이나마 기쁜 소식을 전해 주고 싶었다.
‘할 수 있어. 오늘 경기는 반드시 이긴다!’
최정민은 앞서 경기들을 생각하면 승리가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었다.
이탈리아와의 1차전에서는 잔니 리베라에게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후반에 문정식이 만회 골을 넣으며 무승부를 거두었다.
2차전 브라질을 상대로도 잘 버티다가 후반에 실점하며 1 대 0으로 패했다.
이렇게 경기 내용이 나쁘지 않았기에, 현지인들도 꽤 놀라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이탈리아 현지 에이전트나 스카우터들이 한국 선수들에 대해 문의하기도 했다.
‘더구나 영국 축구는 전지훈련을 하면서 실컷 경험했으니 해볼 만하지.’
영국에서 장기간 합숙을 하며 그곳 프로팀이나 아마추어팀과 연습 경기도 많이 하며 조직력을 쌓았다.
모두가 준영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
1승도 못하면 애써 도와준 아우님을 볼 낯이 없어질 것이다.
“마지막 경기다! 죽기 살기로 뛰어 보자!”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기운차게 함성을 지르며 필드로 나간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
경기가 시작되자 관중들의 시선이 한국 선수들에게 쏠렸다.
자국 팀과 비긴 화제의 팀이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꼬레아 선수들은 유니폼이 참 멋진 것 같단 말이지.”
“신문에서 그러는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니폼이랑 같은 소재에 최신 기술이 적용된 거래.”
“나2키인지 뭔지 하는 회사에서 만든 거라며? 영국과 오스트리아의 육상 선수들도 그 회사 신발을 신는다더군.”
관중들이 이리저리 떠드는 사이, 한국 팀이 좋은 찬스를 잡았다.
중원에서 김선휘가 끊어 낸 공을 측면의 최정민에게 패스, 수비수 한 명을 플립플랩으로 제쳐 낸 최정민은 파 포스트 쪽으로 휘어 찼다.
골키퍼가 몸을 날렸지만, 공은 골대 구석으로 정확히 들어갔다.
근사하게 터진 선제골에 관중석에서 탄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와, 꼬레아가 먼저 골을 넣다니!”
“저 Choi라는 선수가 꽤 잘하더라고. 아시아에서 제일 뛰어난 공격수라던가?”
“과연 존 Y. 리의 나라로군!”
영국 축구대표팀 선수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탈리아나 브라질도 아니고, 축구 변방 중의 변방인 한국 따위에게 실점을 할 줄이야!
‘선제골을 넣었다고 우쭐대지 마라!’
‘우리는 축구 종가라고!’
비록 아마추어나 세미프로이긴 하지만, 그 조건은 올림픽에 출전하는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
축구 종가의 선수로서 듣보잡 나라에게 절대 질 수 없었다.
“수비! 다들 내려가서 수비해!”
“사람 놓치지 마!”
영국 대표팀의 반격에 한국 선수들은 공수를 망라하고 수비에 열중했다.
목청 높여 동료들과 소통하며, 공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 벌 떼 같은 움직임에 영국 선수들은 쉽사리 전진하거나 패스를 넣지 못했다.
“밀리지 마! 자세를 낮추고 버텨!”
“찬기야, 태성이를 도와줘!”
“끊어 내! 좋았어. 잘했다!”
한국 선수들이 중원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움직이자, 영국 선수들은 패스보다 후방에서 전방으로 바로 건네주는 롱 볼을 시도했다.
후방에서 길게 때려 주면 전방의 공격수는 그에 맞춰 달려가는 킥 앤 러시.
최전방의 짐 루이스나 패디 헤이스티 등은 거친 몸싸움으로 한국 수비수들을 몰아붙이며 공을 차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는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너희들 수법은 잘 알고 있거든!”
“우리가 밀면 그냥 밀려 나갈 호구로 보이냐?”
한국 선수들은 체격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거기다 올림픽을 대비해서 충분히 영양을 섭취하고 체력도 키웠다.
특히 차태성은 그야말로 곰 같은 기운을 발휘, 상대 공격수를 밀어내고 공을 가로챘다.
“와, 저 수비수, 직접 전방으로 돌진해 들어가는데?”
“완전히 들소 같아!”
차태성의 과감한 드리블은 관중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쩔쩔매던 영국 선수들은 코너 플래그 근처에 와서 간신히 태클로 끊어 냈다.
“Corea! Corea!”
“Non mollare, Coreani!”
한국 대표팀의 선전에 한국을 응원하는 관중들도 더 많아졌다.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강자보다는 약자의 선전이 더욱 볼만했으므로.
거기다 콧대 높은 영국인들이 망신당하는 것도 꿀잼이라 할 만했다.
이렇게 관중들의 응원을 받으며 한국 대표팀은 1 대 0으로 리드하며 전반을 마쳤다.
***
“자, 한 골 더 넣어 보자!”
“문식아, 앞쪽으로 들어가!”
후반전에도 한국 선수들은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쳐 나갔다.
후반 9분에 조윤옥의 벼락 슛이 골키퍼의 손에 맞고 크로스바를 넘어갔다.
이어지는 한국의 코너킥.
떨어지는 공을 향해 양 팀의 선수들이 몰려들었다.
골키퍼의 손에 맞고 튀어나온 리바운드 볼을 정순천이 잡아 냈다.
그가 곧장 슛을 하려던 순간, 영국 대표팀 주장인 마이클 그린우드가 태클로 그를 쓰러트렸다.
“페널티킥이다!”
“어, 그런데… 왜?”
심판이 휘슬을 불지 않았다.
한국 선수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서독 심판 요제프 칸들빈더는 그대로 경기를 이어 나갔다.
“우우-!”
“야 인마, 심판! 왜 영국 놈들을 편드냐!”
관중들까지 비난하고 나섰지만, 심판은 요지부동.
노골적인 편파 판정은 하지 않았지만, 은근슬쩍 영국을 편들면서 한국의 공격 흐름을 끊거나 영국 쪽에 프리킥을 주었다.
“저런 개잡놈의 새끼!”
차태성은 당장이라도 심판의 멱살을 잡아채 메다꽂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퇴장이고, 팀도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던 그는 짐 루이스가 날린 슛을 육탄으로 막아 냈다.
혹시나 핸들링 파울에 걸릴까, 이준영이 가르쳐 준 대로 뒷짐을 진 채로.
옆구리를 맞고 튕긴 공은 다행히 동료인 김선휘가 받았다.
김선휘는 앞쪽에 있는 조윤옥 쪽으로 패스를 보냈다.
그러자 조윤옥은 힐킥으로 공을 최정민에게 건네주고 앞으로 뛰어 들어갔다.
‘리턴!’
조윤옥의 의도를 파악한 최정민은 곧장 그가 가는 방향으로 패스를 찔러 주었다.
빠른 스피드로 수비수 그린우드를 뿌리친 조윤옥은 골키퍼와 일대일 상황을 만들었다.
그리고 침착하게 골키퍼를 제쳐 내며 골대로 공을 밀어 넣었다.
관중석에서 또 한 번 놀람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2 대 0이다!”
“우와, 이거 진짜냐?”
관중들의 시선이 추가 골을 넣은 조윤옥에게 향했다.
그는 준영이 곧잘 하는 대로 유니폼을 벗어 던지고, 내의에 적힌 문구를 기자들에게 보였다.
<형님, 감사합니다. 힘내세요!>
항상 자신의 뒤를 봐준 준영에게 보내는 메시지.
그가 이 글을 보고 토트넘전 패배의 아쉬움을 떨쳐 내기를, 그리고 곧 있을 인터콘티넨털 컵 2차전에서도 대활약을 펼치기를 기원했다.
***
2012 런던 올림픽 축구에서 우리나라가 주최국인 영국을 승부차기에서 누르고 준결승에 올라갔었죠.
축구 종가의 심장에서 그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 버린 대사건이었습니다.
그때 불륜남(…) 라이언 긱스의 마지막 국가대표 커리어가 안습하게 끝나기도 했습니다.
이 대회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선제골을 터트리며 박씨탈이라는 별명을 얻은 박주영 선수는 아직 선수 생활을 더 하고 싶다며 이적을 생각하고 있다고 하네요.
기왕이면 고향에 내려와서 현역을 마무리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