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08화 (308/400)

Round 308. 쓴맛

“제길, 따라갈 수가 없어!”

“뭐가 저리 빠른 거야!”

이미 에우제비우에게 추월당한 노엘, 그리고 황급히 수비로 돌아가고 있던 빌리 맥닐은 에우제비우를 따라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그들은 따라잡을 수 없었다.

‘애써 봤자 소용없어. 난 100미터를 11초 안에 달린다고.’

거침없이 달려온 에우제비우의 눈에 잔뜩 긴장한 해리 그렉 골키퍼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각을 좁히려 달려 나오는 동시에 에우제비우도 슛을 날렸다.

파앙- 퍽!

‘아니!’

반갑지 않은 둔한 소음.

에우제비우가 슈팅을 날린 순간, 전력 질주로 되돌아온 준영이 몸을 날렸다.

그의 다리에 맞은 슛은 굴절되어 골대 옆으로 흘러 나갔다.

「캡틴 리의 아슬아슬한 클리어! 유나이티드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에우제비우가 돌진해 올 때 얼어붙었던 맨유 서포터들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Captain Lee! Captain Lee!”

“You are the best player!”

12번째 전사들은 준영을 연호하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몇몇은 한국 교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어 대기도 했다.

그 응원에 힘을 얻었는지, 준영은 이어지는 토트넘의 코너킥 공격도 헤딩으로 깔끔하게 걷어 냈다.

“쳇, 하여간 저 녀석이 골치란 말이지.”

경기를 지켜보던 빌 니콜슨 감독은 준영의 호수비에 투덜댔다.

코치 시절부터 녀석의 플레이를 보고 분석해 왔지만, 쉽사리 제압할 방법이 없는 정상급 플레이어였다.

그렇다 보니 리드해 가고 있는 현재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녀석이 언제, 어떻게 골을 터트릴지 알 수 없었으니까.

‘최소 2골, 아니 3골 차이는 나야 안심이 될 것 같군.’

니콜슨이 생각에 잠긴 사이, 관중석에서 또다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필드를 바라보니 공을 잡은 에우제비우가 준영을 제치고 강슛을 날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던 니콜슨 감독.

에우제비우의 슛이 크로스바를 살짝 넘어가는 광경을 보고 뒤로 허리를 젖혔다.

“아깝군, 아까워!”

존 Y. 리를 제치는 데 신경을 쓴 나머지, 슈팅에 힘이 너무 들어갔던 모양.

아쉬워하며 돌아오는 에우제비우에게 니콜슨은 잘했다며 엄지를 치켜들어 주고 박수를 보냈다.

‘놀랄 만한 기량이지만, 아직 배울 것도, 다듬을 점도 있어. 앞으로 그 점을 차근차근 가르쳐 주마.’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할 수 있는 플레이를 하며 마음껏 활개 쳐 보기를.

어린 흑표범을 지켜보는 니콜슨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

전반전은 토트넘이 1 대 0으로 리드한 상태에서 끝났다.

이에 버스비 감독은 동점, 그리고 역전을 위해 후반전에 승부수를 던졌다.

“노엘, 후반전엔 최전방으로 올라가서 데니스와 클러프를 지원하도록.”

“알겠습니다.”

“존과 바비, 던컨은 서로 위치를 바꿔 가면서 공수에 지원해 주게. 상대를 교란시켜야 빈틈이 만들어질 테니까.”

“맡겨만 주십쇼!”

한 골, 일단 한 골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

전반에 살리지 못한 아쉬운 찬스들을 후반에는 반드시 성공시키고 말리라.

그리 다짐한 맨유 선수들은 다시 필드로 나갔다.

「후반전 시작되었습니다. 토트넘은 큰 변화가 없는 가운데, 유나이티드는 보다 공격적으로 포메이션이 바뀐 듯하군요.」

노엘 캔트웰의 가세로 맨유의 최전방은 3톱으로 변했다.

여기에 공세로 나설 때 바비 찰튼이나 조니 자일스, 짐 박스터가 가세하면서 공격에 힘을 실어 주었다.

「후반전에 승부수를 던지기로 한 걸까요? 유나이티드 선수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계속 주도권을 가지고 토트넘 골대를 두들기고 있습니다.」

후반 6분, 노엘의 크로스에 이은 클러프의 헤딩슛이 골대 옆을 살짝 스치며 지나갔다.

그 뒤에 자일스가 시도한 중거리 슛이 브라운 골키퍼의 가슴에 안겼고, 박스터가 과감하게 돌파하며 날린 슈팅 역시 선방에 막혔다.

연이어 위기 상황이 펼쳐졌지만, 토트넘은 쉬 반격을 시도하지 못했다.

중원의 사령관이 봉쇄당했기 때문이다.

“이 녀석들, 대놓고 막기냐?”

대니 블란치플라워는 번갈아 가며 자신을 마크하는 바비와 던컨을 보며 투덜댔다.

심지어 센터백인 준영도 공격에 가담하러 올라왔다가 토트넘의 반격이 펼쳐질 것 같자, 파울로 대니를 저지하고는 내려갔다.

이렇게 패스를 해 줄 사람이 묶이자, 토트넘 공격수들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건 에우제비우 역시 마찬가지.

‘전방에서 서성이고 있어 봤자 소용없어.’

‘주장이 패스를 주지 못하면 우리가 내려가서 받아 오는 수밖에.’

그런데 이렇게 내려가서 받아 오고 다시 전방으로 올라오는 과정이 번거로운 데다, 체력까지 써야 했다.

당연히 전반에 비해 토트넘의 공격은 둔화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공격을 제대로 못하면 그만큼 우리에게 기회가 나기 마련이지.”

“예,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죠.”

버스비 감독의 말에 머피 코치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상황을 완전히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일단 우리 의도대로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죠. 하지만 아직 마침표를 찍진 못했어요.”

“확실히 쉽사리 골이 안 나는군.”

대니 블란치플라워가 봉쇄되긴 했지만, 데이브 맥케이가 여전히 팔팔하게 분전하고 있었다.

여기에 FC 퀼른 출신의 스위퍼 슈넬링거가 맨유의 결정적인 기회들을 계속 차단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모리스 노먼이나 피터 베이커 등도 덩달아 호수비를 펼쳐 보였다.

“저 독일 수비수, 예전에 우리가 전지훈련 갔을 때 맞붙었던 적이 있지?”

“네, 우리 팀 수비에 빈자리가 있으면 영입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마주치는군요.”

그때 영입했으면 지금 상황이 달라졌으려나.

그러나 이제 와서 그런 후회를 해 봤자 소용이 없다.

지금은 토트넘의 끈덕진 수비진을 뚫고 골을 넣는 게 중요했으니까.

***

후반전에 맨유는 여러 차례 기회를 만들어 냈다.

자일스가 밀어 준 패스로 클러프가 골키퍼와 일대일 기회를 잡았지만, 아쉽게 골대를 스쳤다.

노엘 캔트웰이 과감하게 박스로 돌파해서 날린 슛이 골키퍼의 손에 잡히기도 했다.

이후에도 토트넘 박스 안팎에서 시도된 공격들은 골대를 넘어가거나 골키퍼나 수비수들에게 막혔다.

「짐 박스터가 뛰어드는 클러프를 보며 크로스! 하지만 이번에도 브라운 골키퍼가 잡아 냅니다.」

브라운은 곧장 에우제비우 쪽으로 공을 던졌다.

여전히 준영과 바비, 던컨이 번갈아서 대니를 견제하고 있다 보니 에우제비우의 발을 빌려 공격을 진행해 가고 있는 것이다.

“달려, 유세비오!”

“유나이티드 놈들의 골대를 또 한 번 흔들어 주라고!”

빠른 발을 가진 에우제비우는 동료들과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쉴 새 없이 토트넘 문전을 위협하던 맨유 선수들은 그가 공을 잡기만 하면 황급히 자신들의 진영으로 복귀하곤 했다.

후방의 수비수들에게만 맡겨 두기에는 불안했기 때문이다.

“하하핫, 유나이티드 놈들, 허둥대는 것 좀 봐.”

“근데 저놈들은 몇 번이나 저렇게 왔다 갔다 하는데도 지친 기색이 없네.”

“없긴, 전반보다 느려졌구만.”

“그래도 그렇게 심해 보이진 않는걸.”

관중들보다 직접 상대하는 토트넘 선수들이 맨유 선수들의 체력에 혀를 내둘렀다.

“저 자식들은 대체 뭘 먹고 저렇게 뛰어다니는 거야?”

“아마도 양념 치킨 아닐까요?”

“기름진 건 안 좋다던데……. 아, 그보다 치킨 말 나오니까 먹고 싶잖아, 젠장!”

대니는 경기가 끝나면 당장 치맥을 먹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팀의 상징이 닭이다 보니 닭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 뭐라 하는 이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하지만 대니의 생각은 달랐다.

‘닭은 우리 팀의 상징이죠. 그 닭을 먹음으로써 팀과 내가 한 몸이 되는 겁니다. 이보다 뜻깊은 의식이 있겠습니까.’

구단 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가 비겁한 변명이라고 잔소리를 한바탕 들었다.

그래도 대니는 닭이 좋았다.

“가장 좋은 닭은 죽은, 아니 튀긴 닭이지.”

“닥치고 수비 좀 도와줘요, 주장. 유나이티드 놈들이 또 옵니다.”

방금 전 에우제비우의 공격은 아쉽게도 슛이 골대를 벗어나면서 실패.

이후 해리 그렉이 길게 찬 공을 던컨이 가슴으로 받아 냈다.

곧장 자일스에게 패스를 보낸 던컨은 리턴 패스를 보내라는 눈길을 보냈다.

그리고 자인스가 패스를 밀어 주기 무섭게 강슛을 날렸다.

「페널티 아크 앞에서 빅 던이 슛-! 아, 골대 맞고 나옵니다! 골대가 토트넘을 지켰습니다!」

던컨은 아쉬운 마음에 잔디를 걷어찼다.

전반에 에우제비우인지 유세비오인지 하는 애송이가 슛을 날린 위치보다 훨씬 골대에서 가까웠다.

그러니 이 거리에서 충분히 노릴 만하다!

그런 생각에 무회전으로 차 버렸는데, 정말 아까운 결과가 나왔다.

“하아… 오늘은 뭔가 잘 안 되네.”

“포기하지 마. 아직 10분 더 남았다고.”

기회가 매번 무산되자, 준영도 답답했다.

하지만 드러내지 않고 동료들을 독려하며 계속 기회를 만들어 갔다.

「남은 정규 시간은 이제 10분. 스코어는 1 대 0이고 결과는 아직 단정할 수 없습니다. 과연 유나이티드가 경기를 뒤집을 수 있을지?」

어려운 경기 때마다 놀라운 저력을 발휘해 온 맨유.

그렇다 보니 관중들은 기대와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버텨라! 여기까지 와서 동점을 내주면 우리가 지는 거야!”

“한 골! 일단 한 골만 만들면 경기를 뒤집을 수 있어!”

양 팀 감독들이 라인 가까이 와서 선수들을 독려하고 있을 때, 맨유에서 가장 저력이 강한 사나이가 공을 몰고 앞으로 나왔다.

위기 상황에서 항상 한 방 터트려 주는 승부사 이준영.

그의 플레이에 경기장의 모든 이들이 시선을 모았다.

‘닭집 녀석들, 이젠 대놓고 밀집 수비로군.’

후반전 역습을 이끌던 에우제비우도 지쳤는지 거칠게 숨을 토하고 있었다.

더 이상의 공격 전개는 힘들다 보았던지 토트넘의 모든 선수들이 박스 안팎에 자리를 잡았다.

남은 시간 이대로 농성을 펼칠 생각인 듯했다.

‘그럼 이쪽에서 성문을 부숴 주지!’

과감하게 슈팅 자세를 잡은 준영.

데이브 맥케이가 황급히 달려들었지만, 슈팅은 페이크였다.

“존 Y. 리가 온다!”

“다들 집중해서 막아!”

준영은 박스 쪽으로 전진하면서 수비수를 자신 쪽으로 끌어내며 빈틈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빈틈으로 클러프가 파고들었다.

‘기회!’

준영이 찔러 준 패스를 받은 클러프는 망설임 없이 슛을 때렸다.

그리고 골키퍼의 다리 사이로 빠진 공이 골문을 흔들었다.

“들어갔다!”

“종료 직전에 동점이라니!”

맨유 선수들과 서포터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선심이 치켜든 깃발이 보였다.

“오, 오프사이드?”

“그럼 골이 무효인 거야?”

“젠장, 토트넘 홈이라고 판정을 저따위로……!”

맨유 서포터들이 분통을 터트렸지만, 오프사이드는 분명히 맞았다.

준영이 패스하기 직전, 슈넬링거가 전진하며 순간적으로 오프사이드 트랩을 깔았기 때문.

그렇게 마지막 기회는 무산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판이 종료 휘슬을 불었다.

승자인 토트넘 선수들이 기뻐 날뛰는 모습을 맨유 선수들은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거참, 무승부는 할 줄 알았더니만.’

패배의 쓴맛을 느끼고 있던 준영에게 에우제비우가 다가왔다.

“왜? 나한테 볼일이라도?”

“원한다. 캡틴 리 유니폼.”

배운 지 얼마 안 되는 영어로 에우제비우가 간절하게 요청해 오자, 준영은 흔쾌히 유니폼을 교환해 주었다.

“다음에 올드 트래퍼드에서 보자.”

“알았다. 또 만난다.”

전설을 시작하는 흑표범.

준영은 다음에 또 그와 승부를 겨룰 날을 기약하며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

칼 하인츠 슈넬링거는 독일 국가대표 선수로 네 번의 월드컵에 출전했습니다.

스위퍼와 수비형 미드필더로 상당히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어서 AC 밀란에서도 10년 가까이 활약을 했었죠.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준결승에서 이탈리아와 엄청난 명승부를 벌였을 때 그가 후반 종료 직전 동점 골을 넣었습니다.

그때 이탈리아 선수들은 ‘대회 끝나면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마라.’며 협박했다는군요.

다행히 연장전에서 이탈리아가 이겨서 슈넬링거는 AC 밀란에 복귀할 수 있었죠.

한편으로 이런 일화를 보면 이탈리아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구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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