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05. 더티 리즈
퍼펑! 펑! 펑!
경기 시작을 알리는 심판의 휘슬이 울리자, 경기장에 축포가 화려하게 터졌다.
원정 응원을 온 리즈 팬들은 이를 보고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유나이티드 놈들 망한 거 아니었어? 그 한국 놈, 사업을 망쳤다면서?”
“그거랑은 별개지. 더구나 그 사건 후로 녀석의 업체는 상당한 투자를 받았다고 들었어.”
“아, 우리는 언제 저렇게 돈을 팡팡 써 보나.”
리즈 팬들이 한숨을 내쉬는 가운데, 초반 경기 흐름은 맨유 쪽의 우세로 흘러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리즈가 속절없이 밀리지는 않았다.
“쫓아가! 놓치면 안 돼!”
“쫄지 말고 달려들어!”
리즈 선수들은 초반부터 활발히 움직이며 거칠게 맨유 선수들에 맞섰다.
기량 차이를 활동량과 저돌적인 플레이로 메우려 했던 것.
“좋아, 더 몰아붙여! 들개처럼 물어뜯는 거다!”
리즈의 공격수 겸 감독인 돈 레비는 연방 선수들을 독려했다.
그냥 지시만 내리는 게 아니라 수비 지역까지 내려와 사납게 태클을 날리며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다.
“젠장, 이건 파울이라고!”
돈 레비의 태클에 걸려 나동그라진 브라이언 클러프는 버럭 화를 냈다.
발바닥이 보일 만큼 높은 태클이었는데, 심판이 그냥 넘어갔기 때문.
아무튼 클러프가 흘린 공은 잭 찰튼의 발을 거쳐 미드필더 빌리 브렘너에게 전달되었다.
“좋았어, 역습이다!”
“누구 맘대로.”
오늘 경기 하프백으로 출전한 준영은 냉큼 브렘너에게서 공을 가로챘다.
그러자 악착같이 준영을 쫓아와서 다시 공을 탈취하려 했다.
거의 한 자 이상이나 준영보다 작았지만, 쉽사리 밀리지 않고 껌딱지처럼 바싹 달라붙었다.
「스코틀랜드 소년의 패기에 캡틴 리가 전진하지 못합니다. 일단 뒤로 공을 돌리는데요.」
경기를 중계하는 캐스터는 물론, 관중들도 브렘너의 투지 넘치는 플레이에 혀를 내둘렀다.
감탄한 건 준영도 마찬가지.
브렘너의 저돌적인 기세는 경계심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과연, 리즈 시절을 이끈 작은 거인답군.’
빌리 브렘너.
올해 18세인 이 어린 미드필더는 잭 찰튼, 조니 자일스와 더불어 60~70년대 리즈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레전드 플레이어였다.
바비 찰튼만큼이나 활동량이 많고, 무엇보다 불같은 투지를 가진 선수였다.
‘아직은 덜 여물었다만, 얕보다간 큰코다치겠어.’
준영이 브렘너를 주시하는 사이, 그가 뒤로 돌렸던 공은 노엘 캔트웰을 거쳐 전방으로 전달되었다.
이렇게 길게 찔러 들어오는 패스를 받은 클러프는 곧장 골문을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슈팅을 날리기 직전, 잭 찰튼에게 떠밀려 나동그라졌다.
클러프의 얼굴에 벌겋게 핏대가 올랐다.
단지 공을 빼앗겼기 때문이 아니라, 잭 찰튼의 팔꿈치에 맞았기 때문.
하지만 심판은 고의가 아니라 경합 상황에서 일어난 충돌로 보았는지 그냥 넘어갔다.
“빌어먹을 리즈 놈들, 거렁뱅이답게 정말 더럽게 플레이하는군!”
“참아요, 클러프 형. 주장도 침착하고 냉정하게 플레이하라고 사인을 보내고 있잖아요.”
돈 레비가 리즈를 이끌고 있다면, 맨유의 그라운드 사령관은 이준영이었다.
그는 머피 코치가 보내는 사인을 전달받아 선수들을 지휘하며, 팀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상대가 거칠게 나온다고 맞대응을 하면 경기가 꼬여 버리게 돼. 냉정하게 우리 플레이를 하지 않으면…….’
일단은 공격 횟수를 계속 늘리며 선제골을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리즈 선수들이 저돌적인 기세를 보인다 해도 스코어가 벌어지면 맥이 풀리게 될 테니까.
***
빌리 브렘너의 투지와 잭 찰튼이 펼치는 견고한 수비에 힘입어 리즈는 전반전을 실점 없이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역습을 펼치진 못했다.
맨유 페널티 박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해서 돈 레비가 외곽에서 중거리 슛만 시도했는데, 이것도 골대를 지나치기 일쑤.
이런 흐름은 후반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유나이티드의 해리 그렉 골키퍼는 진짜 심심하겠는데.”
“저 정도면 경기 끝나고 샤워 안 해도 되겠군.”
골대 뒤에 있던 기자들이 쑥덕이고 있을 때, 해리 그렉이 골대를 두고 슬금슬금 앞으로 나갔다.
“설마 공격을 거들려는 건가?”
“에이, 그래도 골키퍼인데 설마 그러겠어?”
“모르지. 유나이티드, 공격이 잘 안 풀리고 있잖아.”
기자들의 기대(?)와 달리, 해리 그렉은 마누엘 노이어 같은 기행을 펼치지 않았다.
다만 다소 전진한 상태에서 스위퍼 임무를 적절히 도맡았다.
덕분에 센터백인 빌 포크스와 셰이 브레넌은 보다 전진해서 공격수들을 지원할 수 있었다.
「잭 찰튼이 또다시 침투 패스를 끊어 냅니다. 그리고 바로 역습으로……! 아, 던컨 에드워즈가 차단해 냅니다.」
빌리 브렘너는 바로 공을 빼앗기자 미간을 찌푸렸다.
‘젠장, 상대 수비가 너무 견고해.’
이준영, 던컨 에드워즈, 바비 찰튼.
맨유의 중원을 맡고 있는 이 삼총사는 수비력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공격 가담에도 적극적이었다.
기술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무서운 건 엄청난 활동량.
전후좌우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이들을 뚫고 맨유 진영까지 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어렵게 파고들면 레이 윌슨, 빌 포크스, 셰이 브레넌, 노엘 캔트웰로 이뤄진 견고한 4백이 기다리고 있었다.
‘패스, 상대의 허를 찌를 수 있는 패스를 보낼 수 있는 선수가 우리 팀에 있다면 좋을 텐데!’
답답해하는 브렘너의 표정을 본 준영은 그가 무엇을 아쉬워하고 있는지 눈치챘다.
‘네가 원하는 패스 마스터는 우리 손에 있지.’
조니 자일스.
실제 역사에서 빌리 브렘너와 콤비를 이루며 리즈의 전성기를 연 레전드 플레이어다.
하지만 그 전설은 현재 맨유에 있고, 관중석에서 후보 선수들과 함께 경기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리즈 녀석들, 꽤 끈덕지네.”
“그러게. 올 시즌 유력한 강등 후보라 생각해서 탈탈 털릴 줄 알았더니만.”
“슬슬 골을 넣지 않으면 곤란한데…….”
자일스는 스코어보드의 시계를 보았다.
후반 20분대로 접어들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홈팀인 맨유 쪽이 더 초조해지게 된다.
안 그래도 답답한 홈팬들이 성화를 부리고 있었으니까.
“아아, 뭐 하는 거야. 거기서 슛을 했어야지!”
“강등 후보도 못 잡으면 이번 시즌도 우승 못한다고!”
개막전이라 화려한 골 폭죽을 기대했건만.
한숨을 토하던 팬들은 이내 자신들의 답답한 속을 뚫어 줄 승부사에게 애원했다.
“Go, Captain! Go! Go!”
“캡틴 리, 제발 마법을 부려 줘!”
팬들의 열화 같은 요청에 준영이 전방으로 나갔다.
그 역시 이대로 무를 캘 생각은 없었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리그 우승으로 가는 길이 편하지.’
때마침 기회도 왔다.
우측면에서 알버트 퀵솔이 크로스를 올렸고, 문전으로 뛰어들며 헤딩으로 내리찍었다.
그러나 리즈 골키퍼의 선방에 막힌 헤딩슛은 크로스바를 넘어가 버렸다.
“아! 아깝다!”
“아직 코너킥 기회가 있어!”
팬들이 기대를 부풀리는 가운데, 맨유의 코너킥 공격이 시작되었다.
리즈 수비수들이 모두 준영을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퀵솔이 올린 코너킥이 날아들었다.
‘이런, 짧잖아!’
‘놓치지 않는다!’
짧게 날아온 코너킥을 받으러 움직이는 준영.
그리고 그 뒤를 잭 찰튼과 빌리 브렘너가 쫓아왔다.
그들이 달라붙기 무섭게 준영은 떨어지는 공을 머리로 건드려 뒤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잽싸게 돌아서 두 선수 사이를 빠져나가려 했다.
‘이런, 안 돼!’
준영이 슈팅을 시도한 순간, 잭 찰튼과 브렘너는 저도 모르게 팔을 잡아챘다.
그 바람에 준영의 슛은 의도하지 않은 곳으로 날아갔다.
“저거 파울…….”
항의하려던 클러프는 공이 자신에게로 날아오자 냉큼 논스톱 슛을 날렸다.
골키퍼의 다리 사이로 빠진 공은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골인!”
“기다렸다고!”
“Oh, Captain! Our Captain!”
순식간에 체증이 쑥 내려간 홈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연이어 흥겨운 응원가가 올드 트래퍼드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거치른 벌판으로~ 달려가자!”
“으쌰라~ 으쌰~!”
누가 먼저라고 할 거 없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율동을 펼치는 홈팬들의 모습에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오늘 경기를 한 골로 끝내면 다들 섭섭해하겠군.”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좀 더 힘내자.
축구화 끈을 고쳐 맨 준영은 추가 골을 위해 다시 달려 나갔다.
***
<유나이티드, 더티 리즈 제압!>
<선제골 브라이언 클러프, ‘더러운 플레이로 우릴 막을 수 없어’.>
<바비 찰튼, 추가 골로 형제의 가슴에 대못을 박다!>
<아시아의 거인 캡틴 리, 2개의 어시스트로 승리를 견인!>
1라운드가 끝나자, 각 언론사에서 맨유의 승리를 보도했다.
하지만 맨유 선수들은 느긋하게 개막전 승리를 만끽할 틈이 없었다.
나흘 후에 2라운드 원정 경기가 있었으므로.
“다음 상대는 에버튼이다. 올 시즌에 상당히 전력을 강화했다니까 정신 바짝 차려야 해!”
“공격수인 로이 버넌과 프랭크 위그널에게서 절대 눈을 떼선 안 돼!”
27일 3라운드 홈경기 상대도 에버튼이었다.
이 2연전을 잘 치르기 위해 선수들은 회복 및 훈련, 그리고 상대 팀 분석에 정성을 들였다.
그리고 24일이 되자 적진인 구디슨 파크에 입성, 에버튼과 격돌했다.
“Forever Everton!”
“버스비의 악마 새끼들을 때려잡아!”
“올해는 우승 좀 해 보자!”
에버튼은 2라운드가 홈 개막전이었다.
더구나 앞서 있었던 1라운드 토트넘 원정에서 패했기 때문인지 5만여 명의 에버튼 팬들은 승리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건 에버튼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이 버넌이 미키 릴에게 패스, 미키 릴, 그대로 슈웃-! 오, 들어갔습니다! 정말이지 엄청난 슛인데요!」
전반 23분, 에버튼의 윙어 미키 릴이 레이저 같은 중거리 슛으로 선제골을 만들어 냈다.
그 골을 시작으로 경기는 난타전으로 진행되었다.
전반 종료 직전에 던컨 에드워즈가 동점 골을 만들어 냈고, 후반전을 시작하자마자 데니스 바이올렛의 머리에서 역전 골이 터졌다.
하지만 기뻐하는 것도 잠시뿐.
에버튼의 미드필더 바비 콜린스가 페널티 아크 앞에서 얻어 낸 프리킥을 골로 연결하면서 동점을 만들어 냈다.
거기서 흐름을 탄 에버튼은 미키 릴과 바비 콜린스가 다시 2골을 추가, 4 대 2로 다시 역전해 나갔다.
그러나 맨유는 거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후반 86분 코너킥에서 준영이 헤딩골을 터트리며 추격했고, 1분 후에는 데니스 로가 상대 수비수의 미스를 놓치지 않고 동점 골을 만들어 냈다.
결국 경기는 4 대 4 무승부로 종료되었다.
“전력을 강화했다더니…….”
“3라운드 경기도 쉽지 않겠는걸.”
“그다음이 또 문제지.”
27일 홈에서 에버튼을 상대한 후에 31일에는 토트넘 원정 경기가 있었다.
준영이 알기로 이번 시즌의 우승 팀은 토트넘.
실제로 토트넘은 해외에서 용병 선수까지 영입하며 상당히 전력을 강화했다는 정보가 있었다.
‘그 토트넘 경기가 끝나면 그다음 상대는 남미 챔피언인가.’
지난번에 인터콘티넨털 컵 1차전에서 승부를 가리지 못했던 CA 페냐롤.
9월 4일에 2차전에서 그들과 맞붙는다.
‘그 경기는 놓치지 않겠어.’
세계 최강 클럽을 결정짓는 첫 번째 대회의 첫 번째 우승.
전설로 남고자 하는 준영에게 있어 절대 놓칠 수 없는 목표였다.
***
돈 레비 감독 지휘하에 있던 당시 리즈 유나이티드는 상당히 거친 플레이에 교묘한 반칙을 하는 팀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더티 리즈’였죠.
브라이언 클러프는 이런 팀 컬러를 가진 리즈를 무척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1974년에 리즈 감독이 되었을 때 전임인 돈 레비의 흔적을 지우려고 아주 강압적인 지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지도 방식은 리즈 선수들에게 큰 반발을 샀고, 결국 두 달도 안 되어 해임되고 말았지요.
그때 생긴 앙심으로 클러프는 틈만 나면 리즈와 돈 레비 감독을 깠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