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04. 합격과 새로운 시즌
1960년 8월.
준영은 독극물 과자 사건으로 소란했던 7월을 뒤로하고 다가오는 1960-61 시즌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한눈팔지 마! 시즌 개막이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어!”
“Yes, Sir!”
이번에 1군으로 올라온 신인들과 새로 영입된 선수들은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다들 어떻게든 뒤처지지 않기 위해, 주전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힘든 훈련에도 군소리 없이 임했다.
그러한 새내기들 중에 눈에 띄는 선수가 있었다.
“패스, 이쪽으로 공을 넘겨!”
170대 후반의 신장에 제법 다부진 체격을 가진 풀백 플레이어.
20대 후반의 나이만큼이나 선수 경력도 탄탄한 그는 기존의 주전 선수들 못지않은 기량을 자랑했다.
‘노엘 캔트웰이라…….’
준영은 자체 연습 경기에서 제법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이 아일랜드 출신의 선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휴식 시간 때 그에게 말을 건넸다.
“유나이티드에 와 보니 어때요?”
“역시 오길 잘했다 싶군. 시설도 훌륭하고 급료도 나쁘지 않고. 훈련 방식이 낯설긴 해도 그럭저럭 할 만해.”
노엘은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주장을 연방 신기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소문도 많이 들었고, 필드에서 맞부딪친 적도 있었다.
그땐 정말 괴물같이 느껴졌는데, 같은 편이 된 지금은 더없이 든든해 보였다.
“맘에 안 드는 건 이 이온 음료인지 뭔지 하는 거야. 도무지 이 맛도, 저 맛도 아니니…….”
“하하하, 마시다 보면 익숙해질 거예요.”
피식 웃음을 짓던 준영이 다시 말을 붙였다.
“웨스트햄에서 몇 년 동안 뛰었어요?”
“어디 보자, 1952년부터 있었으니까 8년 정도 되겠군.”
“혹시 바비 무어랑 아는 사이입니까?”
“무어? 알다마다. 말콤이랑 내가 그 녀석을 가르쳤는걸.”
예사롭지 않은 기량이다 했더니, 그 바비 무어를 가르친 베테랑 플레이어였을 줄이야.
‘웨스트햄과의 경기 때도 꽤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줬지. 전력 차가 심해서 패하긴 했지만 말이야.’
경험도 있고 실력도 뛰어나다.
더구나 풀백뿐만 아니라 최전방 스트라이커 포지션도 소화할 줄 알았다.
그렇기에 구단에서 큰맘 먹고 25,000파운드를 질러 영입한 게 아닌가.
지금까지 풀백 포지션에서 이 정도 이적료를 기록한 선수는 없었던 걸 생각하면, 그 기량은 충분히 인정받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무어 녀석이 항상 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던데……. 너도 무어에게 관심이 있는 거야?”
“당연하죠. 앞으로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수비수가 될 겁니다.”
“훗, 주장도 그렇게 보나? 나도 그리될 거라 생각해. 재능 하나는 정말 뛰어난 놈이니까.”
준영의 평가에 동의하며 바비 무어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노엘.
그는 문득 생각난 게 있었던지 화제를 바꿨다.
“아 참, 그 일은 어떻게 되었어? 그 과자에 독극물이 들어갔던 사건 말이야.”
“아, 그거요? 경찰에서 범인들을 잡긴 했지만, 주범은 외국으로 내뺐더라고요.”
“저런, 아쉽게 되었군.”
노엘의 반응과 달리, 준영은 그리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MI6측의 도움으로 현재 주범이 어디에 있는지, 놈이 어떤 조직에 몸담고 있는지 알게 되었으니까.
‘화이트 디펜스, 흑룡회와 마찬가지로 너희도 끝장내 주지.’
그를 위한 밑 작업은 이미 진행 중이다.
당수 오스왈드 모슬리를 비롯해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음해하려는 놈들을 싹 쓸어 줄 것이다.
***
훈련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준영.
그런데 평소와 달리 저택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창문은 전부 꼭꼭 닫혀서 커튼을 쳐 놓았고, 안팎을 오가며 분주하게 일하는 고용인들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왜 이리 조용하죠?”
“글쎄요. 딱히 위험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데 이상하군요.”
로베르트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저택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일단은 들어가 보자.’
그리 결정한 준영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타탕! 탕! 탕!
‘헉!’
총성에 가까운 폭음에 준영과 로베르트는 몸을 움츠렸다.
그와 동시에 색종이와 리본이 흩날렸다.
“축하해요!”
“드디어 해냈구만!”
알버트와 세 자매들, 그리고 저택 고용인들도 모두 모여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생일도 아닌데 갑자기 무슨 일일까?
어리둥절해하던 준영에게 리즈가 우편물을 하나 건넸다.
“어, 이건…….”
“합격 통지서예요.”
듣자마자 준영은 황급히 내용물을 살폈다.
거기엔 지난 6월에 쳤던 대입 시험의 결과가 나와 있었다.
비록 뒤에서 2등이긴 하지만, 합격 커트라인에 들어가는 데는 성공했다!
“하하핫! 합격! 진짜 합격이네!”
“다시 한번 합격 축하해요. 정말 수고 많… 어머!”
준영은 리즈를 덥석 안아 들고서 빙글빙글 돌았다.
“해냈다. 드디어 해냈어!”
우승했을 때만큼 기쁨이 벅차올랐던 준영은 주변 사람들이 보든 말든 리즈를 안고서 연방 키스를 퍼부었다.
“어흠, 그쯤 하도록 해. 이제 축하 파티를 즐겨야 하지 않겠나.”
“네, 그래야죠.”
발갛게 얼굴이 붉어진 리즈를 내려놓은 준영은 곧장 지인들에게 연락을 보냈다.
다들 저택을 찾아와서 준영을 축하해 주며 파티를 즐겼다.
“합격 축하해요, 주장.”
“오, 너희도 왔구나.”
레논을 필두로 비틀즈 멤버들이 반듯한 정장 차림을 하고서 나타났다.
그들을 반갑게 맞은 준영이 물음을 건넸다.
“레논이 전화를 안 받기에 어디 공연이라도 간 줄 알았어.”
“그 전에 연락을 받고 오던 중이었죠.”
폴 매카트니는 앤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축하 공연을 할 일이 있으니 꼭 와 달라고 하더라고요.”
“오, 비틀즈의 축하 공연이라. 그거 정말 영광인데.”
“바로 시작할게요.”
고용인들의 도움을 받아 바로 즉석에서 무대를 마련한 비틀즈는 합격을 축하하는 노래를 불렀다.
악기 없이 목소리로, 아카펠라풍으로 불렀는데 흠잡을 구석이 전혀 없었다.
젊은 세대들의 음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알버트도 듣고서 박수를 칠 정도였다.
“가창력이 정말 근사하구만.”
“괜히 잘나가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브라이언 앱스타인을 만난 이후, 비틀즈는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현재는 리버풀을 넘어 전국구 밴드로 유명세를 쌓는 중이었는데, 연말에 런던에서 대규모 콘서트 일정도 잡혀 있었다.
이 기세라면 역사대로 세계적인 밴드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Bravo!”
“정말 멋진 곡이었어!”
떠오르는 별들의 짧고 강렬한 공연이 끝나고, 다들 만찬을 들면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나저나 확실히 정장이 잘 어울리는구나. 앱스타인 씨가 그렇게 입고 다니라고 한 거야?”
“예,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해서요.”
레논은 좀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옷차림 정도는 참을 수 있는데, 음악까지 관여하는 건 좀……. 너무 대중적인 장르의 곡을 우선하더라고요.”
“일단 대중에게 많은 인기를 얻을 필요가 있으니까. 기반이 쌓인 다음에 너희의 노래를 본격적으로 만들어 가도 늦지 않아.”
“그래요?”
“피카소도 처음부터 입체파의 화풍을 그렸던 건 아니잖아. 조바심 낼 필요는 없어. 너희에겐 충분한 시간이 있으니까.”
준영의 말에 레논도 납득한 기색을 보였다.
그렇게 레논과 이야기가 끝나자, 이번에는 폴이 물음을 건네 왔다.
“캡틴, 대입 시험을 친 게 리즈 씨와의 사이를 인정받기 위함이라던데 맞아요?”
“그래. 어르신께서 일개 축구 선수에게 손녀를 못 준다고 하셔서 말이지.”
“어… 그럼 유명 뮤지션이라도 마찬가지인 건가요?”
곤란한 기색을 보이는 폴.
준영은 그가 무엇 때문에 묻는지 눈치를 챘다.
그건 알버트 역시 마찬가지였던 터라, 바로 못을 박아 버렸다.
“설사 모차르트라 하더라도 조건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야.”
“아… 그렇습니까.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야겠네요.”
난감해하긴 해도 포기할 생각은 없는 모양.
이런 폴의 모습에 앤지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두 사람 모두 열심히 노력해 봐. 나와 리즈도 많이 도와줄 테니까.’
도움을 주더라도, 준영은 굳이 알버트의 고집까지 만류할 생각은 없었다.
나만 당할 순 없다는 옹졸한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평한 기회 아래 노력해 나가며 얻은 결실이 앤지와 폴을 더욱 끈끈이 이어 줄 것이었기에.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ITV 스포츠입니다.」
8월 20일.
올드 트래퍼드에 입장하지 못한 사람들이 근처 카페나 펍의 TV 앞으로 몰려들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1960-61 시즌 개막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라디오 중계만 들어야 했지만, 이번 시즌부터는 TV로도 경기를 감상할 수 있었다.
「오늘 1라운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상대는 리즈 유나이티드입니다. 지난 시즌 운 좋게 강등을 피한 팀이죠.」
1959-60 시즌 21위로 강등이 유력했던 리즈 유나이티드.
하지만 가와부치 사부로의 도핑이 발각되면서 블랙번 로버스가 승점 삭감 징계를 받고 꼴찌가 되면서, 리즈 유나이티드는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너희들, 지난 시즌이랑 달라진 게 거의 없구나.”
“형네 팀도 마찬가지네.”
선수 대기실에서 만난 잭 찰튼과 바비 찰튼.
리즈와 맨유 양 팀의 핵심 멤버인 이 형제는 사이가 썩 좋은 편은 못 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부러움과 동정의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양 팀 모두 주전 멤버들이 그대로 남았지만, 상황은 딴판.
올 시즌도 우승을 노릴 수 있는 전력인 맨유와 달리, 리즈는 이번에도 강등을 걱정해야 했다.
“휴식기 동안 보강을 전혀 안 한 거야?”
“우리 팀, 돈이 없거든.”
잭 찰튼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즈 유나이티드는 연고지인 웨스트요크셔의 리즈시에서 성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팀 성적도 나쁜 데다, 원래 이 지역 사람들은 럭비를 더 좋아했기 때문.
이런 사정이다 보니 구단 운영비는 적었고, 오히려 막대한 부채까지 안고 있었다.
“보강은커녕 지난 시즌 성적 부진으로 감독이 해임되었는데, 새 감독을 구하지도 못했어.”
“그럼 감독 없이 훈련을 하고 있다는 거야?”
“뭐, 아예 없진 않고…….”
잭 찰튼은 준영과 마주 서 있는 고참 선수 돈 레비를 가리켰다.
그가 현재 선수 겸 감독으로 팀을 지휘하고 있었다.
‘거참, 그 지경인데도 잭 찰튼은 안 팔고 쥐고 있단 말이지? 리즈 구단 임원들도 대단하구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준영은 혀를 내둘렀다.
바비의 형인 잭 찰튼은 버스비 감독은 물론, 여러 팀에서 군침을 흘리는 특급 수비수였다.
하지만 리즈는 망해도 잭 찰튼만은 팔 생각이 없던지 모든 오퍼들을 거절하고 있었다.
‘그래도 돈 레비가 감독을 맡았으니 어떻게든 치고 올라가겠지.’
준영이 알기로 돈 레비는 리즈를 10년 넘게 지휘하며 리즈 시절로 이끈 명장.
다만 역사가 바뀐 상황에서도 그리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되겠지.’
클래스는 영원하다.
빌 섕클리의 이 말을 떠올린 준영은 상대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
실제 리즈는 1959-60 시즌 폭망하면서 강등이 되었고, 이 시절 재정도 몹시 궁핍했습니다.
돈 레비는 원래 팀을 떠나 본머스로 가려고 했고, 이때 리즈는 이적료 6,000파운드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본머스 역시 가난했습니다(…).
결국 돈 레비는 본의 아니게 말뚝을 박았고, 감독으로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며 리즈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