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02화 (302/400)

Round 302. 과감한 대처

뜻하지 않게 일본 마녀와 만났던 준영은 다음 날 맨체스터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피아코 국제공항으로 왔다.

비행기가 이륙 준비를 하는 사이, 그는 공항에 비치된 신문에서 반가운 기사를 보았다.

“역시 대통령이 되셨네.”

해외 소식이 올라온 지면에 짤막하게 한국의 뉴스가 실려 있었다.

4월 혁명 후, 새로 치러진 선거에서 대통령은 군인이자 외교관 출신인 Kim이, 그리고 부통령은 Chang이 당선되었다고 나왔다.

누구인지는 뻔히 알 수 있었기에 준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근데 실제 4.19 혁명 이후에 내각제로 바뀌었을 텐데……. 그렇게 되진 않았나 보군.’

이억관이 전해 주는 소식에 따르면 새로운 정부의 형태나 개헌을 두고 정치권에서 꽤 많은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내각제가 아닌 대통령제가 유지된 모양.

준영이 보기에도 딱히 나빠 보이지 않았다.

수습할 게 많은 한국의 현실에서 과감한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이 필요한 게 사실이니까.

“다만 앞으로 ‘불행한 군인’이 나오지 않게 막아야 하는데……. 오성 장군님은 박 씨를 어떻게 처리하려나?”

전 씨와 노 씨는 결국 육사 생도들의 혁명 지지 행진 건으로 군에서 퇴출되었다고 들었다.

이제 남은 군사 독재자 후보는 박 씨뿐.

준영은 지난번 한국을 떠나기 전에 그에 대해 경고를 하고 갔다.

의외였던 건 김홍일이 박 씨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 그 친구? 형이 좌익이고 본인도 분명히 남로당에 연루되어 숙군될 뻔했었지. 그 때문에 자유당 정권에서도 진급에 애먹었다고 하더군.’

김홍일은 이런 과거 행적 때문에 준영이 경고하는 거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리고 살펴보고 처리할 거라고 했는데, 아직 박 씨를 어찌했다는 얘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당장은 일을 저지르지 않았으니 내버려 두고 있는 건가? 하긴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처리하기도 힘들 테니…….’

제일 좋은 건 이대로 한국이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그럼 쿠데타의 명분도 없고, 박 씨 혼자 설쳐 봤자 다른 군인들은 이뭐병으로 여기며 잡아 가두리라.

‘거기다 오성 장군님은 많은 군인들에게 존경받고 있으니 감히 쿠데타를 생각하지 못하겠지.’

역사가 바뀐 김에 좋은 쪽으로 흘러가기를.

준영이 그리 바라고 있을 때, 그에게 공항 직원이 찾아왔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존 Y. 리 선수죠?”

“그렇습니다만.”

“맨체스터 트래퍼드 파크에서 전보가 왔습니다.”

누가 보냈나 했더니, 헨리 케일 상무였다.

‘심각한 문제 발생. 서둘러 연락 바란다고?’

도대체 자신이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터진 걸까.

준영은 곧장 공항에 있는 전화로 트래퍼드 파크에 있는 미스터리 푸드 공장에 연락했다.

“여보세요. 납니다. 존이에요.”

(오, 사장님. 안 그래도 연락해 주시길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게 런던에서…….)

케일 상무가 들려주는 상세한 설명에 준영은 깜짝 놀랐다.

“뭐라고요? 과자에 독극물이?”

(네, 피해자만 20명 넘게 나왔습니다.)

피해자들은 모두 빼빼Ro를 먹고 탈이 났다고 한다.

이미 언론에 보도되었고, 각 거래처마다 항의와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고.

혹시 다른 업체의 짝퉁을 먹고 사고가 난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렇지는 않다고.

미스터리 푸드 제품이 확실하다고 했다.

(대부분이 아이와 여성들인데 다들 중환자실에 있습니다. 심한 복통 증세를 보이는데, 일부는 사경을 헤맨다고 합니다.)

“빼빼Ro는 하청 생산이잖아요. 혹시 그쪽 공장에서 문제가 생긴 겁니까?”

(안 그래도 그쪽 업체에 가동을 멈추고 전수 조사를 하라고 지시해 놨습니다. 거래처에 유통과 판매도 중지시켰고요.)

“잘했습니다. 현재 시판된 제품 전부 환불 및 수거해서 전수 조사하십쇼. 아, 사람들에게 우리 빼빼Ro 먹지 말라는 경고 광고도 라디오와 TV, 신문에 올리고요.”

준영의 지시에 케일은 난감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러면 손실이 장난이 아닐 겁니다만…….)

“손실보다 신뢰를 잃으면 끝장입니다.”

그러니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구나 빼빼Ro는 미스터리 푸드의 간판 상품이자, 여왕도 곧잘 먹고 있는 간식이다.

잘못 처신하다간 정말 훅 갈 수 있다.

“혹시 모르니 다른 스낵류나 제품들도 살펴보고요.”

(알겠습니다.)

“아 참, 입원한 분들 치료비도 우리 쪽에서 지불하고, 보상도 충분히 하도록 해요. 도착하면 곧바로 갈 테니까 지시한 대로 처리해 주세요.”

통화를 마친 준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인지!

“마녀를 만나서 재수가 옴 붙은 건가? 피해자가 계속 나오면 안 되는데…….”

마음 같아서는 당장 맨체스터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할 수 없다 보니, 준영은 불안감에 속이 타들어 가는 것을 참아야 했다.

***

약 15시간 후.

맨체스터로 돌아온 준영은 가족들과 제대로 해후할 겨를도 없이 트래퍼드 파크로 향했다.

그리고 공장에 도착하기 무섭게 케일 상무에게서 보고를 들었다.

“공장 전수 조사를 펼쳤지만, 생산 과정에서 문제가 나타나진 않았습니다.”

애초부터 케일은 생산 과정의 문제는 아닐 거라고 보았다.

준영이 공장 직원들 복지만큼이나 위생 문제를 강조했고, 이에 대한 관리를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

거기다 먹는 걸로 장난치면 안 된다고 해서 식자재 관리 또한 항상 주의하고 있었다.

“그럼 유통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군요.”

“예, 런던 경찰에서 수사한 바에 따르면 피해자들이 먹은 제품의 포장 상자와 내부 포장 봉투에서 미세한 바늘구멍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경찰이 추정하기로, 누군가 주사기에 독극물을 담아 제품에 투입한 것 같다고 했다.

이에 회수한 모든 제품을 검사하며 훼손된 것들을 찾아 폐기할 예정이라고.

“맙소사, 도대체 어떤 놈이 그런 미친 짓을……!”

“누군지는 몰라도 우리 회사 평판을 떨어트리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다행히 범인이 의도한 만큼 평판이 떨어지진 않았다.

준영의 지시대로 손실을 각오하고 제품을 회수, 소비자에게 경고했기 때문.

아무리 외부 소행이라 해도 대처를 잘못하면 평판이 깎이기 마련인데 그런 최악의 상황은 모면한 것이다.

“아무튼 현재 유통 단계 어디서 독극물이 투입되었는지 조사 중입니다.”

케일의 말에 따르면 런던 외에 다른 지역에서도 피해 신고가 접수되었다고 한다.

이곳 맨체스터도 예외는 아니라, 여학생 3명이 입원해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여러 지역에서 이런 걸 보면 한 사람의 소행이라기보다 집단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렇겠죠. 우리 회사, 아니 날 공격할 만한 집단이라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일본 극우 조직의 잔당이거나 영국 국내의 인종 차별주의자들이거나.

이렇게 대강 용의자, 아니 용의 세력들의 윤곽이 그려졌지만, 현재 마땅한 증거는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그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그래도 반드시 찾아내 주지. 찾아서 몽땅 다 쓸어 주지.’

일단 준영은 당장 현재 일어난 일부터 수습을 끝내 놓기로 했다.

이번 일의 원흉을 색출해서 받은 것의 몇 배로 돌려주는 건 그다음에 처리할 일이었다.

***

오스왈드 모슬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회의실에 모인 화이트 디펜스 간부들도 심기 불편한 당수의 모습에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오스왈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번에 런던과 몇몇 지역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다들 알고 있겠지?”

“예, 그렇습니다, 총수님.”

“원숭이가 만든 과자를 좋아하던 철부지와 계집들이 된서리를 맞았지. 그래서 묻겠는데…….”

잠시 당원들을 쓸어 보던 오스왈드가 낮고 서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누가 한 건가? 누가 계획하고 실행한 거지?”

오스왈드는 이준영을 처리할, 놈의 명성을 시궁창으로 처박아 줄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독극물 과자 사건이 터졌다.

이에 런던 경찰 내부에 있는 동조자가 은밀히 화이트 디펜스와 관련된 사건인지 문의해 왔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오스왈드와 그의 측근들에게 있어 금시초문이었다.

이에 그는 화이트 디펜스 각 지역 간부들을 소집했다.

“임의로 이번 일을 계획, 시행한 인물이 있다면 자리에서 일어나게.”

오스왈드의 말에도 불구하고, 10여 명의 간부들은 좌우로 눈알만 굴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오스왈드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나에겐 이미 경찰 쪽의 동조자가 전달한 수사 정보가 있네. 입 닫고 있어도 소용없으니 얼른 자수하도록.”

그의 재촉에 마침내 한 사람이 일어났다.

두툼한 체격에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쓴 중년의 사내였다.

“오, 싱클레어, 자네였던가?”

싱클레어라는 이름의 이 사내는 부친에게서 물류 창고 관리 업체를 넘겨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오스왈드의 싸늘한 눈길에 진땀을 뻘뻘 흘렸다.

“총수님, 저는 그저 총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자…….”

“날 기쁘게 하고 싶었으면 좀 더 제대로 머리를 썼어야지! 왜 뻔히 들통날 일을 하나!”

독극물 과자 사건은 현재 미스터리 푸드를 음해할 목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언론에 보도되고 있었다.

오히려 대규모 손실을 감수한 과감한 대처로 언론과 대중의 호평을 받고 있었다.

전량 반품 및 전수 조사는 물론, 자신들의 제품이 잘못되었다고 경고 광고까지 하는 회사는 없었으니까.

“덕분에 그 원숭이 놈의 업체에 대한 신망만 올라가고 있어! 싱클레어 자네의 멍청한 행동이 그렇게 만든 거야!”

“며, 면목이 없습니다. 저는 분명히 잘될 거라 생각하고…….”

“확신했다면 당수인 나와 상의를 했어야지!”

오스왈드가 제일 분통이 터지는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상명하복도 제대로 되지 않는 이런 조직으로 과연 대영제국에 침투한 해충들을 일소한다는 대업을 이뤄 낼 수 있겠는가.

‘정말이지, 이런 어리바리한 놈이 간부라니!’

과거 독일의 나치나 이탈리아 검은 셔츠단과 같은 파시스트 조직에는 쓸 만한 재목들이 많았다.

정치적인 혼란과 경제난으로 인해 잉여가 된 인재들이 영입되었기 때문.

하지만 전후의 영국에서 그런 인재들은 화이트 디펜스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내심 인종 차별에 동조하는 이들도 선을 긋고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렇다 보니 조직 자체가 만족할 만큼 건실하지 못했다.

지난 총선에서 오스왈드가 낙선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싱클레어를 찍어 낼 수도 없고…….’

현재 조직은 저 어리바리한 녀석들이 주는 지원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렇기에 오스왈드는 싱클레어를 완전히 쳐 낼 수 없었다.

“꼬리를 밟히는 건 금방이야. 그러니 한동안은 미국이든 프랑스든 어디로든 몸을 피하도록 해.”

“아, 알겠습니다.”

면목 없다는 기색으로 고개를 떨구는 싱클레어를 보며 오스왈드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저 의욕 넘치는 바보 덕분에 한동안은 몸을 사리지 않으면 안 되겠군.’

그러나 오스왈드는 이준영을 처리할 계획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숨죽이고 있는 사이, 좀 더 주도면밀하게 진행해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준영이의 대처는 1982년 타이레놀 사보타주 사건 때 존슨앤드존슨 제약사의 조치를 참고한 겁니다.

당시 존슨앤드존슨 사는 큰 손실을 입었지만, 잘 대처해서 시장 점유율을 회복하고 이미지도 개선되었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