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00. 희망을 틔워 내리라
‘잘했어, 짐!’
준영은 발밑으로 들어온 패스를 잡지 않고 그대로 왼발로 때렸다.
급하게 차느라 제대로 파워가 실리지 않았지만, 논스톱 슈팅은 수비수나 골키퍼가 반응할 틈을 주지 않았다.
마이다나 골키퍼가 할 수 있는 것은 공이 들어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뿐이었다.
“동점 골이다!”
“하하핫! 역시 주장이야! 해낼 줄 알았다고!”
득점을 확인한 맨유 선수들은 준영을 얼싸안으며 기뻐했다.
7만여 명의 관중들은 얼이 빠진 채 이 광경을 우두커니 지켜보았고, 경기 내내 쉴 새 없이 혀를 놀리던 중계 캐스터도 순간적으로 침묵을 지켰다.
스코어 1 대 1.
경기를 다시 원점으로 되돌린 사나이는 박수를 치며 동료들을 독려했다.
“자자, 전열을 재정비해. 이젠 수비를 해야지!”
“Yes, Sir!”
남은 정규 시간은 3분 정도.
막판에 페냐롤의 잔칫상을 엎어 버린 맨유 선수들은 죄다 자기 진영으로 내려와서 수비에 전념했다.
그리고 알베르토를 위시한 페냐롤 선수들은 두껍게 구축된 맨유 수비진으로 뛰어들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
‘한 골! 한 골은 더 넣을 수 있을 거야!’
이대로 승리를 놓칠 수 없다!
벌겋게 눈을 치켜뜬 페냐롤 선수들은 남은 체력을 쥐어짜 내 총공세에 나섰다.
‘저놈은 아까 근육 경련이 나서 누웠던 놈이잖아. 아주 팔팔하구만.’
준영은 코웃음을 쳤지만, 페냐롤이 막판에 펼치는 공세까지 우습게 볼 순 없었다.
재빠르게 패스를 주고받으며 과감하게 돌파해 온 그들은 삽시간에 맨유 페널티 박스까지 들어왔다.
「중앙에서 쿠비야가 오베르그 쪽으로 패스. 오베르그, 그대로 슛! …수비수 맞고 나옵니다.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튕겨 나온 공을 살바도르가 잡아 냈다.
그는 박스 밖에서 과감하게 중거리 슛을 날렸지만, 앞서 육탄으로 저지했던 빌 포크스가 이번에도 몸을 날려 슈팅을 막아 냈다.
‘두 번 실수는 절대 하지 않아!’
앞서 페널티킥을 내줬던 것을 만회하고자 했던 빌은 누구보다 사력을 다했다.
그의 분전에 페냐롤의 연이은 슈팅들은 모두 무산되었다.
“침착해! 가까이 있는 동료들을 이용해서 공격하라고!”
알베르토의 외침을 들었는지, 공을 잡은 리나사가 재빠르게 박스로 뛰어드는 보르헤스 쪽으로 낮고 빠른 크로스를 보냈다.
하지만 보르헤스가 잡기 전에 던컨이 먼저 터치라인 밖으로 걷어 내 버렸다.
“아, 시계가 멎었어.”
“심판이 휘슬을 불지 않았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쿠비야가 코너킥을 준비하는 가운데, 페냐롤 선수들은 전원 맨유 페널티 박스 안으로 들어왔다.
수비수인 피노와 마르티네스뿐만 아니라 골키퍼 마이다나까지도!
그야말로 총공세, 맨유에겐 마지막 위기였다.
‘반드시 넣는다!’
‘반드시 막아 내야 해!’
양 팀의 상반된 결의가 필드에 흐르는 가운데, 쿠비야가 날린 코너킥이 날카롭게 날아왔다.
준영은 황급히 낙하지점으로 이동하려 했다.
하지만 마르티네스와 마이다나가 은근슬쩍 진로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 틈을 노리고 알베르토가 뛰어올랐다.
‘이런, 안 돼!’
빌 포크스가 경합했지만, 알베르토의 헤딩슛을 저지하지 못했다.
마법의 머리라는 별명에 걸맞게 알베르토는 골키퍼가 손쓸 수 없는 방향으로 공을 떨어트렸다.
‘들어갔…….’
득점을 확신하던 알베르토의 표정이 구겨졌다.
골키퍼가 막을 수 없는 공간이라고 본 곳에 던컨 에드워즈가 있었던 것이다.
던컨은 떨어지는 헤딩슛을 황급히 박스 밖으로 걷어 냈다.
그리고 그 공은 짐 박스터가 잡았다.
“막아! 막으라고!”
“젠장, 골대에 아무도 없는데!”
페냐롤 수비수들과 골키퍼 마이다나가 허둥지둥 자신들 진영으로 달려갔다.
그와 동시에 공을 가진 짐 박스터 쪽으로도 살바도르와 곤살베스, 아게레가 달려들었다.
침착하게 상대 선수들을 제쳐 낸 짐은 페냐롤 골대 쪽으로 공을 강하게 찼다.
중앙선 밖에서의 초장거리 슈팅.
텅 빈 골대 쪽으로 떨어지는 공을 바라보는 관중들은 낯빛을 하얗게 굳혔다.
‘저, 저거 설마……?’
뚝 떨어진 공은 골대 옆으로 흘러 나갔다.
하마터면 심장이 멎을 뻔했던 관중들은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안도한 건 골키퍼 루이스 마이다나.
홈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마음에 공격에 가담했었는데, 하마터면 패배의 원흉이 될 뻔했다.
삐빅- 삑!
마침내 프라다우데 심판이 휘슬을 길게 불며 경기를 종료시켰다.
긴장이 풀린 양 팀 선수들이 그 자리에 주저앉거나 드러누웠다.
“아, 결국 무승부로 끝났나.”
“마지막엔 진짜 아찔했어.”
안도와 아쉬움을 교차하던 양 팀 선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2차전에서 보자고.”
“Chau, hasta la vist.”
9월 맨체스터에서 다시 만나자.
알베르토와 유니폼을 교환한 준영은 다음을 기약하며 필드에서 내려왔다.
***
“달려! 앞으로 나가!”
“Get back! Defence!”
영국 노스웨스트 머지사이드주의 프렌턴 파크.
최정민을 필두로 한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은 트랜미어 로버스와 연습 경기를 하고 있었다.
올림픽 전까지 되도록 많은 경기 경험을 쌓고자 했던 한국 대표팀은 준영의 인맥으로 여러 팀과 연습 경기를 잡았다.
지금 경기를 하는 트랜미어 로버스도 그런 팀들 중의 하나였다.
트랜미어 로버스는 작년부터 나2키로부터 축구 용품을 협찬받으며, 경기장 A보드를 설치해서 광고까지 해 주고 있었다.
즉, 한국 대표팀과 같은 킷 스폰서를 두고 있는 것.
물론 그런 관계와 상관없이 경기는 꽤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연습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야 감독에게 눈도장을 받을 수 있으므로.
“정민 선배, 여기요, 여기!”
트랜미어의 오른쪽 측면으로 파고든 조윤옥이 손을 흔들었다.
중앙에서 공을 몰고 가던 최정민은 조윤옥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패스를 건네주었다.
그 공을 받은 조윤옥은 재빠르게 수비수를 따돌리고, 상대 박스로 진입했다.
그리고 달려 나오는 골키퍼를 보며 가볍게 칩슛.
공이 트랜미어의 골대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한국 선수들은 일제히 쾌재를 불렀다.
“잘했다, 윤옥아!”
“덕분에 2 대 2야!”
조윤옥의 활약에 최정민이 제일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선수 생활이 2~3년밖에 남지 않는 상황에서 대표팀에 자신의 뒤를 이을 공격수가 나타난 게 반가웠으므로.
‘아직 다듬을 부분도 있지만, 유럽에서 계속 뛰다 보면 고쳐지겠지.’
아시아의 황금발이라 불린 자신을 능가해 주기를.
그런 바람을 품고, 최정민은 오늘 경기도 마지막까지 힘차게 뛰었다.
“아, 결국 무승부인가?”
“3부 리그 팀도 못 이겨서는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힘든데…….”
“수비를 좀 더 신경 써야 해. 준영 아우가 말한 대로 수비수들뿐만 아니라 하프백, 아니 공격수들부터 상대를 적극적으로 견제해 줘야 한다고.”
경기를 끝내고 돌아오는 와중에 선수들은 오늘 경기에서 고칠 점과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부분들에 대해 논평했다.
위혜덕 감독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지도자가 지적해서 알려 주기보다, 선수들이 스스로 깨달아 개선해 나가는 것이 성장에 더 바람직했으니까.
“근데 윤옥이 너 올림픽 나갈 수 있는 거 맞지?”
최정민의 물음에 조윤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속 팀이랑 아마추어 계약을 했으니까요.”
“설마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될 걸 예상하고?”
“아뇨. 그건 아니고요. 아버지가 공부도 병행하라고 하셔서요. 기왕에 영국 갔으니 현지 대학에 입학해 보라고…….”
“하하핫, 그래, 공부도 열심히 해야지.”
더 클리프로 돌아온 한국 대표팀은 훈련장을 관리하는 맨유 직원에게서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준영 형님이 골을 넣었다고요?”
윤옥의 물음에 직원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예, 캡틴 리가 경기 종료가 다 되어 가던 시점에 골을 넣어서 패배를 모면했죠.”
“와, 잘됐네요!”
비록 이기지 못했더라도 원정에서 무승부면 우승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거나 마찬가지.
이를 견인한 게 한국 선수라니 절로 어깨가 으쓱해졌다.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감탄만 할 게 아니라 우리도 잘해야지. 준영 아우만 혼자서 애쓰게 할 게 아니라 말이야.”
최정민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극동의 가난하고 약소한 반도 국가.
하지만 세계를 상대로도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는 역량이 있음을 보여 줘야 한다.
세계인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절망을 박차고 일어서고 있는 동포들에게도.
과거의 손기정이 그랬고, 현재의 이준영이 해낸 것처럼 대한민국 축구 대표 선수들도 희망을 틔워 내리라 다짐했다.
모두가 희망을 안고 일어나 대한민국이란 이름에 걸맞은 나라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
인터콘티넨털 컵 1차전을 마친 맨유 선수단은 왔을 때와 같은 경로로 귀환을 했다.
그나마 올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잠시 머물며 휴양을 했다는 것.
그러나 그 휴양은 생각했던 것처럼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았다.
“카리브라면 푸른 하늘에 뜨거운 햇살을 만끽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하필 지금이 우기일 게 뭐람.”
호텔의 클럽에서 칵테일을 홀짝이는 선수들은 창밖에 쏟아지는 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우루과이로 가던 중에는 몰랐는데, 카리브 지역은 보통 5월에서 11월까지 비가 곧잘 오고, 날씨도 후덥지근했다.
당연히 이 시즌에는 관광객도 거의 전무.
그렇다 보니 이렇게 비가 쏟아질 때는 술을 마시며 밴드가 연주하는 스카풍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것 말고 딱히 할 게 없었다.
“퍼기야, 무비 카메라는 뭐 하러 찍냐?”
“주장이 원정 기록을 남기라던데요?”
준영은 유러피언 컵같이 큰 대회에 출전할 때 항상 사진과 영상 기록을 남겨 두었다.
굳이 경기나 훈련 때가 아니라 이렇게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도.
전부 후대에 소중한 자료가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말 후대에 중요한 자료가 될까?”
클러프의 물음에 준영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배들에게 좋은 참고 자료가 되지 않겠어? 7월에 카리브에 들르지 말라는.”
“과연……. 근데 우리만 당하면 억울하지 않아?”
클러프의 반문에 다들 음흉한 미소로 동의했다.
나만 당할 수 없지.
이렇게 생각한 선수들은 무비 카메라가 자신을 비출 때마다 최대한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7월의 카리브는 최고야!”
“다들 이때를 놓치지 말라고!”
준영 역시 이 짓궂은 장난에 동참했다.
그때 한쪽에서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여성이 클럽 종업원에게 뭔가 상세하게 물어보다 준영에게 칵테일 한 잔을 보냈다.
“뭐죠, 이건?”
“저쪽의 숙녀분이 보내셨습니다.”
준영은 종업원이 가리키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길게 머리를 풀어 헤친 커다란 눈망울의 여인을 볼 수 있었다.
‘동양인?’
준영은 신기했다.
카리브 끝자락의 섬에서 동양인 여성을 볼 거라곤 생각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얼굴 같은데?’
의아해하는 사이, 문제의 동양인 여성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
아무리 상황이 급해도 골키퍼가 함부로 골대를 비우면 안 된다는 걸 잘 알려 준 상황이지요.
보통 골키퍼가 막판에 공격에 참여할 때는 코너킥이나 프리킥 등 세트 플레이 상황인 경우가 많은데, 저 경기에서 노이어는 마치 필드 플레이어처럼 뛰었지요.
예전에 본인이 인터뷰하면서 우스갯소리로 미드필더를 하고 싶었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결국 그 소망(?)이 인생 최대의 흑역사를 쓰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