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99. 승부사
경기는 굉장히 빠르게 전개되었다.
페냐롤과 맨유 양 팀 모두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섰기 때문.
롱 패스를 하든, 짧게 패스를 주고받으며 전진해 나가든.
수비에서 공을 탈취하면 재빠르게 공격에 임하는 건 양 팀 모두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찬스도 여러 차례 있었고, 슈팅도 많이 나왔다.
하지만 양 팀 다 득점에는 실패했다.
페냐롤은 이준영이라는 벽을 넘지 못했고, 클러프가 골대를 맞힌 맨유도 득점 기회 때마다 상대 수비의 마크와 골키퍼의 선방에 막혔기 때문이다.
결국 전반전은 0 대 0으로 종료.
하프타임에 라커룸으로 돌아갔던 양 팀은 후반전에는 승부를 내기 위해 전술에 변화를 주었다.
“페냐롤은 알베르토를 측면으로 보냈군.”
“알베르토는 윙어로서의 능력도 뛰어나니까.”
“유나이티드도 포메이션에 변화가 있는 것 같군.”
4-2-4였던 맨유의 포메이션은 중원을 보다 강화한 3-5-2로 바뀌었다.
버스비 감독이나 머피 코치는 미드필드부터 확실히 장악해야 페냐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쪽의 공격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을 터.
이에 알렉스와 데니스 로가 2선으로 내려오고, 수비에서는 레이 윌슨과 던컨이 번갈아서 전진해 공격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를 조율하는 역할은 준영이 맡았다.
“짐, 감독님도 말씀하셨지만, 후반전 공격은 네 발끝에 달렸어.”
“예, 주장. 맡겨 주세요.”
준영은 후반전에 짐 박스터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었다.
섬세하고 기술적으로 뛰어난 짐의 발재간이면 점차 선수들의 체력이 떨어지는 후반전에 빛을 발할 것이라 보았기에.
다만 약간 우려되는 점이 있었다.
‘체력적으론 우리가 강하다고 보지만, 장거리 원정에 제대로 훈련하지 못했으니…….’
거기다 비시즌이었던 점도 문제.
최근까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대회를 치렀던 페냐롤과 달리 5월 중순에 유러피언 컵까지 끝낸 맨유는 경기 감각이 다소 떨어진 상태였다.
물론 우루과이에 오기 전에 몇 번의 연습 경기를 했지만, 실전에서 쌓은 감각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곤란한 점들이 있어도 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돼. 결국 남는 건 결과니까.’
후반전 45분에 승부를 본다!
준영이 그리 다짐을 굳히고 있을 때, 후반전 시작 휘슬이 울렸다.
「후반전 경기 시작했습니다. 알베르토가 공을 잡고 유나이티드 좌측면으로 잽싸게 파고들어 갑니다.」
시작하고 5분, 끝나기 전 5분.
선수들의 집중력이 느슨한 시간대였다.
알베르토는 이 틈을 노려 유나이티드 진영을 과감하게 돌파해 들어갔다.
레이 윌슨이 앞을 막아서자, 그는 무리한 돌파를 하는 대신 살바도르와의 패스 플레이로 간단하게 마크를 뿌리쳤다.
‘반대편이 비었다!’
박스 근처까지 온 알베르토는 우측면에서 동료 보르헤스가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골을 넣기에 보르헤스 쪽이 더 유리해 보였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알베르토는 이준영이나 맨유 수비수들이 이미 자신과 보르헤스의 움직임을 읽고 있음을 간파했다.
‘이놈들, 분명히 순간적으로 오프사이드를 만들어 낼 거야.’
전반에도 그 때문에 쿠비야가 자신에게 패스를 못하고 직접 돌파를 선택했다.
이에 알베르토는 직접 과감하게 슈팅을 날렸다.
「알베르토의 강력한 왼발 슛! 유나이티드 골키퍼가 황급히 쳐 냅니다.」
알베르토의 슈팅 동작이 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슛이 꽤 강하게 날아왔다.
이 때문에 해리 그렉은 잡지 못하고 펀칭으로 처리해야 했다.
그런데 공은 그리 멀리 가지 못했고, 바비 찰튼과의 경합에서 이겨 낸 카를로스 리나사가 공을 따내고 그대로 슈팅을 날렸다.
‘저건……?’
준영이 흠칫하는 사이, 빌 포크스의 다리 사이로 빠진 리나사의 슛은 그대로 구석에 꽂혔다.
「Goal! Goal! Goal……! 리나사, 선제골! 유럽 챔피언의 성벽이 마침내 무너졌습니다!」
“우와아아아아~”
타타탕! 탕! 탕!
흥분한 관중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는 가운데, 경기장 여기저기서 요란한 폭음이 울렸다.
“뭐, 뭐야?”
“폭죽을 터트렸나 봐.”
폭죽 소리가 마치 총성과도 같았기 때문에 준영과 맨유 선수들은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움츠렸다.
그런데 페냐롤 홈팬들의 기쁨은 금세 사그라지고 말았다.
심판과 선심이 방금 전 골을 무효로 판정했기 때문.
“그러면 그렇지. 핸드볼을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준영은 아까 리나사가 바비와 경합하던 상황을 똑똑히 보았다.
바비를 밀치고 나온 리나사는 서둘러 리바운드 볼을 따내려다 그만 왼쪽 팔에 공이 닿았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반칙이 아니라 넘어갈 수 없었다.
물론 홈 어드밴티지를 기대했던 페냐롤 팬들은 울분을 토했다.
“우우우- 우우-”
“빌어먹을, 그 정도는 눈감아 줘도 되잖아!”
“우리가 너희 나라 팀 탈락시켰다고 보복하는 거지?”
오늘 심판을 맡은 호세 루이스 프라다우데는 아르헨티나 출신이었다.
그렇다 보니 관중들은 그가 산 로렌조를 탈락시킨 앙갚음을 하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심판은 관중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합을 계속 진행해 나갔다.
***
핸드볼 판정을 받긴 했지만, 맨유에게는 참으로 아찔한 상황이었다.
준영은 부지런히 다그치며 서둘러 전열을 정비해 나갔다.
그러자 포메이션 변경으로 다소 불안했던 수비는 빠르게 개선되었다.
「아쉽게 무산되고 말았지만, 페냐롤 선수들은 굴하지 않고 계속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진짜 골을 금방이라도 만들어 줄 것 같군요.」
캐스터의 기대와 달리 필드에 있는 페냐롤 선수들은 맨유의 두꺼운 미드필드에 막혀 고전하고 있었다.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도, 상대 미드필드의 견제와 마크를 뿌리치고 전진해 나가기 위함이었다.
‘제길, 만만찮구만.’
‘어딜 가더라도 2~3명이 동시에 달려드니…….’
짧은 패스는 잘리기 일쑤고, 돌파는 저지당했다.
최전방 공격수들을 노려 길게 패스를 보내면 이 역시 헤딩으로 커트당하거나, 수비수에게 공을 빼앗겼다.
특히 페냐롤 선수들을 괴롭게 만드는 건 바비 찰튼.
이미 전반에서도 왕성한 활동량을 보여 준 그는 후반에서도 지친 기색 없이 부지런히 중원을 누비고 다녔다.
여기에 질세라 던컨 에드워즈와 레이 윌슨, 그리고 준영도 번갈아 전진하며 중원 경쟁에 힘을 보탰다.
발재간이 좋은 짐 박스터는 이렇게 동료들이 따낸 공을 건네받아 전방의 클러프나 데니스 바이올렛에게 좋은 찬스를 만들어 주었다.
「살바도르가 태클, 하지만 짐 박스터가 뛰어넘어 전진합니다. 그리고 클러프에게 패스, 클러프가 다시 바이올렛에게 건네줍니다. 아, 위험합니다……!」
클러프의 논스톱 패스를 바이올렛이 발리킥으로 때렸다.
다행히 마이다나 골키퍼가 몸을 날리며 잡아챘지만, 페냐롤 홈팬들은 심장이 쫄깃해지는 기분을 맛봐야 했다.
“제대로 막으라고! 저 허수아비 같은 녀석이 계속 패스를 찔러 주고 있잖아!”
“공격하는 건 좋지만, 실점하면 허사란 말이야!”
관중들은 성화를 부리고, 경기는 잘 풀리지 않고.
거기다 무정하게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벌써 후반 25분…….”
“맙소사, 언제 시간이 이렇게 지난 거야?”
멀리 유럽에서 온 팀을 상대로 홈경기가 무승부로 끝나면 그건 패배나 마찬가지.
애타게 선제골을 기대하고 있는 홈팬들이 과연 그 결과를 수긍하겠는가.
‘침착하자. 서두르면 코앞에 있는 것도 보이지 않으니!’
알베르토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지쳐 가는 몸에서 남은 체력을 끌어냈다.
그는 중원으로 내려와 공격 활로를 뚫는 데 힘을 보탰다.
그렇게 부지런하게 움직인 덕분에 소득이 있었다.
맨유 미드필더들이 주시하는 틈을 타서 알베르토가 기막힌 힐 패스를 건넸고, 보르헤스가 이것을 받아 재빨리 맨유 페널티 박스로 돌진해 왔다.
“빌! 덤비지 말고 지연시켜요!”
준영의 외침에 빌 포크스는 침착하게 보르헤스를 따라붙었다.
그러다 보르헤스의 뒤로 쇄도해 들어오는 알베르토를 보았다.
‘패스?’
보르헤스가 알베르토 쪽으로 패스를 보낼 것처럼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그것은 페이크.
재빠르게 동작을 전환한 보르헤스가 박스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빌은 황급히 저지하기 위해 발을 뻗었다.
하지만 공을 걷어 내기 전에 보르헤스가 먼저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삐빅-!
“페널티킥이다!”
“그래, 이래야지!”
관중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준영과 맨유 선수들은 자책하는 빌을 달랬다.
막지 못한 건 빌의 책임만이 아니었으니까.
「키커로 알베르토가 나섭니다. 과연 이 절호의 찬스를 살릴 수 있을지?」
승부사 알베르토 스펜서는 페냐롤 팬들의 기대를 어기지 않았다.
그는 스웨덴 월드컵 올스타로 선정된 해리 그렉 골키퍼를 완전히 속여 넘기며 골 그물을 흔들었다.
후반 33분, 경기의 균형이 페냐롤 쪽으로 기울어졌다.
***
1 대 0.
가뭄 끝의 단비와 같은 선제골을 만들어 낸 페냐롤은 이후 수비에 치중하면서 시간을 적절히 지연해 나갔다.
위험 지역이 아닌 곳에선 거친 파울도 서슴지 않았다.
“큭, 저 자식들이……!”
“참아. 달려들면 우리가 손해야.”
준영은 파울을 당한 알렉스를 달래며 시간을 보았다.
정규 시간이 10분도 남지 않은 상황.
시간도 부족하고, 공격도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맨유 선수들은 답답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명심해. 우리도 똑같이 대응하게 되면 저놈들 누워서 일어나지 않을 거야.”
“우리가 대응하지 않더라도 눕는데요?”
알렉스의 말대로 페냐롤 선수 한 명이 쓰러졌다.
근육이 올라온 모양인지, 아니면 꾀병인 건지.
아무튼 다리를 잡고 누워 버리는 바람에 심판은 경기를 잠시 중단시켰다.
‘망할, 남미산 침대로구만…….’
안티 축구의 대명사 침대 축구.
팀원들에게 참으라고 하던 준영도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시간도 없는데 저런 식으로 계속 지연하다 보면 흐름이 뚝뚝 끊겨 버린다.
‘본격적으로 눕기 전에 골을 만들어 내야 한다!’
마침 머피 코치도 공격하라고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이에 준영은 지시하는 대로 최전방으로 올라왔다.
“키다리 치노가 올라왔다!”
“조심해. 저 녀석, 헤딩을 무척 잘한다고.”
이미 전반전의 세트 플레이 찬스에서 준영은 위협적인 헤딩슛을 보여 준 바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 골로 연결되지 못했다.
수비 상황에서 준영의 마크맨으로 나선 알베르토가 적절히 견제를 잘 해냈기 때문.
그렇다 보니 준영이 공격진에 가세하자, 알베르토 역시 내려와서 수비에 가담했다.
‘수비수들이 주장의 움직임에 신경 쓰고 있군.’
바비 찰튼에게서 공을 건네받은 짐 박스터는 침착하게 상대 진영을 살폈다.
우리 공격수들은 어디로 노리고 들어가는지, 상대 수비수들은 어떻게 대응하는지.
‘일단 여기서는 치고 들어가 보자!’
거칠게 밀어붙이는 쿠비야의 마크를 뿌리치고 전진해 들어간 짐은 상대 페널티 박스 중앙으로 들어가는 준영에게로 패스를 보냈다.
‘역시, 치노 쪽으로 공을 보내는군.’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마르티네스는 곧장 앞으로 나가 패스를 끊어 내려 했다.
하지만 공은 그의 발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짐 박스터의 패스가 지면을 굴러가는 것이 아닌, 살짝 떠서 들어오는 패스였기 때문.
적절히 떠서 날아온 패스는 골대 쪽으로 돌아서는 준영의 앞으로 정확히 떨어졌다.
***
침대 축구의 원조는 영국입니다. 풋볼 리그 초기부터 약팀이 시간을 지연하기 위해 부상을 핑계로 드러눕곤 했습니다.
물론 경기를 루즈하게 만드는 행위에 대해서 축구 팬들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마초적인 당대 축구 문화에서도 비겁하다고 여겨졌기에 배척되었죠.
하지만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비슷했던 터라, 침대 축구는 남미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자연스럽게 발생합니다.
중동이 유독 심하다 지적되는 까닭은 사우디나 이란 정도를 제외하면 상대 팀과 난타전을 벌일 전력을 갖춘 팀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우디나 이란도 상대가 만만찮다 싶으면 잘 눕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