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98화 (298/400)

Round 298. 마법의 머리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

우루과이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건설된 이 경기장은 제1회 월드컵이 치러진 뜻깊은 장소였다.

이곳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팀은 클루프 아틀레티코 페냐롤.

오늘 그들은 세계 최강의 클럽팀 자리를 두고 유럽 챔피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맞붙게 되었다.

“Viva, Manyas(* CA 페냐롤의 별명)!”

“Nosotros Ganamos!”

축구 역사의 한 장면을 놓치지 않기 위해 6만의 좌석 수를 훨씬 넘긴 71,872명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준영과 맨유 선수들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이 정도 압박감이야 스페인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나 캄프 누에서도 느껴 봤으니까.

사실 홈 관중들의 압박보다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이 잔디는 영 적응이 안 되는걸.”

“푹신한 유럽 잔디하곤 확실히 다르지. 몇 번이고 말했지만, 공이 덜 튀고 잘 나가지 않으니 항상 주의하라고.”

준영은 던컨과 팀원들에게 거듭 당부를 했다.

지난 며칠 동안 훈련했지만, 남미식의 긴 잔디는 여전히 낯설기만 했다.

그건 21세기에서 온 준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환경도 경기의 한 부분이니까 극복하지 않으면 안 돼.’

경기 시작을 앞두고 맨유와 페냐롤 양 팀 선수들이 선전을 다짐하는 사이, 기자들은 오늘 출전한 양 팀 선수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GK:루이스 마이다나

DF:산티아고 피노, 윌리엄 마르티네스(주장), 네스토르 곤살베스, 왈테르 아게레

MF:살바도르, 루이스 쿠비야, 카를로스 리나사

FW:후안 오베르그, 알베르토 스펜서, 카를로스 보르헤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GK:해리 그렉

DF:던컨 에드워즈, 이준영(주장), 빌 포크스, 레이 윌슨

MF:짐 박스터, 바비 찰튼

FW:알렉스 퍼거슨, 브라이언 클러프, 데니스 바이올렛, 데니스 로

“유나이티드는 주장인 5번이 눈에 확 띄는군.”

“저 치노가 바로 존 Y. 리야.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때려눕힌 괴물이라고.”

“그래도 우리 알베르토에겐 안 될걸?”

팀을 남미 챔피언으로 견인한 알베르토 스펜서.

우루과이 기자들은 그가 가진 마법의 머리라면 영국인들의 골대를 활짝 열어 버릴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거기다 후안 오베르그와 카를로스 보르헤스 역시 월드컵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던 베테랑 공격수들이다.

‘첫 월드컵에서 우승했던 것처럼, 세계 클럽 왕중왕전에서도 첫 우승을 일궈 낼 수 있을지도?’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영국인들. 페냐롤은 강하다고!’

경기장에 모인 우루과이 국민들이 기대감을 부풀리고 있을 때, 마침내 경기 시작을 알리는 심판의 휘슬이 울렸다.

***

“Viva! Viva Manyas!”

“Corre, Alberto! Corre!”

홈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을 등에 업은 페냐롤.

검고 노란 줄무늬 유니폼을 걸친 그들은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그리고 꽤 거칠게 나왔다.

태클로 공을 가로챈 쿠비야는 브라질 용병인 살바도르와 아르헨티나 출신인 카를로스와 패스를 주고받으며 맨유 진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날카롭게 맨유 수비진 사이로 파고드는 알베르토를 향해 빠른 크로스를 올려 주었다.

하지만 알베르토가 머리를 대기 전에 준영이 먼저 헤딩으로 끊어 냈다.

“역시, 존이랑 공중전을 치르려면 밋밋한 플레이로는 안 되지.”

막아 낼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던컨은 전진하며 준영이 커트한 공을 확보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우측면에 있는 작은 데니스, 데니스 로에게 길게 패스를 찔러 넣었다.

“나이스 패스!”

곧장 돌아선 데니스 로는 골문을 향하여 돌진해 들어갔다.

CA 페냐롤의 수비수는 단둘뿐.

수비보다 하프백 포지션에 익숙했던 곤살베스와 아게레는 공격 지원을 위해 전진해 나간 터라 피노와 마르티네스가 맨유의 역공에 맞서야 했다.

마르티네스는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데니스 로의 돌파를 지연시키며 슈팅 각도를 좁혔다.

‘쳇, 괜히 주장을 맡은 게 아니라는 건가.’

슈팅 찬스를 놓친 데니스는 중앙으로 쇄도하는 큰 데니스, 데니스 바이올렛을 노리고 패스를 찔러 넣었다.

하지만 그 패스는 수비에 가담한 곤살베스에게 끊겼고, 공은 다시 페냐롤에게로 넘어갔다.

「페냐롤이 짧은 패스를 주고받으며 다시 전진해 갑니다. 오베르그에게 가는 패스가 바비 찰튼의 태클에 차단, 하지만 살바도르가 달려가 다시 공을 확보해 냅니다.」

마이크를 잡고 열심히 중계 중이던 캐스터는 얼른 페냐롤이 선제골을 터트려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 기대감을 품은 건 열심히 응원하는 관중들도 마찬가지.

오늘 하루는 무능한 정부에 대한 투쟁을 멈추고 경기장으로, 그리고 라디오 앞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초조하게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알베르토가 공을 잡았다!”

“치노를 제쳐 버려, 알베르토!”

중앙에서 알베르토가 패스를 받자, 관중들이 일제히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공격을 외쳐 댔다.

이에 과감하게 치고 들어간 알베르토.

하지만 준영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제법 현란한 발재간에도 속아 넘어가지 않고 침착하게 어깨로 밀어붙이며 슈팅 찬스를 무산시켰다.

하지만 생각보다 공을 쉽게 빼앗아 올 수는 없었다.

‘이 자식, 몸싸움 제법 할 줄 아는데?’

‘과연, 이게 디 스테파노도 고전했던 동양의 거인인가.’

준영도, 알베르토도 서로의 실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슈팅 찬스를 놓쳤지만, 이대로 공을 빼앗길 순 없었던 알베르토는 힐킥으로 후방에서 달려온 리나사에게 공을 건넸다.

하지만 리나사의 발에 공이 닿기 전에 잽싸게 튀어 나간 빌 포크스가 차단해 내며 짐 박스터 쪽으로 패스를 보냈다.

「유나이티드가 다시 반격합니다. 바비 찰튼이 짐 박스터에게 패스를 받아 다시 측면의 알렉스에게… 알렉스가 과감하게 좌측면을 내달립니다.」

산티아고 피노가 재빨리 마크에 나섰지만, 알렉스는 그 전에 크로스를 보냈다.

황급히 수비에 가담한 곤살베스가 그 크로스를 끊어 내려 했지만, 브라이언 클러프가 달려드는 게 더 빨랐다.

텅-!

클러프의 헤딩슛이 골대를 맞힌 순간, 경기장은 정적에 잠겼다.

그러다 황급히 마르티네스가 공을 멀리 걷어 낸 것을 보고 다들 가슴을 쓸어내렸다.

“와, 큰일 날 뻔했네.”

“유럽 챔피언이라더니만, 확실히 만만찮구만.”

선제골은 페냐롤이 아니라 맨유 쪽에서 터트릴 수도 있겠다.

방금 전 벌어진 아찔한 상황은 이런 위기감을 관중들 전체에게 퍼트리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다들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이 생각한 것과 다르게, 페냐롤이 쉽게 이길 수 있는 경기가 아니라는 것을.

***

전반 초반의 위기를 넘긴 페냐롤은 이후 양쪽 측면 수비를 신경 쓰기 시작했다.

맨유가 공격할 때 측면을 잘 활용하고 있었기 때문.

거기다 틈만 나면 던컨과 레이 윌슨이 전진해서 공격에 힘을 실어 주곤 했다.

이에 페냐롤은 중앙 수비는 곤살베스와 아게레에게, 그리고 피노와 마르티네스는 좌우 측면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살바도르와 리나사도 후방으로 내려와 수비에 무게를 더했다.

“이거 너무 내려앉고 있는 거 아냐?”

볼 점유율과 공격 시도가 점차 줄어들자, 기자와 관중들 사이에선 불만과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상대가 만만찮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움츠러든다고 될 일도 아니었으니까.

“기다려 보라고. 알베르토가 한 건 해낼 테니까.”

“그래, 알베르토라면…….”

알베르토가 몇 차례 동양의 거인에게 막히는 걸 보았지만, 페냐롤 팬들은 기대감을 접지 않았다.

그들이 아는 알베르토는 승부사였으니까.

중요한 순간에 골을 터트리고, 자신이 득점하지 못하더라도 동료에게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영민함을 가진 선수였다.

그러니 저 괴물 역시 뚫어 버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피노가 공을 가로채서 쿠비야에게 패스합니다. 직접 치고 들어가는 쿠비야, 전방에서는 알베르토가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캐스터나 관중들의 기대와 달리 쿠비야는 쉽사리 알베르토에게 패스를 보내지 못했다.

알베르토의 위치가 오프사이드였기 때문.

알베르토 본인도 그 점을 인식하고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준영과 맨유 수비수들은 절묘하게 라인을 조정하며 오프사이드 트랩을 깔고 있었다.

‘제길, 이래서는 패스를 할 수 없잖아.’

할 수 없이 쿠비야는 직접 돌파해 들어가기로 했다.

그럼 맨유 수비 라인이 흐트러질 테고, 알베르토에게 패스할 기회도 생길 테니까.

「쿠비야, 유나이티드 진영으로 치고 들어갑니다. 쿠비야! 페널티 아크 앞에 와서 슛! …하는 척 한 명 따돌리고 박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빌 포크스를 제치고 맨유 페널티 박스로 성큼 들어선 쿠비야.

반대편에서는 알베르토가 번쩍 손을 들었다.

하지만 이 위치에서는 패스를 보내기보다 자신이 처리하는 게 옳다고 판단한 쿠비야는 과감하게 슛을 날렸다.

퉁-!

빌 포크스의 몸에 맞은 슈팅이 굴절되어 날아왔다.

그 슈팅은 골키퍼 해리 그렉이 황급히 뻗은 손에 맞고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찬스다!’

기회만 엿보고 있던 알베르토가 리바운드 볼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마법의 머리’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는 떨어지는 공을 정확히 맞히는 데 성공했다.

「알베르토, 헤딩슛- 고올… 아,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깝습니다!」

고개를 길게 뺐던 관중들은 알베르토의 헤딩슛이 황급히 몸을 날린 준영의 머리를 맞고 튕겨 나가자 탄식을 터트렸다.

급하게 달려드느라 공 대신 골대에 들어가 버린 준영.

툭툭 털고 일어난 그를 향해 야유와 욕설이 쏟아졌다.

“Hijo de perro!”

“Vete! Vete a la mierda!”

절호의 기회를 이렇게 무산시키다니!

이렇게 관중들이 격분하거나 말거나, 준영은 이어지는 페냐롤의 코너킥 공격에 집중했다.

쿠비야가 거의 슈팅급으로 찬 낮고 빠른 크로스가 공격수와 수비수들 틈을 지나, 알베르토 쪽으로 날아왔다.

몸을 낮춘 알베르토가 다이빙 헤딩슛을 시도했지만, 그 전에 준영이 뻗은 발에 공이 걸렸다.

강하게 바운드가 되는 공을 준영이 앞쪽으로 돌려놓자, 알베르토와 보르헤스가 달려들었다.

“그래, 바로 뺏어 버려!”

“그 치노 자식 발목을 날려 버리라고!”

관중들의 염원이 무색하게도, 준영은 침착하게 둘의 태클과 인터셉트를 뿌리쳤다.

사포로 공을 넘겨 태클을 뛰어넘은 후, 곧장 턴 동작으로 또 한 명을 제쳐 내는 묘기에 관중석에서는 야유와 욕설 대신 경악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저, 저게 뭐야?”

“저런 기술은 난생처음 봐!”

깜짝 놀란 건 관중들만이 아니었다.

페냐롤 선수들은 황급히 준영에게 접근해 역습을 막으려 애썼다.

어느새 페널티 박스를 빠져나와, 중앙선까지 넘으려 들었기 때문.

‘이 녀석, 설마 이대로 돌파를?’

‘아니다. 패스할 생각이야!’

준영이 힘차게 찬 롱 패스가 반대편의 알렉스 쪽으로 향했다.

페냐롤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쿠비야가 먼저 준영의 의도를 파악하고 알렉스에게 향하는 패스를 라인 밖으로 가까스로 걷어 냈다.

그렇게 상황이 종료되자 7만이 넘는 사람들이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터트렸다.

“저 치노가 진짜 장난이 아닌데?”

“잉글랜드를 우승시킨 장본인이라고 하더니만…….”

뛰어난 헤딩력과 공격 전환 능력.

마법의 머리를 가진 자는 알베르토뿐만이 아니었다.

페냐롤 홈팬들은 자신들을 아찔하게 만든 동양의 거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이곳이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 경기장입니다.

페냐롤이 2014년에 새로운 구장을 지어 떠나는 바람에 현재는 우루과이 국대 홈구장으로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2030년 제1회 월드컵 100주년에 맞춰 개수할 계획도 있다고 하네요.

2002년 한국 대표팀도 여기서 경기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경기 전에 우루과이 유명 연예인분이 힘내라고 자국 선수들에게 건투의 키스를 해 주고 있었는데, 김남일 선수가 자신이 우루과이 선수인 양(…) 태연스럽게 끼어들어 볼을 내밀었다는 에피소드도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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