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97화 (297/400)

Round 297. 몬테비데오의 혼란

1960년 6월 27일 정오.

인터콘티넨털 컵 1차전을 치르기 위해 우루과이로 출정하는 맨유 선수단이 맨체스터 공항에 나타났다.

“Glory United!”

“이기고 돌아와라, 붉은 악마들!”

일찍 공항에 진을 친 팬들은 맨유 선수들에게 선전을 기원하는 함성을 보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성에 차지 못한 무리들도 있었다.

“꺄아아아악! 사랑해요, 빅 던!”

“캡틴 리, 당신은 나의 영웅이에요!”

“날 바라봐 줘요, 캡틴!”

경찰들을 뚫고 온 극성팬들이 선수들에게 달려들었다.

로베르트와 경호팀은 준영을 향해 들소처럼 달려드는 여성 팬들의 공세에 쩔쩔맸다.

습격하러 온 테러리스트라면 단방에 때려눕히거나 제압하기라도 하겠는데, 그럴 수도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결국 비범한 극성팬 하나가 경호팀을 뚫고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아아, 캡틴…….”

“이러면 안 됩니다. 나는 연인이 있다고요.”

“알고 있어요. 상관없어요!”

이렇게 달려드는 여성 팬들의 공세에 진땀을 흘리는 준영의 모습이 취재 나온 기자들의 카메라에 그대로 찍혔다.

“존 Y. 리는 축구 외적으로도 인기가 많은 모양이군.”

“이제 알았나? 이미 월드컵 이후부터 사교계 아가씨들에게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고.”

“그럴 만도 하지. 유명한 스포츠맨에 재벌 사업가, 거기다 체격도 당당한 데다 용모도 그리 나쁘진 않잖아.”

“동양인이라도 유명인은 다르구만.”

이렇게 부러움 반, 질투 반의 시선을 받은 준영과 맨유 선수들은 대기실 쪽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이미 선수들의 가족과 지인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알, 물이 마시고 싶으면 항상 홍차를 끓여 마시고, 아무거나 사 먹으면 안 돼. 알겠지?”

“나 참, 난 어린애가 아니라고, 캐시.”

알렉스의 항변에도 캐시는 영 못 미더운 기색이었다.

그럴 만한 게 이번 원정은 가까운 유럽이 아닌 멀리 남미 남단에 가서 치르는 것이었으니까.

“알이 주장만큼 어른스러웠으면 나도 이런 잔소리는 안 했어.”

“근데 주장도 잔소리를 듣고 있나 본데?”

알렉스의 말대로 준영 역시 리즈에게 설교(?)를 듣고 있었다.

“듣자니 우루과이는 요즘 시위가 빈번하대요. 그러니까 현지에 가면 항상 조심해요.”

“뭐, 갈 곳도 별로 없는걸. 어디 관광하러 쏘다닐 일도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아무튼 무사히 다녀와요.”

“알겠습니다, 여왕님.”

안심하고 기다리라는 듯 준영이 키스와 포옹을 해 줬지만, 리즈는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어젯밤에 좀 이상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프레드로 저택은 황폐해 있었고,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던 별장은 흔적도 없었다.

거기다 사람들에게 준영에 대해 물으면 무시하고 지나치거나, 짜증을 냈다.

‘뭔지 모르지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마음 같아서는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잠시 후 준영과 맨유 선수들을 태운 비행기는 저 멀리 시야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부디 무사히 다녀오길…….”

간절한 바람을 되뇐 리즈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단지 가만히 기도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준이 돌아올 때까지 내가 잘 지켜야 해.’

그러면 꿈에서 보았던 불길한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이렇게 판단한 리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

맨유 선수들을 태운 전용기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카리브 끝자락에 있는 트리니다드 토바고에 도착했다.

“으아, 이렇게 오랫동안 비행기를 탄 건 처음이야.”

“아직도 한참 가야 한다며?”

“우리가 사는 지구가 정말 크긴 크구나.”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탔던 선수들은 땅에 발을 딛자마자 굳은 몸을 푸느라 여념이 없었다.

“주장은 대체 한국까지 어떻게 다녀온 거예요?”

“어떻게 다녀오긴. 힘들게 다녀왔지.”

그래도 경험이 있어 그런지, 준영은 다른 선수들보다 피로감을 덜 느끼는 편이었다.

“자, 짐 챙겨라. 오늘은 이 피아코 국제공항 근처 호텔에서 1박을 할 거야.”

다음 날, 연료 보급이 끝난 비행기에 다시 탑승한 선수들은 약 9시간 후 결전의 장소인 몬테비데오에 도착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한데요?”

“여긴 남반부라 지금은 겨울이니까.”

겨울이라 해도 그렇게 춥진 않았고, 봄가을의 영국 날씨와 비슷했다.

그렇다 보니 선수들도 날씨와 관련해서는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몬테비데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상대 팀인 페냐롤 구단 관계자들이 카라스코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그들과 인사를 나눈 맨유 선수들은 페냐롤 구단에서 제공한 버스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우와, 저 건물 좀 봐!”

“무슨 성채 같은데?”

“교회 첨탑보다 큰 것 같아.”

고전적인 양식으로 지어진 회색의 빌딩을 본 선수들은 혀를 내둘렀다.

영국에도 저렇게 크고 웅장한 빌딩은 없었으니까.

“저건 팔라시오살보입니다. 무려 100미터에 24층으로, 남미에서 가장 큰 건물이죠.”

“그래요? 확실히 크고 아름답군요.”

으스대는 페냐롤 관계자의 설명에 준영은 밋밋하게 맞장구를 쳐 주었다.

21세기에서 온갖 높은 건물들을 봤기 때문인지 24층 정도로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저나, 리즈 말대로 시위가 빈번하긴 하군.’

곳곳에 피켓을 든 군중과 학생들의 행렬이 보였다.

평화롭게 행진하는 시위도 있었지만, 경찰과 심하게 몸싸움을 벌이는 광경도 보였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시위가 빈번한 걸까?

그 의문은 호텔에 도착해서 풀 수 있었다.

선발대 겸 정보 조사 차 왔던 전력 분석팀 멤버들이 우루과이의 현 시국에 대해서 대강 파악을 했던 것이다.

“별거 없어. 현재 이 나라 경제가 개판이라서 그래.”

“어쩌다가 그리되었는데요?”

준영의 물음에 로저 바인은 손에 들린 영자 신문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2차 세계 대전 때 우루과이는 대호황을 누렸어. 연합군에 쇠고기, 양모, 가죽 등의 군수 물자를 판매한 덕분이지.”

그래서 당시에 중남미에서 국민 소득이 가장 높을 정도로 번영했다.

기존의 영국 소유의 철도와 수도 업체 역시, 영국이 진 부채를 탕감해 주는 대신 되돌려 받아 국유화했을 정도.

그런 번영은 중국의 국공 내전, 한국 전쟁 등의 전쟁이 이어지면서 계속되었다.

하지만 50년대 중후반부터 세계 전역의 군사 분쟁은 끝났고, 이로 인한 수요 감소는 우루과이 경제에 타격을 안겨 주었다.

“인플레이션에 대량 실업, 국민 생활수준 하락… 외환 보유고는 점점 바닥을 드러내는 실정이지.”

“고작 몇 년 사이 그리되었단 말입니까.”

“농, 축산업을 빼면 경제 기반이 튼실하지 못한 나라였으니까. 한동안 반짝 벌었다고 낭비와 허세를 부린 벼락부자들이 망한 거랑 같은 거지.”

생각해 보면 21세기에도 그런 나라가 있었다.

남미 북쪽에 있는 베네수엘라.

그들의 몰락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경제 구조가 석유에 올인된 것이 가장 큰 잘못이었다.

“우루과이 측에서 이번 대회 참가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그런 국내 경제난을 희석시킬 목적 때문인 것 같아.”

“빵과 서커스의 측면으로 이용한다 이거군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대회에서도 페냐롤, 우루과이 측은 우승을 위해 막대한 지출을 감수한 바 있다고 한다.

준결승 1, 2차전을 모두 비기고 재경기 장소를 재선정할 때, 10만 달러를 산 로렌조에 지불하고 페냐롤의 홈인 센타나리오 스타디움에서 치렀던 것.

그 결과 페냐롤은 2 대 1로 산 로렌조를 물리치고 결승에 올라 우승을 차지했다.

“스포츠로 대중의 눈을 잠시 돌릴 수는 있어도 문제를 해결할 순 없을 텐데요.”

“뭐, 우리가 우루과이 국민이 아니니 거기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그저 컨디션 회복에 힘쓰며 7월 3일 경기를 준비하면 그만이다.

이런 로저의 주장에 준영도 동의했다.

점점 격화되는 우루과이 국내 정세가 어떤 악영향을 야기할지 예상하지 못한 채.

***

다음 날 아침.

맨유 선수들은 식사를 하기 위해 호텔 식당으로 모였다.

하지만 준영이나 대다수 선수들은 잠을 설치는 바람에 낯빛이 좋지 못했다.

“던, 너도 잠을 못 잔 거야?”

“빌어먹을! 양을 세다 보면 잠이 온다고 하던데 전혀 효과가 없었어.”

불면의 원인은 시차도, 환경이 낯설기 때문도 아니었다.

어젯밤에 호텔 부근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경찰은 공포탄을 쏘면서 밤새 진압에 나섰다.

그 바람에 다들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경기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러게. 컨디션이 나쁘면 경기도 못하잖아.”

“우리 말고 우루과이 쪽 말이야. 저렇게 시위가 빈번한데 경기를 할 수 있겠냐고?”

던컨의 말에 준영은 예전에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80년대 한국에서 국제 축구 대회를 하던 중에 근방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경찰이 쏜 최루탄 가스가 경기장까지 날아와 경기가 중단되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생길지 모르지. 이미 한국에서 벌어졌던 일을 생각하면…….’

3.15 부정 선거 전, 축구로 정치 이슈를 덮으려던 곽영주가 FA에 잉글랜드 대표팀 파견을 요청한 바 있었다.

유니폼만 잉글랜드 대표팀이었던 이 영국 군인 선발팀은 전반부터 한국 대표팀에게 대차게 발렸다.

그리고 짝퉁의 실체를 알게 된 군중들의 분노가 폭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마산의 고 김주열 학생 사건과 함께 4월 혁명에 격발을 당긴 사건이었다.

‘뭐, 우리가 군인 선발팀만큼 형편없진 않지만.’

거기다 시위가 빈번하다지만, 이렇다 할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물론 민심이 크게 흥분해 있는 건 사실이니 일이 또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부디 아무 일 없이 끝났으면 좋겠는데…….’

식사를 마치고 잠시 눈을 붙였던 선수들은 훈련을 위해 미리 지정된 경기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스트레칭이나 러닝 같은 간단한 훈련으로 몸을 풀면서 컨디션을 끌어 올렸다.

“유나이티드는 뭔가 특이한 훈련 방식이 있다고 하던데…….”

“그러게. 지금 하는 건 그냥 평범해 보이잖아.”

맨유 선수들의 훈련을 취재하던 우루과이와 남미 기자들은 다소 실망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동양인 주장이 퍼트린 신비한 동양의 비술.

그것이 비행기 사고로 파탄이 난 팀의 전력을 빠르게 재건, 유럽 챔피언으로 등극한 비결이란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 맨유 선수들은 그리 대단한 훈련을 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축구공으로 여럿이 테니스를 하거나, 술래잡기 비슷한 것을 하면서 놀고 있었다.

“우리가 염탐하고 있다고 보고 일부러 저러는 건가?”

“설마. 훈련할 시간도 아까울 텐데.”

기자들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갑자기 경기장 근처에서 콩 볶는 듯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맨유 선수들은 훈련을 중단했다.

“또 시위인가?”

“나 참, 훈련도 마음 편히 못하게 하다니…….”

“혹시 일부러 저러는 거 아냐?”

시위대가 경기장 쪽으로 접근해 오는 일은 없었지만, 맨유 선수들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첫 번째 현지 훈련은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한 상태로 끝나고 말았다.

“자꾸 이러면 곤란한데……. 내일은 시 외곽에 훈련할 곳이 없는지 요청해 봐야겠어.”

“예, 뭐라도 해 보는 게 맞겠죠.”

사정이야 어떻든 왕좌는 놓칠 수 없다.

그렇기에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방법을 찾기 위해 애썼다.

***

1987년 6월 10일에 마산 공설 운동장에서 대통령배 국제 축구 대회 한국과 이집트 경기 도중 최루탄 가스가 날아와서 이집트 선수들이 쓰러지는 등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결국 경기 진행이 불가능하다고 본 진행위원회에서는 전반 29분에 0 대 0인 상태에서 경기를 중단시켰습니다.

문제는 관중들의 환불 요청에 진행위원회가 응해 주지 않았고, 분노한 관중 3만여 명은 그대로 시위대에 합류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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