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96. 보이지 않는 위험
리버풀 처치 스트리트의 핸더슨 백화점.
준영은 최근 이곳에 오픈한 나2키 매장을 보기 위해 조셉 포스터와 함께 백화점을 찾아왔다.
“주로 판매되고 있는 건 운동화를 비롯한 신발이지만, 의류도 꽤 많이 팔리고 있어요.”
테니스와 골프 등 스포츠 활동을 하기 적합한 옷들이 잘나가고 있다고.
물론 모든 사람들이 운동을 즐겨서 구매하는 건 아니었다.
활동하기 편리하다 보니 나2키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나2키 매장은 리버풀뿐만 아니라, 볼턴과 맨체스터, 런던 등 영국 내 주요 도시들은 물론 해외에서도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상복이나 작업복 용도로 이용하고 있다는 건가?”
“가격도 그렇게 부담은 안 되니까요. 주로 젊은 층에서 매장을 많이 찾아온다고 해요.”
“아, 혹시 밝은 색상의 옷들이 많은 것도 그래서 그런 거야?”
“맞아요. 요즘 유행이 밝고 뚜렷한 원색 계통으로 점점 바뀌는 중이라고…….”
조셉의 설명이 이어지던 중, 준영은 경호원인 로베르트가 날카로운 눈길로 사방을 둘러보는 모습을 보았다.
“무슨 일이죠?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 로베르트 씨?”
“그게… 뭔가 안 좋은 느낌이 들어서 말입니다.”
긴장을 풀지 않는 로베르트의 모습에 준영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리버풀이잖아요. 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 당연하겠죠.”
“그거야 경기장에서만 싫어하는 거 아닙니까.”
콥스라도 대놓고 밖에서까지 적대감을 드러내는 이들은 별로 없다.
정말 그랬다면 준영이 투자하고 있는 나2키의 매장이 리버풀 쇼핑의 중심가에 들어서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나2키 상품을 애용하지도 않았을 터.
“뭐, 극단적인 성향인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충분히 둘러봤으니 이만 가 봐야겠군요.”
로베르트의 직감은 뛰어난 편이었다.
그가 불안하게 느낄 만한 뭔가가 있다면 피하는 게 좋았다.
일부러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으니까.
“근데 이게 무슨 냄새지?”
“뭔가 타는 것 같은…….”
따르르르릉-!
매장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백화점 전체에 울려 퍼졌다.
‘설마 화재?’
“꺄아아아악! 불이야!”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아래층에서 일어난 불길이 무섭게 사방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화재에 백화점 안에 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지둥 도망쳤다.
“벌건 대낮에 화재라니……?”
“불이 나는 데 밤낮이 어딨습니까?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가리고 몸을 낮춰요. 연기에 질식되면 큰일입니다!”
로베르트의 지시에 준영과 조셉은 입과 코를 가리고 비상구를 찾았다.
하지만 이동하는 것도 그리 쉽지 않았다.
패닉에 빠진 사람들이 뒤엉켜 쓰러지고, 서로 먼저 빠져나가겠다고 아우성을 쳤으므로.
‘맙소사, 불타거나 질식해서 죽는 사람보다 치여 죽는 사람이 더 많겠군.’
아수라장을 보다 못한 준영이 로베르트에게 말했다.
“로베르트 씨가 군중들을 진정시켜 주세요. 노약자들부터 빠져나갈 수 있게 해야 됩니다.”
“알겠습니다.”
“조셉, 넌 혹시 매장에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이 있나 둘러봐.”
“예, 형님. 근데 형님은……?”
“난 소화전을 찾아볼게. 불이 번지는 걸 조금이라도 막아야지.”
지시를 내린 준영은 소화전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소화전은 물론 소화기도 보이지 않았다.
‘나 이거야 원……. 소방법 같은 거 아직 지정되지 않은 건가? 아, 저기 있네.’
준영은 겨우 한쪽 구석에 박혀 있는 소화기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구조가 21세기의 것과 달라서, 표면에 붙은 매뉴얼을 보고 간신히 사용법을 알아냈다.
그렇게 악전고투하는 사이, 소방차가 도착했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창가에 고립되어 있던 사람들은 사다리차를 통해 하나둘 구조되었다.
준영과 조셉, 로베르트도 무사히 빠져나왔다.
“하아… 오픈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매장 같은 건 또 세울 수 있잖아. 안 죽고 안 다친 게 천만다행이지.”
조셉을 위로한 준영은 불타는 백화점을 바라보았다.
‘아까 로베르트 씨가 안 좋은 느낌이 든다고 했는데, 혹시……?’
자신을 노린 방화가 아닐까.
하지만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죽이자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있는 백화점에 불을 지르는 미친놈이 있을 거라곤 믿어지지 않았으므로.
***
런던 서쪽 켄싱턴.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즐비한 이 지역에 화이트 디펜스의 당수 오스왈드 모슬리가 머물고 있었다.
“나는 켄싱턴이 좋아. 대영제국의 전성기, 빅토리아 시대의 향수를 느낄 수 있으니까.”
오스왈드를 지지하는 젊은 청년들은 그의 말을 부지런히 경청했다.
아예 수첩을 펼쳐 놓고 적는 이들도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 켄싱턴에 사는 자들은 그 시대의 기상을 잃어버리고 말았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당수님.”
데이비드 어빙이라는 젊은 작가가 오스왈드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노팅힐 폭동을 부추겼던 오스왈드는 작년 총선 때 켄싱턴 북부 지역 의원으로 출마했다.
그는 이민자들의 추방과 혼인 금지를 공약으로 걸었지만, 무참하게 낙선했다.
화이트 디펜스 회원들 같은 골수 인종주의자들이 아니면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안타까운 현실에 좌절하지 말고 역량을 키워 나가게. 순수한 앵글로 색슨의 역량을 다시 키워 내야 자본을 잠식한 유대인들이나, 우리의 터전을 좀먹고 있는 더러운 유색 인종들을 일소할 수 있어!”
오스왈드의 열변에 파시스트 청년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그때 방 안으로 중년 사내가 들어왔다.
청년들을 돌려보낸 오스왈드는 뺨에 칼자국이 난 사내에게 곧장 물음을 건넸다.
“리버풀에서의 일은 잘 처리했나?”
“예, 아주 깔끔하게 재가 되었지요.”
“잘했네. 그 스코틀랜드 장사치 놈들은 한번 혼쭐이 나야 해.”
22일 화재가 난 핸더슨 백화점은 스코틀랜드 기업인 프레이저 그룹 소유의 매장이었다.
화이트 디펜스에서는 프레이저 그룹에게 유대인 자본이나 외국계 브랜드와 손을 잡지 말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프레이저 그룹은 이를 코로 듣지도 않았고, 이에 화이트 디펜스는 본때를 보여 주기로 마음먹었다.
“깔끔하게 처리했나? 뒤를 밟히는 일은 없어야 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기 합선으로 위장했으니까요.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지요.”
화재 당일 존 Y. 리가 핸더슨 백화점에 찾아왔는데, 무사히 탈출했다고.
그 얘기를 들은 오스왈드는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쳇, 그 덩치 큰 원숭이 놈, 명줄 한번 질기구만.”
“그놈의 입지는 나날이 커지고 있습니다. 일개 선수 나부랭이로 볼 수 없을 정도이지요.”
“나도 알고 있네.”
놈은 걸출한 축구 실력으로 맨체스터뿐만 아니라, 영국의 축구 팬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있었다.
거기다 놈이 만들어 판매하는 먹거리와 의류는 서민층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장학금 지원이나 빈민 구제 등에 돈을 쓰며 민심을 얻기까지.
이렇다 보니 놈을 ‘캡틴’이라 부르며 받드는 자들도 많았다.
“최근에 놈의 나라에서 이민자들이 계속 오고 있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점점 늘어나는 추세지요.”
“그 해충 같은 것들을 박멸해야 마땅하건만!”
“그러자면 존 Y. 리부터 처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폴란드 녀석들이 항상 놈과 녀석의 집 주변을 지키고 있어 쉽지 않습니다.”
놈을 처치하려면 지난번처럼 어설픈 애송이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제대로 계획을 짤 필요가 있었다.
“처치한다고 해서 꼭 애써 죽일 필요는 없지. 오히려 놈의 행각을 생각하면 모든 것을 잃고 고통을 느끼게 해 줘야 해.”
“살아도 산 게 아니게 해 주는 겁니까? 확실히 그쪽이 더 나을 수 있겠군요.”
음흉한 웃음을 지은 두 사람은 곧장 존 Y. 리를 찍어 낼 음모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
제1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은 우루과이의 페냐롤이 차지했다.
페냐롤은 콜롬비아의 미요나리오스를 물리치고 결승에 올라온 클럽 올림피아를 1, 2차전 합계 2 대 1로 누르고 정상에 올랐다.
“페냐롤의 특급 공격수인 알베르토 스펜서가 크게 활약했다고 하더군. 1차전에서는 결승 골도 터트리고.”
준영과 맨유 선수들은 남미에 파견된 전력 분석팀이 찍어 보내 준 경기 영상에 시선을 집중했다.
눈에 띄게 건장한 체격을 가진 스펜서는 부지런히 전방을 누비고 다니며 올림피아 수비진을 흔들어 댔다.
특히 뛰어난 헤딩과 연계 능력은 감탄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저만한 능력을 가진 선수가 왜 후대에 알려지지 않은 거지?’
당장 유럽에 데려와도 톱클래스 공격수로 활약할 재능이다.
내심 혀를 내두르던 준영에게 던컨이 말했다.
“어때, 존?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물론이지. 하지만 축구는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니까.”
연계 능력이 뛰어난 스펜서는 동료를 이용해서 기회를 만들어 낼 것이다.
즉, 승리를 위해서는 던컨이나 다른 선수들의 활약이 필수적이다.
“1차전이 7월 3일이지? 준비를 단단히 해 둬야겠군.”
“열대의 무더위에 빨리 적응하는 게 관건이겠군.”
“바보야, 남미라고 다 열대 지방은 아니야.”
영상 분석을 마치고 동료들과 시청각실에서 나온 준영은 클럽 하우스 관리인에게 찾아갔다.
“아저씨, 제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습니까?”
“예, 점검해 보니 확실히 화재에 취약한 구역들이 있었지요. 일단 소화기를 구매해서 배치해 뒀어요.”
“잘하셨습니다.”
지난번 백화점에 갔을 때 화재 사건을 겪었던 준영은 집과 회사 공장, 경기장과 클럽 하우스 전체의 소방 점검을 했다.
그 결과 화재 대비 설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걸 확인했다.
다행히 소방 교육은 어느 정도 되어 있었다. 전쟁 때 폭격으로 인한 화재를 빠르게 진화하기 위해서라고.
“근데 소화기 같은 건 불이 안 나면 쓸모없는 물건인데…….”
“쓸모없는 게 제일 좋죠. 하지만 일이 터지면 제일 먼저 필요한 물건이 될 겁니다.”
준영은 이참에 건물 내부에도 스프링클러를 설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계식으로 작동하는 자동 스프링클러는 이 시대에도 발명이 되어 있었으니까.
다만 필수 안전장치는 아니었고, 화재 보험 비용을 아끼려고 설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바뀌어 가겠지. 이번 백화점 화재 사건 때문에 공공장소에 화재 안전장치 설치를 법제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언론에서 나오고 있으니까.’
핸더슨 백화점 화재 사건으로 11명의 사람들이 죽었고, 부상자도 수십 명이 나왔다.
화재로 인한 사상자보다 대피하는 과정에서 창밖으로 떨어지거나 군중에 밟힌 사람들이 더 많았다.
‘수백 명이 있던 백화점에서 그 정도였는데, 수만 명이 들어가는 경기장에서 사고가 생기면……. 으, 생각하고 싶지 않아.’
어릴 때 겪었던 열차 사고 때문에 준영은 대형 사고 같은 건 몸서리칠 정도로 싫어했다.
그건 열차에 대한 트라우마가 극복된 현재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그렇기에 주변에서 지나치다 하더라도 충분히 대비해 놓을 생각이었다.
***
리버풀의 핸더슨 백화점 화재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일로, 이때 전소된 백화점은 2년 후에야 재영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전후의 영국은 재건이 급하다 보니 소방 관련 시설이 미비한 건물들이 많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언젠가 일어날 재난이었다는 거죠.
저 사건을 계기로 영국에서 소방 관련 법들이 전부 개정이 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