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95화 (295/400)

Round 295. 든든한 후원자

리버풀의 감독 빌 섕클리.

맷 버스비와 절친한 사이인 그는 올드 트래퍼드나 클럽 하우스 오스길리아스를 곧잘 찾아왔다.

그러면서 맨유 구단 코칭스태프인 양, 선수 지도나 상대 팀 분석 등에 끼어들어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더 클리프를 찾아왔다.

준영의 요청에 자기 구단 선수들을 잔뜩 데리고서.

“순천아, 멀뚱히 보지 말고 내려와서 수비 거들어!”

“야야, 왼쪽! 왼쪽으로 들어오잖아! 빨리 마크해!”

붉은 저지를 걸친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은 리버풀이 공격을 해 올 때마다 진땀을 뺐다.

특히 눈을 뗄 수 없는 선수는 펠레.

스크린으로 보던 그의 화려한 개인기에 한국 선수들은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쳇, 거기서 구경하지 말고 필드로 나오라고.”

불만스럽게 구시렁거리던 펠레는 빌 섕클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준영을 째려보았다.

그때 한국 팀의 몇 안 되는 해외파 선수 차태성이 펠레에게 달려들었다.

‘한눈을 팔아? 우릴 아주 호구로 보는구만!’

다시는 한국을 무시하지 마라.

공을 깔끔히 가로채서 녀석에게 그리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드, 드래그 백?”

“태성이가 뚫렸다!”

가볍게 차태성을 제친 펠레는 곧장 한국 골대를 향해 강슛을 날렸다.

하단 구석으로 쏜살같이 날아간 슈팅은 함흥철의 펀칭을 맞고 골대 옆으로 흘러 나갔다.

“정신 차려! 몇 번이나 당할 거야!”

함흥철의 호통에 수비수들은 낯빛을 붉혔다.

전반전도 벌써 40분대.

점수는 0 대 2로 한국 대표팀이 뒤지고 있었다.

하지만 리버풀이 점유율이나 슈팅수에서 훨씬 앞섰던 걸 생각하면 선전하고 있다고 할 만했다.

리버풀이 날린 19개 슈팅 중에 들어간 건 단 2개, 그나마 그중의 하나는 페널티킥이었으므로.

“골키퍼가 팀을 지탱하고 있구만.”

“괜히 주장을 맡은 게 아니죠.”

섕클리의 말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 차가 큰 상황에서도 한국 팀이 힘겹게 버텨 내고 있는 건 함흥철의 눈부신 선전 덕분이었다.

골키퍼의 활약은 팀에 힘을 주는데, 한국 팀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흥철 선배가 계속 고생하게 둘 순 없지.’

‘공격! 공격을 해야 돼. 계속 당할 수는 없어!’

정규 시간이 거의 끝나 갈 즈음.

미드필드에서 리버풀의 패스를 끊어 낸 김찬기가 재빠르게 리버풀 진영을 향해 공을 보냈다.

하지만 문정식이 그 패스를 받기 직전, 리버풀 수비수 화이트가 먼저 어깨를 밀어 넣으며 공을 가로챘다.

“아, 조금만 더 일찍 달려 들어가지.”

“후후, 경험이 부족하면 이런 상황에서 차이가… 야야!”

섕클리가 말을 하다 말고 필드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화이트가 가로챈 공을 미드필더 멜리아 쪽으로 보냈는데, 최정민이 송곳같이 치고 나오면서 끊어 버렸기 때문.

놀란 리버풀 수비수들이 황급히 최정민을 둘러싸려 했다.

골키퍼의 시선까지 유인한 최정민은 슬쩍 옆으로 공을 흘렸고, 이것을 정순천이 뛰어들며 골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좋아, 만회 골이다!”

“멋진 패스였어요, 정민 선배!”

수세인 상황에서 단 한 번의 기회를 살려 득점으로 만든 한국 대표팀.

기뻐하는 그들과 달리, 리버풀 선수들은 섕클리 감독의 호통에 진땀을 뻘뻘 흘렸다.

“이놈들아!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경기에 집중하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야 되냐!”

전반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린 뒤에도 섕클리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사자도 토끼를 잡을 땐 최선을 다하는 법이야! 토끼 뒷발에 차이는 망신을 당하기 싫으면 정신 똑바로 차려!”

“Yes, Sir!”

펠레라는 선수발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리버풀이 승격과 리그 우승을 이뤄 낸 건 섕클리의 지도력 덕분.

선수들도 축구에 대한 애정이 깊고, 팀을 변모시켜 가는 감독에게 깊은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이렇게 리버풀 선수들의 눈빛을 바꿔 놓는 섕클리의 언변에 한국 선수들도 혀를 내둘렀다.

“저쪽 감독도 장난 아니군.”

“후반전엔 더 힘들겠어.”

예상대로 리버풀은 후반전에 이 꽉 물고 덤벼들었다.

그들은 한국 대표팀의 역습을 틀어막으며 공세를 높였고, 추가 골을 만들어 냈다.

결국 한국 대표팀은 1 대 4로 패하며 경기를 마쳤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감독님.”

“오냐. 다음에 또 보자, 존.”

선수들을 데리고 떠나는 빌 섕클리를 배웅한 준영은 한국 선수들에게 돌아와 소감을 물었다.

“어떻습니까. 삼바 축구의 공격수를 상대해 본 기분이?”

“뭐라고 해야 하나……. 마치 칼춤을 추는 고수에게 당한 느낌이랄까.”

“확실히 움직임의 리듬이 색다르죠. 브라질에서 저런 걸 징가라고 하는데, 상대와 경합하면서 제치는 플레이를 상당히 즐기는 편이에요.”

준영은 자신이 알고 있는 브라질 축구의 특징과 장단점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경기가 막 끝나고 피곤한 상황임에도 선수들은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고, 몇몇은 수첩까지 펼쳐 들고 기록했다.

이렇게 준영이 안겨 주는 선물은 그들을 힘들게 했지만, 좀 더 강하게 단련시켜 주었다.

이는 단지 현재 대표팀 전력 향상뿐만 아니라, 한국 축구가 계속 발전해 갈 수 있는 불씨가 되었다.

***

월드컵 100주년을 1년 남겨 둔 가운데, BBC에서는 월드컵 역사를 빛낸 팀들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에 나섰다.

일전에 ‘Football, The Great Player’를 제작했던 스태프가 다시 모여 팀을 꾸렸다.

그들은 지난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조사했던 자료들 중에 쓸 만한 것을 다시 끄집어내는 한편, 다큐멘터리에서 조명할 팀들을 선정했다.

“브라질은 빠질 수 없지.”

“영국, 잉글랜드는 제일 마지막으로 하는 게 적합하다고 봐요. 축구 종가 200여 년 역사를 조망하면서 말이죠.”

10여 개 안팎으로 팀들이 지목되는 가운데, 아시아에서는 단연 대한민국이 꼽혔다.

“아시아의 호랑이를 빼면 안 되지.”

“정말 영화 같은 스토리를 갖고 있으니 말이죠.”

제이크 김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이 모은 자료들을 동료들에게 보여 주었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이미 최종 예선이 끝나기 두 달 전인 2029년 4월에 2030년 브리튼-에이레 월드컵 진출을 확정 지었다.

현재 FIFA 랭킹 12위에 올라와 있는 한국은 이제 월드컵에서 빠질 수 없는 단골손님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본선 진출국들 중에서는 같은 조에 편성되고 싶지 않은 국가 1위로 꼽히고 있었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벨기에 등 내로라하는 강팀들도 그들에게 덜미가 잡히곤 했으니까.

“내가 어릴 때부터 한국은 월드컵에 나왔는데……. 옛날부터 축구를 잘했던 나라였던 거죠?”

“아니, 처음엔 그렇지도 않았지. 아시아에서 타이완, 홍콩, 인도, 미얀마랑 전력이 비슷한 시절도 있었어.”

제이크 김이 말한 국가들도 한때 아시아에서 내로라하는 강팀들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중국과 일본, 중동권 국가들에게 밀려 약체로 전락했다.

“인도의 경우 1960년대에 고스와미 추니라는 뛰어난 공격수가 있었어. 1958-59 시즌에 뉴캐슬에 입단하며 풋볼 리그에 데뷔했는데, 나중에 토트넘으로 이적해서 대활약을 했지.”

추니는 토트넘의 더블 우승에 공헌하고, 인도를 아시안게임에서 우승시키는 등 굉장한 활약을 했다.

본인은 아시아 최강의 스트라이커로, 그리고 인도 역시 아시아의 축구 강국으로 군림했지만, 그 영화는 10년을 가지 못했다.

“그 당시 인도가 정말 실수를 했던 게, 월드컵 출전 티켓을 따낸 적도 있는데 출전을 안 했어. FIFA에서 출전 비용까지 대 주겠다고 했는데 말이지.”

“인도 선수들은 맨발로 뛰는 걸 좋아하는데, FIFA에서 이를 금지시켰기 때문에 출전이 틀어졌던 거 아닙니까?”

동료 스태프의 물음에 제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루머고, 실제론 출전해 봤자 성적이 좋지 않을 게 뻔하니 안 간 거야.”

이후 FIFA와 사이가 틀어진 인도는 1980년대까지 월드컵에 불참했다.

하지만 그런 쇄국 정책의 결과, 인도 축구는 다른 나라들과 실력 차가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그에 비해 한국은 달랐지. 전쟁이 막 끝난 무렵에도 월드컵에 출전은 했어.”

나라가 가난했지만, 한국 축구인들은 선진 축구를 도입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운 좋게도 그들에겐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가 있었다.

바로 한국계 홍콩 시민인 존 Y. 리.

그는 맨유의 주장으로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 주며 한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고, 한국 축구 후원에도 적극적이었다.

“추니도 인도 축구 발전을 위해 노력했지만 한계는 있었지. 하지만 존 Y. 리는 달랐어. 한국에서 그는 스포츠 영웅 이상이었으니까.”

“석유 재벌이라서 그랬던 거죠?”

“아니, 석유로 돈 벌기 전부터 이미 그랬지.”

당시에 존 Y. 리는 축구계 원로들뿐만 아니라,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조차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단지 선수로서 실력이 뛰어나거나 재력가라서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나 인물을 보는 눈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이탈리아 사업가를 두고 나라 말아먹을 놈이라고 그랬는데, 진짜로 그랬지.”

“그게 누군데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런 남다른 안목을 가진 존 Y. 리는 한국 축구의 발전을 믿고 꾸준하게 밀어줬다.

덕분에 한국 축구인들은 유럽의 선진 축구를 경험할 수 있었다.

대표팀은 종종 맨체스터를 찾아와 훈련하고, 일부 선수들 중에는 풋볼 리그에서 뛰기도 했다.

심지어 70년대 가서는 맨체스터에 ‘맨체스터 코리안 AFC’라는 팀이 만들어졌다.

탄광 및 건설 노동자로 영국에 온 한국인 이민자들이 만든 아마추어 팀이었는데, 한국 축구인들이 이곳을 많이 거쳐 갔다.

“거기서 뛴 선수들이 풋볼 리그뿐만 아니라 프랑스나 독일, 노르웨이와 스페인, 오스트리아까지 가서 선수 생활을 했지.”

“존 Y. 리도 그 팀에 후원을 했나요?”

“물론. 홈 경기장도 마련해 주고 선수들 지도도 해 줬다고 해.”

제이크 김은 당시 맨체스터 코리안 AFC 선수들을 가르치는 이준영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여 주었다.

“이렇게 유럽의 선진 축구를 배운 이들이 조국으로 돌아가서 다시 후학들을 가르쳤어. 그때 한국 경제도 한창 성장할 때라 축구도 덩달아 발전해 갔지.”

제2의 이준영을 꿈꾸는 선수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산업 현장에선 실업팀은 물론 크고 작은 아마추어 팀들이 조직되었다.

이런 팀들은 도마다 나뉘어서 리그전을 펼치고, 가을에 리그 우승 팀들이 서울로 모여 플레이오프로 전국 우승을 다퉜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에 ‘슈퍼리그’라는 이름으로 정식 프로 리그가 출범했다.

“이런 국내외 기반 덕분에 아시아의 호랑이는 월드컵 단골손님이 될 수 있었던 거지.”

“제이크 덕분에 한국편 시나리오는 다 나왔네요.”

스태프들이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그때, 스태프 한 명이 손을 들며 제이크에게 물었다.

“쭉 발전하는 모습만 말씀하셨는데, 시련 같은 것도 있지 않았어요?”

“물론 있었지. 그렇기에 한국의 발전이 더 빛날 수밖에 없는 거야.”

투자나 도전이 항상 성공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더구나 뜻하지 않은 난관과 방해가 벌어지는 때도 있었다.

이준영과 한국 축구계는 포기하지 않고 이런 시련과 난관을 극복해 왔다.

“그중엔 꽤 위험한 일도 좀 있었어. 어쩌면 너희도 들어 본 적이 있는 일일지도?”

“어떤 일이었죠?”

“그러니까 1960년 6월 22일에…….”

동료들의 물음에 제이크 김은 그날 있었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세 번에 걸쳐 이탈리아 총리를 지낸 바 있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1987년부터 약 30년간 AC 밀란의 대주주와 구단주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의 가문은 민영 언론을 독과점한 수준의 영향력을 갖고 있었는데, 이를 토대로 정치를 하면서 상당한 여론 조작을 비롯하여 온갖 부패한 행각은 다 저질렀습니다.

실제 2002년 월드컵 때 16강에서 한국에게 패하자, 대대적으로 국내에서 여론몰이를 일으켜 당시 안정환 선수가 페루자에서 퇴출되게 만들기도 했었지요.

21세기 들어 이탈리아 정치와 경제가 개막장이 된 게 다 이 양반 때문이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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