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94. 거절 못할 레전드
“체격도 좋은 데다 스피드도 빠르고 드리블도 능한 양발잡이죠.”
거기다 측면이든 중앙이든 어디에서든 능숙하게 돌파를 해내고, 패스나 연계 플레이도 뛰어나다고 했다.
15살 때부터 프로에서 뛰며 90경기에서 101골을 넣었고, 페냐롤로 이적하고 데뷔전에서도 해트트릭을 기록했다고.
로저에게 이야기를 들은 버스비 감독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굉장히 뛰어난 선수 같은데, 어째서 알려지지 않은 거지?”
“에콰도르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나라니까요. 거기다 지금까지 월드컵에도 한 번도 출전하지 않았고요.”
FIFA에는 1926년에 가입했지만, 월드컵에는 불참하거나 기권했다.
에콰도르 국내 축구의 인기는 높았지만, 국가에서 대표팀이 국제 대회에 출전하기 위한 지원을 꺼렸기 때문이라고.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만, 알베르토가 월드컵에서 활약했다면 벌써 유럽에서 뛰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틀림없이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서 뛰었겠지. 근데 스펜서라는 성씨는 남미 쪽으로 보이지 않네만?”
“아, 그건 알베르토의 부친이 영국 태생의 자메이카인이라서 그렇답니다.”
“그래? 부친이 영국 출신이면 영어도 좀 할 줄 알까?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된다면…….”
버스비는 혹시 알베르토를 영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었다.
이미 자메이카 출신 선수들이 풋볼 리그에서 뛰고 있는 데다, 지난 시즌 리버풀은 펠레를 앞세워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런 상황에서 유나이티드가 남미 선수를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시아 선수가 주장을 맡고 있을 정도로 문호가 열려 있으니까.
“감독님, 무슨 기대를 하는지는 알겠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뤄야 합니다. 만약 페냐롤을 인터콘티넨털 컵에서 만난다면 알베르토를 봉쇄할 방법을 생각해야 하니까요.”
“그래, 그게 먼저이긴 하지.”
하지만 미리 준비해 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
이에 버스비 감독은 알베르토 스펜서에 대한 정보를 더 모으고, 페냐롤 구단이나 그의 에이전트와 접선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
6월이 되자, 준영은 대입을 위한 막바지 공부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결전일, A-level 시험을 치르는 날이 왔다.
‘후, 침착하게…….’
시험지를 받아 든 준영은 답안지에 이름을 쓰고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 나갔다.
작년에 한 번 해 봤기 때문일까. 긴장감은 덜했고, 문제도 한결 수월하게 풀 수 있었다.
“오빠, 어땠어?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아?”
준영이 시험을 치고 돌아오자, 카린이 냉큼 달려와서 물었다.
“8월의 발표를 기다려 봐야 하겠지만, 문제가 잘 풀려서 예감이 좋아.”
“와, 그럼 이제 리즈 언니랑 결혼하는 거야?”
“음, 결혼은… 때가 되면 해야지.”
리즈가 대학 졸업할 때까지 미룰 생각이었다.
하지만 부풀어 오르는 기대감에 눈을 반짝이는 카린에게 그리 말할 수 없어 대강 둘러대고 말았다.
“너무 기대하지 마, 카린. 형부는 또 낙제할 수 있으니까.”
앤지의 말에 카린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작은언니는 너무 비관적이야.”
“현실은 만만찮은걸. 형부가 쉽게 풀 정도면 다른 수험생들도 마찬가지일 거 아냐? 합격 커트라인이 훨씬 올라갈 수 있다고.”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준영이 문득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에 떨고 있을 때, 김용식 선생이 찾아왔다.
“이 군, 시험은 어땠나?”
“작년보단 훨씬 나았죠. 그래도 결과는 기다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부디 잘되길 빌겠네. 아, 그리고 한국 대표팀 전지훈련 말인데…….”
김용식의 물음에 준영은 걱정 말라는 듯이 냉큼 말했다.
“더 클리프 임대는 감독님과 구단에 허가를 받아 놨습니다. 훈련 도구나 식자재도 충분히 준비해 놨고요.”
“그래, 애써 준 건 나도 알고 있네. 내가 말하려는 건 인원이 좀 늘어날 수 있다는 거야.”
그 말에 준영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내에서 합숙 훈련 중이라면서요? 아직 본선 출전 선수들을 확정하지 못한 겁니까?”
“아니, 그렇지 않고……. 육상 쪽에서 영국에서 같이 훈련할 수 없겠냐고 문의해 왔다는군.”
“육상 연맹에서 말입니까?”
“그래, 영국 육상이 강하다니까 올림픽 전까지 여기 와서 훈련하고 싶어 하더군. 기왕이면 영국 선수들 노하우도 배우고 싶어 하고.”
육상 선수들이 낀다?
그리 어려울 건 없고, 와서 성실히 훈련하면 얼마든지 지원해 줄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자칫 엉뚱한 짓을 해서 분위기를 흐려 놓지 않을지 우려되었다.
“거절하긴 힘든 겁니까?”
“힘들지. 육상 쪽 지도자가 이번 올림픽 선수단 단장까지 맡고 있으니까.”
“누군데요?”
대체 얼마나 거물이기에 거절하기 힘들단 말인가.
김용식의 입에서 그 거물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손기정이야.”
“아…….”
손기정이면 거절 못하지.
준영은 곧장 육상 쪽 지원을 알아보기 위해 조셉 포스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국 육상 쪽 인맥은 조셉의 집안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왕이면 다른 종목 대표 선수들도 지원해 볼까?’
그럼 한국 축구계뿐만이 아니라 스포츠 업계 전체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터.
결정을 굳힌 준영은 조셉과 통화를 끝낸 후, 곧장 한국에 있는 이억관에게 연락을 보냈다.
***
6월 중순, 한국 대표팀이 맨체스터를 찾아왔다.
축구대표팀과 함께 7명의 육상 선수들도 끼여 있었다.
준영은 그 육상 선수들을 인솔해서 온 손기정 단장과 악수를 나누었다.
“만나서 영광이오, 이준영 선수.”
“아뇨. 오히려 제가 영광이죠.”
한국 체육계의 선구자 손기정.
그는 자신이 데려온 육상 대표 선수들을 일일이 준영에게 소개해 주었다.
“여기 김종철 군은 100미터, 이학자 양은 800미터에 출전하지. 서영주 군은 주폭도에 나가고.”
“주폭도요?”
“멀리뛰기 말이야. 서 군은 지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기대주지.”
나머지 4명의 선수, 이상철과 김연범, 송삼섭과 이창훈은 마라톤에 출전한다고 했다.
손기정은 이창훈에 대해 많은 기대를 품고 있었다. 작년에 2시간 24분 7초로 한국 신기록을 세웠기 때문.
“물론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려면 그 정도로는 부족하지. 요즘 외국 선수들은 2시간 20분대를 돌파하고 있으니까.”
“당장 기록을 끌어올릴 순 없으니……. 경기 당일 컨디션 유지가 중요하겠군요.”
“그렇지. 듣자니 이준영 선수는 식이 요법으로 피로 회복과 체력 증진을 체계적으로 하고 있다던데?”
“예, 뭐 조금 알고 있는 수준입니다. 거기다 축구와 마라톤은 다르니까 제가 도움은 못 될 것 같습니다.”
준영의 말에 손기정은 손을 내저었다.
“도움이 못 되다니. 이 선수가 아니었으면 올림픽 준비를 제대로 할 수도 없었을 텐데.”
단지 해외 전지훈련에 도움만 준 게 아니었다.
얼마 전 이준영은 미스터리 푸드 한국 법인을 통해, 이번에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에게 의류와 장비를 비롯한 각종 지원을 해 줄 것을 약속했다.
혁명이라는 어수선한 상황 때문에 후원도 끊기고, 훈련도 여의치 못한 상황이던 선수들로서는 쌍수를 들어 반길 만한 일이었다.
물론 이는 그저 호의 때문은 아니었다.
앞서 계획한 대로 축구계를 넘어 스포츠 업계 전반에 레전드로서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 눈앞에 있는 손기정 선생처럼 거절하기 힘든 존재가 되는 거지.’
자칫하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는 것이 명성.
그렇기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져 두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레전드로서 길이길이 남을 테니까.
***
“더 빨리, 더! 더!”
“머뭇거리면 뺏긴다고 몇 번을 말해야 해!”
더 클리프에 자리 잡은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은 매일 강훈을 거듭하며 체력을 키우고 조직력을 다져 나갔다.
한편으로 준영과 그 인맥을 통해 영국과 이탈리아, 브라질에 대한 정보를 모아들였다.
“참 걸려도 오지게 빡센 조에 걸렸네요.”
준영의 말에 최정민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져도 손해는 아니지만 말이야.”
“그래도 너무 크게 패하면 군소리가 나올 겁니다.”
일단 영국 팀에 대한 정보는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노먼 크릭 감독이 지휘하는 영국 올림픽 축구대표팀은 잉글랜드와 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의 아마추어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비 브라운이라는 친구를 조심해야 한답니다. 바넷이라는 아마추어 클럽에서 뛰는 공격수인데, 굉장히 빠르고 축구 지능도 뛰어나대요.”
“영국에는 바비라는 선수가 참 많은 것 같군. 그밖에 주의할 선수는?”
“패티 헤이스트, 짐 루이스가 있습니다. 짐 루이스는 아마추어 계약으로 첼시에서도 뛴 적이 있는 백전노장이에요.”
이탈리아와 브라질 올림픽 팀에 대한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없었다.
일단 주요 선수 명단만 확보했는데, 준영은 주전급 선수들 중에서 낯익은 이름들을 보았다.
‘조반니 트라파토니? AC 밀란 레전드 수비수에 이탈리아 역대급 명장이잖아. 거기다 볼로냐의 레전드 미드필더 자코모 불가렐리까지…….’
브라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황금의 왼발 제르송.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전승 우승을 거둔 최강 브라질 대표팀을 이끌었던 플레이메이커가 떡하니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근데 죄다 프로팀 소속이잖아. 올림픽은 아마추어만 출전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나?’
아마추어 계약이면 아마추어라는데, 그야말로 코에 달면 코걸이, 귀에 달면 귀걸이 짝이 아닌가.
아무튼 준영의 심각한 표정을 본 한국 대표팀 관계자들은 새삼 상대가 만만찮다는 걸 깨달았다.
“일단 이탈리아나 브라질 축구 스타일을 봤으면 하네만?”
위혜덕 감독의 요청에 준영은 맨유 전력 분석팀이 가지고 있는 리버풀 경기 영상을 보여 주었다.
“저기 공을 잡은 친구가 리버풀의 주전 공격수 펠레입니다. 브라질 선수인데 월드컵에서 신인상을 받았죠.”
“아, 펠레!”
“준영 아우를 이긴 적이 있다는 선수지?”
펠레의 이름은 한국에서도 알려져 있었다.
이번 시즌 이준영이 있는 맨유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으니까.
거기다 준영과 맞붙는 경기 영상이 극장에서 방영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 대표팀이 봤던 것은 빙산의 일각.
맨유 전력 분석팀이 알뜰하게 모아서 정리한 펠레의 경기 영상을 본 대표팀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저게 진짜 사람이야?”
“저기서 어떻게 공을 저렇게 다룰 수가 있는 건지…….”
삼바 축구, 그 최강 공격수의 진면목을 본 한국 선수들은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
정말 저런 실력자와 상대한다면 막을 수 있을지?
필름이 다 돌아가고 다들 침묵에 잠겨 있을 때, 함흥철이 일말의 희망을 품고서 준영에게 물음을 건넸다.
“저 친구는 그래도 프로잖아. 브라질 아마추어 선수들은 저 정도는 아닐 거야. 그렇지 않아?”
“확실히 펠레는 초일류 선수죠. 그러나 브라질 아마추어 선수들의 기량도 절대 무시할 수준이 아닙니다.”
21세기에도 브라질 2, 3부 리그 선수들이 K리그를 휩쓸고 다닐 정도다.
이 시절이라고 다르겠는가.
격차가 심하면 심했지, 좁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아마추어를 빙자한 프로라면 더더욱.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죠, 그렇죠?”
“포기할 거면 지금 당장 짐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야지.”
최정민이 결연한 표정으로 내뱉은 말에 다른 선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벅찬 상대지만 그래도 피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결의를 다진 그들에게 준영은 한 가지 선물(?)을 해 주기로 했다.
***
1. 이창훈 선수는 손기정 옹의 사위라고 합니다. 1958년 도쿄 아시안게임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셨지요.
2. 2002년 이탈리아 감독을 맡았던 조반니 트라파토니는 현역 시절 맨 마킹이 뛰어나고, 상당히 지능적인 수비 조율과 패스를 잘했다고 합니다.
1963년에 펠레와도 산시로 경기장에서 맞붙은 적이 있는데, 이때 브라질을 상대로 3-0으로 이겼고, 트라파토니가 펠레를 완전 봉쇄했습니다.
다만 그 경기에 펠레는 복통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부득이하게 출전했기에 제 실력을 발휘하진 못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