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90. 붉은 악마 vs 독수리 군단
1960년 5월의 셋째 주 수요일 저녁.
유럽 축구 팬들이 집이나 카페 등 TV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자그마한 브라운관에는 무려 12만 7천여 명의 관중이 꽉 들어찬 글래스고 햄던 파크의 전경이 비춰지고 있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수많은 열전이 펼쳐졌던 1959-60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전이 잠시 후 시작됩니다.」
잉글랜드의 붉은 악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3연패를 이뤄 낼 것인가.
아니면 서독의 독수리 군단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가 새로운 제왕으로 날아오를 것인가.
대다수 유럽 축구 팬들에겐 그저 흥밋거리에 불과하지만, 영국과 독일 축구 팬들은 그렇지 않았다.
과거 전쟁의 앙금도 지워지지 않았던 터라, 그야말로 국가의 자존심이 걸린 한판 승부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건 공정하지 못해. 결승전이라면 중립 지역에서 해야지, 영국 땅에서 하면 어쩌자는 거야.”
“바보야, 저긴 스코틀랜드야. 잉글랜드하곤 사이가 나쁜 동네라고.”
“그래도 같은 연합 왕국이잖아.”
독일 축구 팬들은 이 결승전이 탐탁지 않았다.
상대가 영국 팀, 거기다 이준영이 있는 팀이라 더욱 거슬렸다.
이준영은 지난 스웨덴 월드컵에서 서독을 준결승에서 탈락시켰다.
거기다 경기 전에는 푸스카스가 터트린 서독 팀 도핑 의혹을 들먹여 독일 축구계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제발 부탁이다. 저 붉은 악마 놈들과 키 큰 원숭이 놈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 줘!”
“힘내라, 독수리들!”
독일 축구 팬들이 염원을 모으는 가운데, 필드로 양 팀 선수들이 입장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GK:해리 그렉
DF:던컨 에드워즈, 빌리 맥닐, 빌 포크스, 레이 윌슨
MF:짐 박스터, 이준영(주장)
FW:알렉스 퍼거슨, 바비 찰튼, 숀 코너리, 데니스 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GK:에곤 로이
DF:프리델 루츠, 헤르만 후퍼, 한스 발터 아이겐브로트
MF:한스 바일베커(주장), 디터 스틴카
FW:리하르트 크레스, 디터 린드너, 에르빈 스타인, 알프레드 파프, 에리히 마이어
「이번 경기 유나이티드는 스코틀랜드 선수들을 많이 기용했습니다. 잉글랜드 선수들은 겨우 4명밖에 되지 않네요.」
이와 달리 프랑크푸르트는 전원 독일 선수들로 구성되었다.
서로 악수를 나눈 양 팀은 기념 촬영을 한 후, 진영을 선택하고 포메이션에 맞춰 포진했다.
그리고 오후 7시 30분.
시합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길게 울렸다.
“Go! Go! Alex!”
“하이랜드 사나이의 용맹을 보여 줘!”
경기 초반 알렉스 퍼거슨이 공을 잡자 관중석에서 커다란 환호성과 응원이 쏟아졌다.
고향 사람들의 응원에 힘이 불끈 솟구친 알렉스는 힘차게 측면을 돌파, 과감하게 박스로 파고들어 슈팅을 날렸다.
아쉽게도 골대 옆으로 빗나가긴 했지만, 기선을 제압하기엔 손색이 없었다.
“잘했어. 계속 과감하게 해!”
오늘은 하프백 포지션을 맡은 준영은 미드필드에서 선수들을 독려하며 부지런히 경기를 조율했다.
준영이 다소 수비적으로 움직였다면, 패스를 공급하며 공격에 힘을 실은 건 짐 박스터.
그는 1선과 2선을 넘나드는 바비 찰튼과 여러 차례 좋은 기회를 만들었다.
「짐 박스터가 바비 찰튼에게 패스, 끌고 가다 데니스 로에게 패스가 들어갑니다. 데니스! 데니스! 아… 아깝습니다.」
데니스는 상대 수비수 아이겐브로트를 제쳤지만 마지막 순간에 골키퍼 에곤 로이에게 공을 빼앗겼다.
득점을 기대했던 관중의 아쉬운 탄식이 경기장에 메아리쳤다.
‘선수들 기량은 대단치 않지만, 조직력은 꽤 좋아 보이는군.’
마치 군대같이 척척 움직이며 맨유의 공격을 막는 프랑크푸르트 선수들.
그들은 전형적인 독일식 규율 축구의 스타일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 팀에 나중에 차붐이 뛰는데……. 내가 바꾼 역사에서도 그리될까?’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스트라이커 차범곤.
차붐이라는 별명으로 유럽을 주름잡은 그의 영향으로 한국은 이후 피지컬과 규율을 중시하는 독일식 축구를 접목하게 된다.
‘뭐, 애초부터 군대나 정보기관 등 규율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축구팀이 운영되다 보니 거리낌 없이 도입된 거지만.’
21세기에 창의성과 기술을 중시하는 보다 선진적인 축구가 도입된 후에도 이런 스타일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준영이 주장으로서 술, 담배를 비롯해 선수들에게 해로운 요소들을 제재하고 철저히 훈련에 집중시키는 것도 이런 영향 때문이었다.
‘근데 차붐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지금쯤 한 7, 8살 정도 되었을 텐데…….’
“주장! 옆을 조심해요!”
준영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프랑크푸르트의 주장 바일베커가 태클을 날렸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던 준영은 드래그 백으로 태클을 피해 내고 센터 라인을 넘어갔다.
「존 Y. 리가 치고 올라갑니다. 좌우를 살펴보다 알렉스 쪽으로 패스, 알렉스가 절묘하게 수비수를 제쳐 냅니다!」
준영이 찔러 준 패스를 발등으로 살짝 띄워 박스 쪽으로 넘긴 알렉스는 그대로 돌아서 들어갔다.
다급했던 수비수 프리델 루츠가 그의 유니폼을 잡아챘다.
하지만 알렉스는 쓰러지면서도 떨어지는 공에 발을 댔고, 이 슈팅은 에곤 로이 골키퍼의 손을 스치며 골대 안으로 떨어졌다.
“들어갔다! 골이라고!”
“글래스고의 아들이 선제골을 터트렸어!”
전반 18분에 터진 맨유의 선제골.
골 셀레브레이션을 펼치는 알렉스가 웃통을 벗고, 푸른 성 안드레아 십자기를 보였다.
내 안에 스코틀랜드가 있다!
준영이 종종 하는 방식으로 세리머니를 펼치자, 관중들은 더욱 크게 환호성을 터트렸다.
「정말 기가 막힌 골! 프랑크푸르트 선수들은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인데요.」
열광하는 관중들의 분위기에 맨유 선수들도 덩달아 들떴다.
“자자, 다시 수비!”
준영은 방학을 맞은 초딩들처럼 방방 뛰는 선수들을 진정시켰다.
이제 경기 초반이고, 상대가 어떤 식으로 반격해 올지 모르니까.
***
선제골을 얻어맞고 잠시 주춤하던 프랑크푸르트는 이후 적극적인 공세로 나왔다.
반격의 선봉장은 35살의 노장 리하르트 크레스.
그는 좌측면을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맨유 수비를 흔들어 댔다.
3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빠르고 노련한 몸놀림에 레이 윌슨은 고전했고, 몇 차례 박스 쪽으로 들어가는 패스를 허용하고 말았다.
다행히 맥닐과 빌 포크스가 이를 죄다 막아 냈다.
「크레스가 또 한 번 좌측면으로 들어옵니다. 레이 윌슨을 따돌리고 크로스!」
박스 중앙으로 떨어지는 공을 향해 맨유 수비수들과 프랑크푸르트 공격수들이 뛰어올랐다.
하지만 꽤 깊숙이 날아온 크로스는 그들의 머리를 지나 땅에 떨어졌다.
그런데…….
‘이런, 공에 스핀이 걸렸잖아!’
깜짝 놀란 골키퍼 해리 그렉은 황급히 몸을 날렸다.
골대를 지나가기를 바랐지만, 매정하게도 공은 골포스트를 맞힌 후 골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골! 골인! 수차례 두들기던 프랑크푸르트가 유나이티드 골문을 열어젖혔습니다!」
전반이 절반 넘게 흘러간 시점에 터진 동점 골.
서독에서 원정을 온 소수의 프랑크푸르트 팬들, 그리고 영국에 사는 독일인들은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해낼 줄 알았다고!”
“Kreß! Kreß! Kreß!”
상대는 유러피언 컵 2연패 챔피언.
선제골까지 허용해서 이대로 계속 숨죽이고 경기를 봐야 하나 생각하던 때 나온 동점 골.
독일인들의 마음속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무럭무럭 부풀어 올랐다.
“괜찮아! 침착하게 하자! 골은 얼마든지 넣을 수 있어!”
준영은 팀이 동요하지 않도록 재빨리 수습에 나섰다.
일단 동점 골로 분위기가 오른 프랑크푸르트를 눌러 놓아야 한다.
그를 위해서 리하르트 크레스를 묶어 놓을 필요가 있었고, 준영은 곧장 윌슨을 도와 견제에 들어갔다.
그렇게 준영이 측면을 신경 쓰면서 생긴 중앙의 빈자리는 바비 찰튼이 내려와서 메웠다.
“다들 정신 바싹 차려!”
“크라우트 놈들이 설치게 내버려 둬선 안 돼!”
서둘러 전열을 수습한 덕분일까.
아니면 동점 골을 얻으면서 프랑크푸르트가 느슨해진 탓일까.
던컨의 패스를 받은 데니스 로가 우측면을 헤집는데도 프랑크푸르트 선수들은 강하게 차단하지 못했다.
수비의 빈틈을 비집고 파고든 데니스는 중앙에 있는 숀 코너리 쪽으로 컷백을 보냈다.
“막아! 공을 잡게 둬선 안 돼!”
헤르만 후퍼와 프리델 루츠가 숀에게 바싹 붙었다.
숀은 자신에게 붙은 수비수들을 끌고 그냥 공이 흘러가게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그 공을 잡은 알렉스가 논스톱 슈팅으로 골대를 흔들었다.
“우와아아아-!”
프랑크푸르트의 동점 골로 뒤숭숭해졌던 관중석에서 다시 우레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정말 놀랍습니다. 동점 골이 터진 지 5분도 되지 않았는데 유나이티드가 다시 앞서 나가는군요. 프랑크푸르트가 다시 추격을 할 수 있을까요?」
중계 캐스터와 같은 흥미를 가진 관중과 기자들의 시선이 연방 공을 좇았다.
재차 공세를 펼치는 프랑크푸르트를 상대로 준영과 맨유 선수들은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상대의 패스를 잘라 냈다.
“저걸 보니 지난 전쟁 때 항공전이 생각나는군.”
“본토에 독일 폭격기들이 대거 날아왔을 때 말이죠?”
“응. 쫓고 쫓기고, 공격하면 틀어막는 모양새가 어째 비슷해.”
정말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프랑크푸르트의 날카로운 중거리 슛이 맨유 골대를 살짝 넘어간다 싶더니, 잠시 후에는 던컨 에드워즈가 과감한 오버래핑으로 상대 수비진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어진 코너킥에서 숀 코너리의 결정적인 헤딩슛이 에곤 로이의 선방에 튕겨 나왔고, 이어진 역습 상황에서 에르빈 스타인이 날린 슈팅이 해리 그렉의 품에 안겼다.
이렇게 쉴 새 없이 이어진 공방은 전반이 끝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전반전 정규 시간은 끝났지만, 심판이 추가 시간을 조금 줄 모양입니다. 전반 마지막 공격을 펼치는 유나이티드, 짐 박스터가 공을 몰고 들어갑니다.」
박스 가까이 들어간 짐 박스터는 숀 코너리에게 패스를 찔러 주었다.
헤르만 후퍼가 돌아서지 못하게 완강히 가로막는 가운데, 좌우로 몸을 흔들며 돌파를 시도하던 숀이 옆으로 패스를 건넸다.
“아앗!”
아이겐브로트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간 공은 때맞춰 문전에 들어온 데니스 로의 발에 걸렸다.
침착하게 슈팅 자세를 잡은 데니스는 상단 구석을 노리고 공을 찼다.
그물을 좍 긁는 소음과 함께 또다시 햄던 파크가 크게 요동쳤다.
「유나이티드의 추가 골! 애버딘이 낳은 천재 데니스가 독수리 군단에게 결정타를 날립니다!」
이건 정말 큰 일격.
전반을 1점 차로 끝내려 했던 프랑크푸르트에게 묵직한 부담감을 안겨 버린 거니까.
“저 녀석, 진짜 잘하는군.”
준영을 응원하기 위해 에딘버러에서 찾아온 차태성은 방금 전 데니스 로의 골에 혀를 내둘렀다.
그 골을 보고 있자니, 지난번 전지훈련 마지막에 맨유에게 시원하게 털렸던 일이 생각났다.
그 경기에서도 데니스 로가 골을 넣었는데, 그 움직임은 쉽사리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날카로웠다.
‘아무래도 승부는 결정 난 것 같군.’
아직 후반전이 남아 있지만, 프랑크푸르트가 경기를 뒤집기는 힘들어 보였다.
***
리하르트 크레스는 실제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선제골을 넣었습니다. 그것도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요.
번개(Blitz)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발이 빠른 선수였다고 전해집니다.
독일 국가대표로도 9경기 뛰며 칠레 월드컵에 출전했고, 1964년 39살 때 은퇴했습니다.
참고로 그가 은퇴하기 직전인 1963-64 시즌에 독일 분데스리가가 시작했는데, 그 덕에 가장 고령(…)에 분데스리가에 데뷔한 선수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