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88화 (288/400)

Round 288.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칙쇼! 머저리 같은 놈들! 수비를 저따위로 하다니!”

분통이 터졌던 가와구치는 연방 일본어로 투덜거렸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실점.

그 자책골 때문에 경기 분위기는 완전히 맨유에게로 기울었다.

맥이 빠진 건 둘째 치고, 또 같은 실수를 저지를까 싶어 공을 마구잡이로 걷어 내면서 공격진에 제대로 패스가 전달되지 않았다.

당연히 중간에 차단당한 패스는 맨유에게 공격 기회를 제공했다.

‘빌어먹을 귀축 놈들! 평소에 주전이랍시고 꼴사납게 으스대더니……. 대체 제대로 하는 게 뭐야!’

이렇게 마냥 화를 낸다고 될 일도 아닌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손에 칼이라도 들려 있었으면 당장이라도 멍청한 수비수 놈들과 리준욘을 토막 쳐 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이를 빠득 갈던 가와부치 쪽으로 공이 굴러왔다.

클레이튼이 전방으로 보낸 롱 패스를 이준영과 데릭 더건이 경합하다 흘러나온 것이다.

‘기회!’

눈을 번득인 가와부치는 황급히 공을 잡아채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던컨이 공을 가져가 버렸다.

“てめえ!”

금세 짜증이 솟구쳐 오른 가와부치가 무섭게 던컨을 쫓아갔다.

잉글랜드의 천재 플레이어이자, 지난해 발롱도르 수상자 던컨 에드워즈.

하지만 가와부치에게는 빌어먹을 조센징의 동료일 뿐.

‘더구나 저놈은 지난번 내가 부상을 당했을 때 아픈 팔을 잡아당기기도 했었지!’

전혀 고의가 아니었지만, 가와부치 입장에서 던컨은 썩을 놈에 지나지 않았다.

‘뒈져!’

드디어 따라잡는 데 성공한 가와부치는 던컨에게 백태클을 날렸다!

“악!”

동료에게 패스를 건네고 돌아서던 중에 걷어차인 던컨.

그가 심하게 나동그라지자, 관중석에서 비명과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든 말든 가와부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공을 가져갔다.

하지만 준영이 황급히 달려와서는 그를 몸통으로 들이받았다.

“이런 개자식!”

“커억!”

잔디 위를 구른 가와부치가 와락 인상을 구기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준영 역시 곧장 손찌검을 할 기세로 다가왔다.

그렇게 둘이 치고받으려는 찰나, 양 팀 선수들이 달려와 둘을 떼어 놓았다.

“야 인마! 여기가 필드인 걸 다행으로 알아. 아니면 넌 내 손에 맞아 죽었어.”

“흥, 역시 조센징들은 입만 살았다니까.”

“뭐가 어째?”

두 사람의 다툼은 양 팀 선수들 간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맨유 선수들은 저 일본인이 잘못했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블랙번 선수들은 경기하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두둔했다.

물론 블랙번 선수들도 자신들의 주장이 설득력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젠장, 가와부치 자식! 이런 쓸데없는 사고를 치다니!’

‘어쨌거나 퇴장은 막아야 해.’

그러나 블랙번 측의 바람은 이뤄질 것 같지 않았다.

관중들이 블랙번과 가와부치를 향해 거센 야유를 터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 우!”

“이 망할 쪽바리 자식이 누구에게 태클을 하는 거야!”

“그것도 비겁하게 뒤에서 갈기다니!”

감히 잉글랜드 축구의 보물을 건드리다니!

더구나 던컨은 비행기 사고로 양다리 골절 부상을 당한 적이 있다.

그런데 대놓고 백태클로 걷어찼으니, 준영과 축구 팬들이 폭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심판이 대치 중인 양 팀 선수들을 만류하고 있습니다. 여왕 폐하께서도 지켜보시는데 진정해 줬으면 합니다.」

캐스터의 말에 맞춰 TV 중계 카메라가 귀빈석의 여왕을 비췄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여왕의 눈에 절룩거리며 일어나는 던컨과 심판 앞으로 불려 간 준영과 가와부치의 모습이 들어왔다.

프레드로 일가도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혹시 둘 다 퇴장당하는 걸까?”

“오빠는 잘못한 게 없어! 다 저 빡빡이 때문이라고!”

“그래도 달려들었으니…….”

다행히 동시 퇴장당하는 일은 없었다.

심판은 준영에게 구두 경고를 하는 선에서 그쳤다.

“어전(御前)에서 진행되는 경기야. 두 번째는 봐주지 않을 테니까 명심하라고.”

“실례했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준영을 뒤로하고 심판은 가와부치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블랙번 로버스 7번 가와부치 사부로, 퇴장.”

“뭐? 왜 나만 퇴장이야!”

발끈한 가와부치는 심판에게 침을 튀기며 언성을 높였다.

“저 조센징 놈도 날 대놓고 들이받았다고! 근데 왜 나만…….”

“공이 있을 때 파울을 한 것과 없을 때 한 것이 같을 거라 생각하나!”

확실히 준영이 들이받았을 때, 일단 가와부치의 발밑엔 공이 있었다.

하지만 던컨이 백태클을 당한 상황에선 이미 공이 떠나고 없었다.

“공이 무슨 상관이야! 저 조센징도 보복을 한 건 맞잖아! 저놈도 퇴장시켜!”

“그만해, 가와부치!”

공 문제를 접더라도 파울 수위는 가와부치의 백태클이 훨씬 위험하고 악랄했다.

대세를 거스를 수 없음을 알게 된 블랙번의 주장 클레이튼은 가와부치를 필드 밖으로 내보내려 했다.

안 나간다고 완강히 버티던 가와부치는 결국 경기장 용역들에게 끌려 나갔다.

그런 그에게 관중들의 야유와 비난이 쏟아졌다.

“뭘 잘했다고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어!”

“저런 놈은 아예 영국에서 쫓아내 버려야 해!”

성난 관중들의 분위기에 가와부치를 응원하러 왔던 일본인들은 슬그머니 일장기를 내리거나 자리를 떴다.

그렇게 소란이 대강 진정된 후, 경기가 다시 진행되었다.

그사이 맨유의 팀 닥터가 터치라인 밖으로 나온 던컨의 상태를 살폈다.

그런데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나쁜 거예요? 혹시 뼈라도 부러진 건가요?”

“그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야. 하지만 오늘 경기는 뛰지 않는 게 좋아.”

“그런… 아직 전반전도 끝나지 않았는데…….”

“나중을 생각해야지! 더 나빠지면 어쩔 건가? 유러피언 컵 결승전도 남아 있다고!”

“이 경기도 중요해요!”

“그래도 안 돼!”

이렇게 던컨은 부상으로 아웃.

머피 코치는 서둘러 선수들에게 사인을 보내 위치를 조정했다.

바쁘게 대응하는 건 블랙번 측도 마찬가지.

머릿수는 10 대 10으로 양 팀 모두 같았지만, 우측면의 핵심 플레이어인 던컨이 빠진 맨유 쪽이 더 손해라 할 만했다.

“바비, 너랑 나랑 던컨의 공백을 메워야 해.”

“걱정 마요, 주장. 내가 잘하는 게 뭔지 알잖아.”

바비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활동량이나 지구력에 있어서는 준영이나 던컨 못지않았으니까.

더구나 다른 강팀이라면 모를까, 블랙번이라면 충분히 막아 낼 자신이 있었다.

“좋아. 반드시 해내자, 대회 3연패를!”

1871-72 시즌부터 시작된 FA컵에서 3년 연속 우승을 거둔 팀은 둘뿐이다.

현재는 해체된 아마추어 팀 원더러스 FC와 지금 맞붙고 있는 블랙번 로버스.

그것도 다 초창기인 19세기의 기록이다.

20세기에는 아직 3연패를 한 팀이 없다.

그 역사를 만들기 위해 준영과 맨유 선수들은 다시 부지런히 필드 위를 내달렸다.

***

“젠장, 왜 나만……! 빌어먹을 귀축 것들!”

가와부치는 쉬이 분통을 참지 못했다.

전반전이 끝난 후, 그는 감독과 코치에게 호되게 질책을 들었다.

동료들의 싸늘한 시선은 덤.

정말이지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렸다.

자신을 성원하던 일본 국민들도 크게 실망했을 게 틀림없다.

‘차라리 태클을 날릴 거면 리준욘 그놈의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렸어야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던컨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진 못했다.

그놈이 공을 가로채 가지 않았다면 태클을 당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물론 이런 주장은 누구의 동의도 얻지 못한다.

하지만 마법의 약에 절어 버린 가와부치의 뇌는 정상적인 판단을 하는 게 어려워졌다.

작은 일에도 발끈하고 감정적으로 대응하게 되었다.

오늘 사고가 난 것도 다 그 때문이다.

「골! 캡틴 리의 강력한 중거리 슛이 블랙번의 골대에 작렬! 유나이티드가 2 대 0으로 앞서갑니다!」

“젠장!”

중계를 듣고 있던 가와부치는 홧김에 라디오를 걷어차 버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나마 팀이 잘해서 리준욘의 콧대를 눌러 주길 바랐건만!

정말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이제 남은 건 그 방법뿐이군. 제대로 해냈는지 궁금한데…….’

“어이, 가와부치!”

마침 궁금하게 여기고 있을 때, 가와부치에게로 일련의 일본인들이 찾아왔다.

웸블리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청소부로 위장한 그들은 가와부치가 나온 와세다 대학 출신의 유학생들이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게… 실패했어.”

잔뜩 기대감을 품은 가와부치는 실망감에 인상을 찡그렸다.

“유나이티드 라커룸 앞에 요짐보 같은 놈들이 지키고 있더라고. 청소하러 들어가는 거라고 했는데도, 경기 끝난 다음에 하라는 거야.”

억양이 좀 이상한 그 사내들은 덩치나 위압감이 남달랐다.

결국 주눅이 든 유학생들은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가와부치가 부탁했던, 암페타민을 리준욘의 소지품에 몰래 집어넣는 일은 무산되었다.

“쳇, 경비가 있었다니!”

“다음으로 미루는 게 어때? 아무래도 급하게 일을 꾸미다 보니 제대로 될 리가…….”

“안 돼! 반드시 오늘 성공해야 돼요!”

영국 여왕이 지켜보는 결승전에서 리준욘의 도핑 의혹이 터져 보라.

그 파문이 얼마나 크겠는가.

그래서 가와부치가 고집했지만, 당장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아니, 있어!’

또 다른 방법이 떠오른 가와부치가 유학생들에게 말했다.

“주차장에 가면 유나이티드 놈들이 타고 온 버스가 있을 겁니다.”

“아, 그럼 그 버스에……. 근데 그냥 버스에 두면 리준욘이 복용했는지 누가 알아? 다른 선수의 짓이라고 볼 수도 있잖아.”

그 반박을 예상했다는 듯 가와부치는 자신 있는 웃음을 지었다.

“언론은 분명히 리준욘의 짓으로 몰 겁니다. 왜냐하면 영국 선수가 부정한 짓을 했다고 인정하기 싫을 테니까.”

그러니 만만한 외국인인 리준욘을 원흉으로 몰 것이다.

더구나 유명 인사인 만큼 논란 역시 클 테니 찌라시 기사를 작성하는 하이에나들은 좋은 먹잇감으로 여길 터.

“요리는 그자들이 알아서 할 겁니다. 선배님들은 그냥 물건을 몰래 차 안에 밀어 넣고, 전화로 신고하면 되는 겁니다.”

“과연!”

그럴듯하다 여긴 유학생들은 곧장 주차장으로 가서 맨유 구단 버스를 찾았다.

덩그러니 놓인 구단 버스에 다가간 그들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문이 잠겨 있는데?”

“아, 이쪽에 창문이 조금 열려 있어.”

유학생들은 열려진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그들이 버스 안으로 들어간다고 바동대고 있을 때, 양복 입은 사내들이 나타났다.

“당신들,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어, 그게…….”

“남의 구단 버스를 청소해 주려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유학생들이 맞닥뜨린 사람은 준영의 경호원인 로베르트와 그 부하들이었다.

일전에 준영이 극우 집단에게 테러를 당할 뻔한 적이 있었기에 로베르트는 경호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상한 놈들이 버스 주변에 나타나자 증거 사진을 찍기 무섭게 들이닥친 것.

“설마 폭탄이라도 설치하려 했나?”

“아, 아니, 폭탄은 아닌데…….”

“젠장, 튀어!”

유학생들은 버스 창문에 낀 친구를 내버려 두고 도망쳤다.

하지만 학생의 몸놀림으론 전직 폴란드 공수부대원들을 뿌리칠 수 없었다.

결국 얼마 도망치지도 못하고 죄다 잡히고 말았다.

“확실히 폭탄은 아니구만. 폭탄만큼 위험하긴 하지만 말이야.”

로베르트는 유학생들이 버스 안으로 반입하려 했던 암페타민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곧장 경찰에 신고했다.

자세한 정황은 모르겠지만,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

원더러스 FC는 초대 FA컵 우승 팀으로, 런던 교외의 월섬 포레스트라는 지역에서 창단되었습니다.

풋볼 리그 초창기에 FA컵에서 다섯 번 우승할 정도로 명성을 날린 팀인데, 점점 더 많은 축구팀들이 생겨나면서 쇠퇴, 1887년에 해체되었습니다.

그러다 2009년에 원더러스에서 뛴 선수들의 후손들이 모여 재창단을 했다고 하네요.

참고로 이름이 비슷한 울버햄프턴 원더러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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