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87. 구겨진 낯짝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결승전 중계 캐스터를 맡게 된 BBC의 케네스 울스텐홈입니다…….」
보통 때와 달리 웸블리에 TV 방송 카메라들이 들어서 결승전을 실시간 생방송으로 중계하기 시작했다.
사실 FA컵 결승전 중계가 오늘이 처음은 아니다.
결승전 첫 중계는 1938년에 했을 정도로 제법 오래되었다.
하지만 이번 시즌 중계는 남달랐다.
다음 시즌부터 풋볼 리그 전 경기를 중계하기로 결정되었기 때문.
이 중계권을 ITV가 15만 파운드에 따냈다.
ITV와의 경쟁에서 패한 BBC는 FA컵과 국가대표 경기 중계로 자사의 노하우가 더 뛰어나다는 걸 보여 주고자 했다.
오늘 경기 중계도 그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리그 우승은 놓쳤지만, 유러피언 컵 3연패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이에 맞서는 블랙번 로버스, 과연 30여 년 만에 다시 FA컵을 들어 올릴 수 있을까요?」
리그 성적은 맨유가 2위, 블랙번은 17위로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하지만 축구공은 둥글고, 토너먼트 단판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더구나 블랙번은 준결승에서 펠레가 있는 리버풀에 2 대 1로 역전승을 거두며 세간을 놀라게 했다.
“브라질 꼬마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줬으니 이번에는 키 큰 한국 놈 차례다.”
“할 수 있어! 유나이티드를 작살내자고!”
경기 시작 전, 둥글게 모여 전의를 불태우는 블랙번 선수들 중에 머리를 빡빡 민 동양인 선수가 있었다.
바로 일본 출신인 가와부치 사부로.
마법(?)의 약 덕분에 훈련에서 두각을 드러낸 그는 오늘 경기 7번을 달고 출전했다.
“리준욘은 내가 쓰러트린다!”
가와부치의 호언장담에 동료 선수들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어, 그래. 열심히 해 봐.”
“이번에는 실려 나가지 말라고.”
예전에 가와부치가 이준영과 경합하다 쇄골이 부러지는 것을 보았던 블랙번 선수들은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와부치는 이번에야말로 이준영을 해치울 수 있다고 믿었다.
마법의 약도 먹은 데다, 따로 덫도 준비되고 있었으니까.
‘후후후, 넌 끝장이다, 리준욘!’
가와부치가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을 때, 준영도 동료 선수들과 선전을 다짐하고 있었다.
“자, 리그 우승 놓친 건 잊고 더블로 가자고. 우리가 어떤 팀인지 스스로 잘 알고 있겠지?”
“We are the Champions!”
“그래, 우리가 유럽, 아니 세계 최강이다. 녀석들이 걸친 유니폼 색깔대로 하얗고 파랗게 질리게 해 주자!”
“Aye Aye, Sir!”
상대는 이번 시즌 우승 팀인 리버풀을 상대로 역전승을 거두고 결승에 올랐다.
그러니 방심은 절대 금물.
기어오를 틈을 주지 않고 초반부터 납작하게 눌러 줄 필요가 있었다.
***
삐익-!
오후 3시 정각이 되자 심판이 킥오프를 알리는 휘슬을 불었다.
반은 하얗고 반은 청색인 유니폼을 걸친 블랙번 선수들은 초반부터 활발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공격수들 역시 적극적으로 맨유 선수들에게 달려들며 인터셉트를 시도했다.
‘어쭈, 이것들이 압박을 하네.’
‘우리 플레이를 연구한 건가? 그 정도로 밀어붙일 체력이 되나?’
브라이언 더글러스, 앨리 맥레오드, 데릭 더건, 가와부치 사부로.
블랙번의 이 4명의 공격수들 중 가장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건 가와부치였다.
그는 바비 찰튼 쪽으로 전달되는 패스를 끊어 내고 곧장 맨유 문전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블랙번의 사무라이가 유나이티드 박스로 들어왔습니다. 던컨이 어깨로 밀어 보지만 밀리지 않고 슛-! …아쉽게 골대를 넘어갑니다.」
일본도만큼이나 날카로운 슈팅에 관중석에서 아쉬움과 안도의 탄성이 오갔다.
가장 아쉬워한 것은 일본 관중들이었다. ‘おしい’를 연발하던 그들은 이내 가와부치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한편 던컨은 자신의 마크를 이겨 내고 슈팅을 날린 가와부치를 다시 보게 되었다.
‘존에게 한 방에 나가떨어지던 녀석이었는데……. 실력이 많이 늘었군.’
‘쳇, 방해하지 마. 내 상대는 조센징 리준욘이란 말이다.’
이렇게 집착하는 가와부치와 달리, 준영은 그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저 스시 놈, 용케 블랙번에 자릴 잡았군.’
이 정도 반응만 보였던 준영은 데릭 더건 쪽에 더 신경을 썼다.
북아일랜드 출신의 데릭 더건은 자신과 공중전에서 맞설 수 있을 수준의 190대 장신 공격수였기 때문.
‘단순히 키만 큰 게 아니야. 스피드도 있고, 파워도 뛰어나.’
왼발 슈팅도 일품이지만, 주특기는 헤딩슛.
일단 크로스가 그의 머리에 닿으면 8할은 득점으로 연결될 정도였다.
준결승에서도 헤딩슛 두 방으로 리버풀을 격침시켰다.
‘하지만 그보다 뛰어난 점은 따로 있어.’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측면에서 블랙번의 크로스가 올라왔다.
더건이 움직이자, 준영은 재빨리 그를 쫓아가다 도중에 멈칫했다.
‘잠깐, 낙하지점하고 좀 먼데.’
그 생각이 스친 순간, 떨어지는 공을 향해 더글러스가 달려들었다.
황급히 뛰어오른 준영은 재빨리 공을 끊어 냈다.
그러자 더건은 아쉬운 듯 발을 굴렀다.
‘저 녀석, 일부러 날 유인하려고 한 거군. 전력 분석팀 얘기대로 교활한 구석이 있어.’
패스는 별로지만, 문전에서 수비수를 유인하거나 속여 넘기는 능력은 뛰어나다고 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다들 정신 차려. 위기는 끝나지 않았어!”
골키퍼 해리 그렉의 외침에 준영과 맨유 수비수들은 일제히 공과 상대 공격수들을 쫓았다.
공을 갖고 있던 앨리 맥레오드는 재빨리 좌우를 주시하다 문전으로 파고드는 가와부치 쪽으로 패스를 찔러 주었다.
공을 받은 가와부치는 한차례 트래핑 후 강하게 슈팅을 날렸다.
해리의 손을 스친 슈팅이 그물을 크게 흔들자, 일본인 관중들이 일제히 벌떡 일어났다.
“해냈어! 가와부치가 해냈다!”
“万歳! 万歳!”
하지만 흥분과 환희는 오래가지 못했다.
선심이 깃발을 들었고, 주심 역시 이를 받아들여 오프사이드로 판정했기 때문.
“오프사이드라니, 어째서?”
“더글러스란 놈이 상대 수비보다 앞에 있었기 때문인가 봐.”
“칙쇼! 저 멍청한 자식 때문에 가와부치의 골이……!”
일본 관중들보다 더 아쉬운 건 가와부치 본인이었다.
더글러스가 자기 위치를 미리 파악하고 잽싸게 물러났으면 골이 무산되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도 조짐은 좋군. 잘하면 리준욘의 낯짝을 구겨 줄 수 있겠어.’
그리고 그렇게 구겨진 낯짝은 경기가 끝나고 더 일그러지리라.
경기 종료 후에 벌어질 빅 이벤트를 기대하며 가와부치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
“저 쪽바리(Jap) 자식, 왜 저리 히죽거려? 우리가 만만해 보이나?”
“그럼 겁먹게 해 줘야지.”
전반 초반 블랙번의 맹공을 잘 막아 낸 맨유는 침착하게 볼 점유율을 늘리며 블랙번 진영으로 전진해 들어갔다.
블랙번은 공격수들까지 잽싸게 후방으로 내려와 빽빽한 두 줄 수비로 맨유의 공격에 맞섰다.
그들은 마치 오늘 이후로 뛰지 않을 것처럼 활발하게 뛰어다니며 과감하게 부딪쳤다.
그러다 보니 중앙에 있던 브라이언 클러프나 데니스 바이올렛은 이렇다 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특히 발목 부상에서 회복된 지 얼마 안 된 데니스는 블랙번 수비수들의 거친 수비에 상당히 고전했다.
‘중앙의 공격수들이 봉쇄당했으니 외곽 슛을 노려야겠군.’
공을 잡은 알버트 스캔론이 과감하게 중거리 슛을 날렸다.
하지만 그 슈팅은 블랙번의 주장 로니 클레이튼이 몸을 날리는 바람에 저지당했다.
튕겨 나온 볼을 바비 찰튼이 잡아채 재차 슛을 날렸지만, 이번에는 믹 맥그래스의 육탄 방어에 막혔다.
「유나이티드가 부지런히 골을 노려 보지만 번번이 무산됩니다. 블랙번 선수들, 무척이나 투지가 넘쳐흐릅니다.」
펠레도 득점에 실패한 블랙번의 밀집 수비는 쉽사리 깨지지 않았다.
그러던 가운데 로니 클레이튼이 맨유의 패스를 끊어 내 곧장 최전방으로 날려 보냈다.
떨어지는 공을 보고 준영이 뛰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데릭 더건이 달려들며 2명의 장신 플레이어가 공중에서 충돌했다.
투웅-!
어느 쪽도 확보하지 못한 공은 다시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낙하지점을 잽싸게 선점한 준영은 전투적으로 달려드는 더건을 뿌리치고 공을 측면의 레이 윌슨 쪽으로 보냈다.
블랙번의 역습 상황에서 긴장했던 맨유 서포터와 한국 관중들은 안도하며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급한 거 아니니까 침착하게 해!”
최후방에 있는 주장의 든든한 수비와 격려에 힘을 얻은 맨유 선수들은 차근차근 경기를 풀어 갔다.
그들은 재빠르게 패스를 주고받으며 블랙번의 수비 전열을 흩트려 놓았다.
그러다 던컨의 패스를 받은 조니 자일스가 클러프 쪽으로 패스를 찔러 주었다.
잽싸게 수비를 따돌린 클러프는 슈팅을 시도했지만, 그 전에 블랙번 골키퍼 레이랜드가 달려들어 공을 쳐 냈다.
“큭, 이건 페널티킥이라고!”
골키퍼와의 충돌로 나동그라진 클러프가 항의했지만, 경기는 그대로 지속.
블랙번은 잽싸게 역습으로 전환하며 다시 최전방으로 공을 띄워 보냈다.
이번에 공을 잡은 건 측면에 있던 가와부치.
그는 헤딩으로 공을 앞쪽으로 떨군 후, 계속 달려가며 맨유 진영으로 치고 들어갔다.
이때 잽싸게 내려온 준영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쳐 주마, 리준욘!’
반대편의 동료가 손을 들었지만, 가와부치는 과감하게 일대일을 시도했다.
조센징 녀석이 하던 대로 헛다리를 짚으며 눈을 어지럽힌 후, 치고 들어갔다.
‘이런 기술은 네놈만 쓸 줄 아는 게 아니라고!’
‘오, 괜찮긴 했는데 터치가 길었어.’
준영은 굳이 쫓아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예상대로 가와부치가 다소 강하게 찼던 공은 박스 밖으로 달려 나온 해리 그랙이 멀리 걷어 냈다.
떨어지는 공중볼을 잡은 건 던컨 에드워즈.
비스듬히 가슴으로 받아 앞쪽으로 공을 떨어트린 그는 상대의 마크를 뿌리치고 탱크같이 블랙번 문전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유나이티드 6번 빅 던, 거침없이 치고 들어갑니다. 수비수들이 막아서지만 나동그라지고… 빅 던이 슈팅 사거리 안에 들어왔습니다!」
허를 찌르는 과감한 돌파로 찬스를 만들어 낸 던컨.
그는 골 에어리어 부근에서 슈팅을 날렸다.
까앙-!
골키퍼의 펀칭을 뚫고 간 강슛이 포스트바를 맞고 나왔다.
중앙으로 튄 공을 잡아챈 건 블랙번의 주장 클레이튼.
그는 클러프가 달려드는 것을 보곤 곧장 공을 걷어 냈다.
그런데 앞쪽으로 멀리 나가야 할 공이 수비에 가담했던 맥그래스의 턱에 맞고 말았다.
“어, 어! 저, 저거……!”
필드에 있던 선수들, 그리고 뒤에서 카메라를 든 기자들, 거기다 골대 가까운 곳에 있던 관중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굴절된 공은 블랙번 골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아, 자책골! 잘 막고 있던 블랙번이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르고 맙니다.」
행운과 불운, 황당과 환희가 양 팀을 오갔다.
전혀 뜻하지 않은 동료들의 실책에 가와부치의 낯이 휴지처럼 구겨졌다.
축구는 11명이 하는 스포츠라는 사실, 그리고 동료의 실책도 함께 떠안아야 한다는 현실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
북아일랜드 출신의 장신 공격수 데릭 더건은 훗날 울버햄프턴에서 크게 활약하는 선수입니다.
60년대 후반에는 사이키델릭 록에 심취해서 마치 록커들처럼 머리와 수염을 기르기도 했고, 1968년에는 싱글 앨범도 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선수협회 회장을 맡아 선수들의 자유로운 계약과 이적에 힘을 쓰기도 했습니다. 보스만 룰이 나오기 전에 이미 그와 관련한 문제 해결에 노력했던 거지요.
80년대에는 울버햄프턴의 회장을 맡기도 했고, 1997년 총선에는 벨파스트 지역구에 등록해서 국회의원 출마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낙선했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