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86화 (286/400)

Round 286. 부정한 자의 음모

유러피언 컵 준결승 2차전에서 3 대 0 완승을 거두고 귀국한 맨유 선수들은 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Glory United!”

“Manchester is Wonderful!”

레플리카를 입고 응원 구호를 신나게 외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몇몇 팬들은 선수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냥 화환을 건네주고 점잖게 물러나는 이도 있었지만, 끌어안고 키스까지 하다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기도 했다.

준영도 하마터면 웬 이상한 대머리 사내에게 입술을 빼앗길 뻔했다.

“난리도 아니구만.”

“무적함대를 격파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목에 화환을 건 던컨의 입에선 미소가 쉬 지워지지 않았다.

경기 전에 에레라 감독이 어그로를 잔뜩 끌어 놓은 터라, 영국 국민들 모두 감정이 무척 상해 있었다.

그런데 맨유가 적지에서 완승을 거두고 결승행 티켓을 따냈으니 통쾌할 수밖에!

“바르셀로나는 발칵 뒤집힌 모양이던데…….”

“그 감독이 한 짓을 생각하면 뒤집히는 게 당연하지.”

경기 종료 후, 캄 노우에서는 거의 폭동에 가까운 관중 난동이 벌어졌다.

다행히 승자인 맨유 선수들에게 불똥이 튀지는 않았다.

관중의 분노는 바르셀로나에 쏠렸고, 프란세스크 회장은 흥분한 팬들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와중에 감독은 상황 파악도 못하고 불을 질렀지.”

“내가 바르사 팬이었으면 진짜 먼지 나게 두들겨 패고 싶겠더라고.”

에레라 감독은 인터뷰하러 온 기자들에게 ‘패배의 원인은 감독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불성실한 선수들 때문’이라며 쿠벌러를 저격했다.

이에 쿠벌러도 마냥 당하지 않고 응수했다.

‘불필요하게 상대를 자극하고, 선수들이 마시는 차에 몰래 각성제를 탄 사람이 반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쿠벌러가 작심하고 직격탄을 날리면서 암페타민 복용은 사실로 밝혀졌다.

그러자 에레라는 ‘규정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렇게 철면피로 굴던 그는 다음 날 곧바로 해임 통보를 받았다.

팀에 ‘약쟁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만든 에레라를 그냥 둘 정도로 바르사 구단은 덤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UEFA에서도 도핑 금지 규정을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언론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계속 지적한다면, UEFA는 물론 FIFA에서도 분명히 논의하게 될 것이다.

그럼 실제 역사보다 빠르게 약물은 축구계에서 퇴출될 터.

“다들 잘해 주었네. 정말 수고들 했어. 돌아가서 푹 쉬고 다음 경기를 준비하자고.”

“Yes, Sir!”

공항에서 나온 맨유 선수들은 버스비 감독의 치하를 받은 후, 집으로 향했다.

준영 역시 공항까지 마중 나온 리즈를 만나 함께 저택으로 돌아갔다.

“힘든 경기였죠? 많이 피곤해 보여요.”

“만만치 않은 상대였으니까.”

1차전 패배로 물러설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심적인 부담도 컸다.

거기다 스코어 자체는 완승이라 해도 마지막까지 추격해 오는 바르셀로나 선수들의 저력에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경기가 끝나고 긴장이 풀려서인지 해일같이 피로가 몰려들었다.

“그래도 우리 여왕님 미소를 보고 있으니 피로가 싹 달아나는 것 같아.”

“아이 참, 준도…….”

발갛게 얼굴을 붉히던 리즈가 말했다.

“집에 가면 삼계탕 끓여 줄게요.”

“엥? 삼계탕 하는 건 언제 배운 거야?”

“서울에 있는 리 셰프에게 전화해서 물어봤어요. 차이나타운에서 전복을 구할 수 있다면 맛이 더 좋다며…….”

어제 한번 시험 삼아 만들어 봤는데, 그럭저럭 괜찮은 맛이 나더라고.

“아, 그리고 아침에 킴 코치님이 그러는데 한국 대표팀이 로마 올림픽 출전권을 딸 것 같대요.”

“아직 2차전은 안 했을 텐데?”

4월 25일 타이베이에서 열린 최종 예선 1차전에서는 2 대 1로 중화민국에게 이겼다고 들었다.

그리고 2차전은 내일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게, 중화민국에서 한국의 소요 사태가 걱정된다며 2차전도 타이베이에서 하자고 했대요.”

“무슨 핑계가 그래? 혁명 마무리 다 되었구만.”

4월 혁명은 이승만의 하야로 마무리되었다.

물론 사태 수습과 치안 유지 측면에서 계엄이 아직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경기를 못할 정도로 4월 말의 한국은 무질서하지는 않았다.

대한축구협회도 예선전이 가능하다고 자신했고, 고심하던 대회 조직위에서도 결국 서울 경기를 승인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떼를 부리다니.

당연하지만 한국 대표팀은 2차전 준비를 위해 귀국했고, 중화민국은 경기 전날인 현재도 서울로 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대로라면 중화민국은 실격패다.

그래서 김용식은 한국 대표팀의 로마 올림픽 출전이 유력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확정되면 지난번처럼 더 클리프를 한 번 더 빌리고 싶대요. 본선 경기를 하기 전에 영국에서 훈련과 친선전을 하고 싶다고 했대요.”

그리 말한 리즈는 궁금한 기색으로 준영에게 물음을 건넸다.

“근데 한국 대표팀이 로마 올림픽에 출전하면 준도 차출되는 거예요?”

“나? 아니, 난 불가능할 거야.”

지난번에 위혜덕 감독이 올림픽 본선에 준영을 차출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었다.

하지만 준영이 따로 알아보니 현재 프로 선수는 올림픽 본선 출전이 불가능했다.

자신의 기량이 워낙 탐난 나머지, 위 감독이 이 규정을 잊고 말한 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프로팀에 있더라도 계약이 준프로 수준에 2군에서만 뛰었으면 아마추어 선수로 인정해 준다고 하더군.”

“그럼 계약을 한시적으로 해제하거나 아마추어 수준으로 바꾸면요?”

“그런 편법을 그냥 넘어가진 않을걸.”

준영은 이미 유럽 축구계에 잘 알려진 특급 플레이어.

유러피언 컵과 월드컵까지 뛴 선수가 이제 와서 아마추어가 된다고 하면 아주 뻔뻔하게 볼 게 아닌가.

자칫 징계를 받을지 모른다.

“아쉽지만 그냥 본선에서 잘하게 지원해 주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정도를 지키는 게 중요하다.

도핑이나 편법은 언제든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오기 마련이니까.

***

“하아, 어쩌지…….”

숙소 방 안에 있던 가와부치 사부로는 연방 한숨을 토하고 있었다.

그에게 고민을 안긴 건 손에 들린 알약들.

일전에 친절한 의사 선생님에게서 임상 시험 참여를 대가로 건네받은 스테로이드였다.

이 마법의 알약 덕분에 그는 팀에서 주전급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지.’

FA에서 약물의 부작용을 지적하며 도핑 금지 규정을 만든 것이다.

그래도 가와부치는 안 들키면 된다는 생각에 몰래 섭취해 왔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협회에서는 불시 감찰과 조사, 그리고 무작위 지정 검사를 진행했고, 이 과정에서 규정을 무시한 선수 몇 명이 적발되어 중징계를 받았다.

가와부치가 있는 블랙번 역시 시즌 초에 협회 조사원들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다행히 그때 검사 대상으로 지목되지 않아 무사히 넘어갔다.

하지만 그 일로 주눅이 든 가와부치는 이후 복용을 중단했다.

힘들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견뎌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 반년가량이 지난 지금은 마법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아니, 약을 먹기 전보다도 못해진 것 같았다.

당연히 팀 내에서도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제길, 곧 있으면 중요한 경기가 있는데 하필 지금…….’

블랙번은 이번 시즌 FA컵 결승에 올랐다.

영국에 있는 일본인들이나 본토의 일본 언론들은 가와부치의 결승전 출전을 기대하고 있었다.

아니, 출전이 확정된 것처럼 떠드는 부류도 많았다.

그렇게 설레발을 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하필이면 상대가 유나이티드니까 말이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리준욘.

놈은 지난번 리그 38라운드 웨스트햄 원정 경기에 출전, 선배 나가누마 겐과 히라키 류조에게 망신을 안겨 주었다.

그때 일본 국민들의 실망이 굉장히 컸다.

‘가와부치 군! 이제 믿을 건 자네밖에 없네. 반드시 복수를 해 주게나!’

‘반드시 리준욘을 무찔러 줘!’

‘할 수 있죠, 가와부치 상? 당신은 우리 일본의 희망입니다!’

일본 대사를 비롯해서 일본 축구계와 재영 일본인들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선전을 기원하는 전화와 엽서를 보내왔다.

당연히 부담감은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리준욘에게 또 진다면? 아니, 그 전에 아예 출전을 못하면…….’

그럼 자신에게 기대감을 보였던 이들은 실망과 배신감을 보이며 등을 돌리겠지.

가와부치는 그 상황이 두려웠다.

그래서 복용을 중단한 마법의 알약을 다시 끄집어냈지만, 쉽사리 섭취하지 못했다.

바로 엊그제, 유러피언 컵 준결승 2차전이 끝나고 도핑 파문이 터졌으니까.

경기 전에 냄새를 맡았던 영국 언론에서는 ‘그럴 줄 알았다’며 조롱 어린 반응을 보였다.

FA 역시 다르지 않았다.

‘불의를 저지른 자들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기 마련입니다. 우리 FA는 앞으로도 도핑에 대해서 엄하게 처벌할 것입니다. UEFA와 FIFA 역시 적극 동참하기를 희망합니다.’

지은 죄가 있었던 가와부치 입장에선 스탠리 루스 총무의 이 같은 발언에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에 들키면 모든 게 끝장난다.

하지만 섭취하지 않으면 결승전 출전이 힘들어진다.

과연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한단 말인가!

“젠장, 나도 모르겠다!”

가와부치는 알약 몇 개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이렇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나니, 새삼 자신을 위기로 몰아넣은 놈이 원망스러워졌다.

안 그래도 원수 같은 놈이지만 더욱 강한 증오심이 치솟은 것.

“리준욘, 그 조센징 놈이야말로 부정을 저지르고 있을 텐데! 왜 아무도 놈에 대해선 지적하지 않는 거야?”

동양인이라고 믿기 힘든 체격과 실력.

아무리 봐도 이건 정상이 아니다. 틀림없이 놈은 뭔가 꼼수를 부리고 있을 것이다.

약을 했거나, 아니면 어디서 인체 개조를 받았거나.

‘아니, 지적받지 않으면 지적받게 만들면 되는 거잖아.’

뭔가 번득이는 생각이 떠오른 가와부치.

그의 입가에 음흉한 웃음이 걸렸다.

***

1960년 5월 7일.

늦봄이기는 해도 영국답지 않게 맑은 날씨에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그 바람에 웸블리 경기장에 들어선 사람들 중에는 재킷을 벗은 이들도 꽤 많았다.

아니, 일부 관중들은 아예 웃통까지 벗어 던지고 일광욕을 즐겼다.

“흐에에… 더워.”

“카린, 조금만 참으렴. 좀 이따 행상인 아저씨가 오면 아이스크림 사 줄게.”

리즈의 말에 카린은 조금 생기를 회복했다.

그나마 프레드로 일가가 있는 귀빈석은 지붕으로 그늘이 드리워져 덜한 편이었다.

그래도 더운지 앤지는 연방 부채를 흔들어 댔다.

“형부의 말이 맞나 봐. 인간들이 화석 연료를 너무 써서 지구가 계속 더워지고 있다는 거 말이야.”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고 하던걸.”

준영에게 들은 21세기가 마냥 희망적이지는 않았다.

산업 혁명 이후 오랜 환경 파괴로 세계 전역의 빙산과 빙하들이 녹고, 자연재해가 곧잘 일어나곤 한다고.

“내가 할아버지만큼 나이가 들면 영국산 망고나 파인애플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걸까.”

“설마 그 정도까지 되겠니.”

리즈가 더위에 이런저런 소리를 늘어놓는 동생들을 다독이는 사이, 관중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터트렸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블랙번 로버스.

이번 시즌 FA컵의 왕좌를 다툴 양 팀이 입장하고 있었다.

***

실제 역사에서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은 1960년 로마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4.19 혁명 여파를 핑계로 대만에서 최종 경기 예선 2경기 모두 타이베이에서 하기를 원했고, 2차전에서는 영국인 심판의 편파 판정까지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때 차태성 선수가 부당한 페널티킥 판정을 내린 심판에게 달려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과 대만 양 팀 선수들이 뒤엉켜 패싸움이 벌어졌고, 관중들까지 난입해서 한국 선수들을 폭행했습니다.

결국 먼저 폭행을 행사한 한국의 실격패가 되었죠.

이 시기는 대만이 아직 UN 상임이사국이고, 그래서 대외적으로 발언이 강했던 시절이라 스포츠 쪽에서도 제법 영향력이 컸습니다.

중국이 이런 대만의 승승장구가 못마땅해서 헬싱키 올림픽 이후 27년 동안 IOC를 떠났을 정도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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