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85. 캄 노우의 악몽
“허억… 헉…….”
후반 20분대에 들면서 바르셀로나 선수들의 호흡이 더욱 거칠어졌다.
수비수뿐만 아니라 공격수들까지도.
이제 일반 팬들의 눈에도 지쳤다는 게 확 띌 정도였다.
개인기를 부릴 만한 기운도 없었고, 동료의 움직임을 보고 여유롭게 패스를 건넬 수도 없었다.
“아니, 왜들 저래? 완전 물먹은 솜 같잖아.”
“아침에 죽 먹고 왔나?”
의아해하기는 맨유 선수들도 마찬가지.
다만 도핑을 의심하고 있던 던컨이나 준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1차전 때와 달리 지금 바르사 선수들은 각성제를 투여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빠르게 탈진해 가는 듯했다.
“존, 네가 각성제라고 하면 펄쩍 뛰던 이유를 확실히 알 것 같아.”
“그래. 절대 좋은 게 아니야.”
약물로 이룬 성과는 약물을 쓰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다.
그렇게 계속 의존해 가다 보면 몸과 정신은 점점 피폐해지고 만다.
‘환각 증세 때문에 병원을 찾았다고 할 정도면 이미 심각한 수준인 거지.’
이게 감독이 멋대로, 몰래 저지른 짓이라면 선수들은 억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진행되는 경기는 중단되지 않는다.
‘이런 상태라면 생각보다 쉽게 쓰러트릴 수 있겠군.’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 동료 선수들도 준영처럼 생각했다.
결승 진출에 대한 희망이 선명하게 보이자, 다들 더 힘을 내서 뛰었다.
이렇게 맨유 선수들이 분발하자, 이를 쉽사리 따라가지 못하는 바르사 선수들은 마음이 급해졌다.
‘제길, 어떻게든 막지 않으면……!’
급한 마음에 손을 쓰거나 거친 태클도 서슴지 않았다.
쿠벌러 역시 드리블을 하다가 던컨에게 공을 빼앗기자, 급한 나머지 유니폼 하의를 잡아당겼다.
“야!”
던컨이 황급히 그의 손을 뿌리치며 언성을 높였다.
안 그래도 오늘 경기는 특별히 TV 중계를 한다고 들었다.
하마터면 TV로 자신의 엉덩이를 노출시킬 뻔했다.
“미안해. 나도 모르게…….”
쿠벌러는 바로 사과했지만 결국 파울 판정을 받았고, 심판에게 엄중한 경고를 받았다.
또 한 번 그랬다간 퇴장시킬 거라면서.
‘쳇, 바로 퇴장시킬 것이지.’
내심 투덜대던 던컨은 곧장 공격수들을 향해 길게 패스를 보냈다.
던컨이 보낸 패스를 헤딩으로 받아 낸 짐 박스터는 자신을 마크하는 베르제스를 뿌리치고 문전으로 달려가는 바비 찰튼에게 공을 밀어 주었다.
“나이스 패스!”
바비 찰튼은 순식간에 바르사 페널티 박스까지 도달했다.
그러자 수비수 로드리게스가 황급히 태클로 저지하려 들었다.
그러나 로드리게스의 태클은 공이 아닌 바비의 다리를 걷어차고 말았다.
“아악!”
삐빅-!
곧장 휘슬을 분 심판은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바비 찰튼은 다리가 아픈 것도 잊고 쾌재를 부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와 달리 파울을 한 로드리게스나 바르사 선수들은 펄쩍 뛰었다.
“아니에요! 페널티킥은 아니라고! 라인 밖이었단 말입니다!”
“분명히 라인 안쪽이었어.”
“밖이라니까요!”
홧김에 로드리게스가 언성을 높이며 심판을 손으로 밀었다.
그의 행동에 와락 눈살을 찌푸린 심판은 가차 없이 추가 판정을 내렸다.
“바르셀로나 2번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 퇴장!”
감히 심판에게 손을 댄 대가는 컸다.
퇴장 판정에 기겁한 바르사 선수들은 선처를 요청했지만, 심판은 냉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결국 로드리게스는 울먹이며 필드를 나가야 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을 본 바르사 팬들은 낯빛을 딱딱하게 굳힌 채 손톱을 물어뜯었다.
“으아, 진짜 큰일 났다.”
“페널티킥 들어가면 0 대 2이니까 재경기해야 하는 거지?”
“바보야, 한 명 퇴장당했다고. 잘못하면 0 대 3이 될 수도 있어!”
당연히 그렇게 되면 결승 진출은 좌절.
꿈만 같은 역사의 순간을 만끽하려던 8만 명 팬들의 눈앞에 악몽이 펼쳐지고 있었다.
***
팀에게 중요한 두 번째 골.
버스비 감독은 키커로 준영을 지목했다.
주장인 그가 이 상황을 깔끔하게 성공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공을 찰 준비를 하던 준영은 그라시아가 슬쩍 페널티 스폿을 밟고 가는 광경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 자식이… 부정 타라고 아주 용을 쓰는구만.’
그라시아를 째려보았던 준영은 공을 찰 준비를 했다.
골키퍼 라마예츠는 팔을 쫙 펴고 좌우로 몸을 흔들며, 준영이 어느 쪽을 노리는지 살펴봤다.
‘왼쪽. 그래, 왼쪽인가.’
시선이나 디딤발을 봐선 왼쪽 같았다.
그렇게 준영이 킥을 하는 순간, 그는 곧장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준영이 발끝으로 툭 건드린 슛은 둥실 떠서 정중앙으로 쏙 들어갔다.
“골인!”
“역시 주장은 멋져요!”
맨유 선수들은 환호했지만, 바르사 쪽은 부들부들 떨었다.
“저 원숭이 자식, 이상하게 페널티킥을 차네.”
“저렇게 느린 슛도 들어가다니.”
“골키퍼를 완전히 속였으니까. 이건 완전 굴욕이라고.”
방금 준영이 찬 슛은 파넨카킥.
훈련 때 종종 했지만 정식 경기, 특히 메이저 대회에서는 이번에 처음 선보였다.
‘이것도 이제 다른 명칭으로 불리려나?’
어쨌거나 1, 2차전 통합 스코어를 2 대 2로 만들면서 결승행에 있어 양 팀 모두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던 준영은 박수를 치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좋았어. 좀 더 밀어붙여 보자!”
“Yes, Sir!”
기세가 오른 맨유 측과 달리 바르사 선수들은 납덩이를 삼킨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절망감이 드리워진 건 간판스타 플레이어 라슬로 쿠벌러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그는 투지를 끌어 올렸다.
‘아직 끝난 건 아니야.’
한 골만 넣을 수 있다면 분위기는 충분히 반전시킬 수 있다!
그는 킥오프가 되기 무섭게 맨유 진영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쪽으로 패스해!”
쿠벌러의 외침에 돌파를 시도하던 루이스 수아레스가 그에게 패스를 건넸다.
공을 잡아챈 쿠벌러는 재빠르게 돌아서며 던컨을 따돌리려고 했다.
“느려.”
쿠벌러의 움직임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굼떠졌다.
바싹 붙어 마크한 던컨은 쿠벌러의 발밑에서 공을 빼내 전진하는 준영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그 패스를 준영은 잡지 않고 논스톱으로 측면으로 돌려놓았고, 이를 잡은 레이 윌슨 역시 논스톱으로 알렉스 퍼거슨에게 보냈다.
‘빠, 빠르다!’
순식간에 중앙선을 넘는다 싶더니 어느새 박스까지 공이 들어왔다.
“크크크, 내가 끝장내 주지!”
영화의 악당처럼 히죽 웃음 지은 알렉스는 힘껏 슈팅을 날렸다.
하지만 너무 힘을 줘서 때린 탓일까.
그의 슛은 골대를 훌쩍 넘어가 버렸다.
“쯧쯧, 그 좋은 기회를 날려 먹다니…….”
“시끄러! 실수 좀 할 수 있지.”
데니스의 핀잔에 알렉스는 낯빛을 붉혔다.
패스 플레이도 기가 막혔고, 들어가기만 했으면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멋진 골이 되었을 텐데 정말 아쉬웠다.
“괜찮아. 잘했어. 계속 그렇게 밀어붙여!”
준영이 박수를 쳐 주며 엄지를 치켜들어 주자 알렉스도 표정을 활짝 폈다.
‘다음번 기회에는 반드시 넣어야지!’
이렇게 다짐하는 건 데니스 로 역시 마찬가지.
그들은 결승행을 결정짓는 골은 반드시 자신의 발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
후반전 시간도 이제 10분가량밖에 남지 않았다.
수적 열세인 바르사는 내려앉긴 했지만, 공격을 완전히 포기하진 않았다.
찬스를 만들 수 있는 쿠벌러와 마무리에 능한 코츠시스, 발 빠르고 크로스가 날카로운 졸탄 치보르.
이 헝가리 삼총사가 공세를 펼치는 맨유의 뒷공간을 틈만 나면 파고들었다.
「쿠벌러가 치보르에게 패스. 치보르, 좌측면을 흔들며 크로스를 올리고… 코츠시스, 달려들며 헤딩!」
갑자기 번개같이 쇄도한 코츠시스가 빠르게 날아드는 크로스에 머리를 맞혔다.
방향이 뚝 꺾인 헤딩슛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린 해리 그렉의 손에 맞고 이어서 골대를 맞히고 튕겨 났다.
깜짝 놀란 준영은 황급히 공을 멀리 걷어 냈다.
‘이 헝가리 놈들, 아직 기운이 남아 있구만.’
썩어도 준치. 악재를 겪고 있어도 바르셀로나는 강했다.
“Kubala! Kubala!”
“힘내라, 바르셀로나!”
“아직 끝나지 않았어!”
8만의 관중들도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그 응원에 보답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쿠벌러는 또다시 멋진 공격을 선보였다.
코츠시스와 패스를 주고받으며 맨유 문전으로 다가와 벼락 슛을 날린 것.
하지만 그 슈팅은 빌 포크스의 등에 맞고 나왔다.
“막아! 막아!”
흘러 나간 공을 코츠시스가 잡았다.
맥닐이 황급히 몸을 날리자, 코츠시스는 한 차례 접고 슈팅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의 슛은 시원하게 허공만 차 버렸고, 공은 준영이 잽싸게 빼내 갔다.
“저 망할 한국 놈!”
분통을 터트린 코츠시스는 준영을 쫓아갔다.
하지만 따라잡기도 전에 근육이 올라오는 바람에 주저앉아 버렸다.
「존 Y. 리가 무섭게 바르사 진영으로 달려갑니다. 수아레스와 마르티네스가 둘러싸고, 플로타츠가 길목을 막아섭니다.」
급한 마음 때문인지, 아니면 대놓고 담가 버릴 의도인지.
스터드가 선명하게 보이는 높은 태클들이 연달아 날아들었다.
스쿱 턴과 백숏으로 태클을 피해 낸 준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짜 위험했다.’
빠져나가는 순간 정강이에서 턱 하고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대 태클이 스쳐 지나며 일어난 소음이었다.
‘빨리 결정짓지 않으면…….’
잽싸게 전방을 살피던 준영은 알렉스 쪽으로 패스를 찔러 주었다.
공이 가는 방향대로 박스로 뛰어 들어간 알렉스.
그는 제대로 슛 자세도 잡지 않고 앞발로 툭 건드리며 기습적인 슈팅을 시도했다.
깜짝 놀란 라마예츠 골키퍼가 몸을 날려 가까스로 공을 쳐 냈다.
하지만 잡지 못하고 흘린 공은 데니스가 달려들며 골대 안으로 욱여넣었다.
“그렇지! 해낼 줄 알았어!”
“역전이다! 역전!”
골대 뒤에 있던 몇몇 영국인 기자들은 사진 찍는 것도 잊은 채로 방방 뛰었다.
합산 스코어 3 대 2.
정규 시간 종료 2분을 남겨 두고 맨유가 결승행 티켓에 손을 얹었다.
물론 바르사는 순순히 빼앗길 마음이 없었다.
‘아직이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
경기가 재개되자, 쿠벌러를 필두로 한 헝가리 삼총사들은 사력을 다해 맨유 진영에 파고들었다.
좀 전에 근육이 올라왔던 코츠시스도 이를 악물고 뛰었다.
「정규 시간은 다 되었지만, 심판은 아직 휘슬을 불지 않고 있습니다. 치보르가 측면 깊숙이 달려 들어가며 크로스, 코츠시스가 뛰어오르며 헤딩-!」
사력을 다해 점프한 코츠시스는 자신보다 키가 큰 맥닐을 상대로 헤딩을 따냈다.
그가 떨어트린 공은 쿠벌러의 앞에 떨어졌다.
‘위험하다!’
준영과 던컨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쿠벌러는 그것을 예상이나 했다는 듯, 바로 때리지 않고 살짝 접은 다음에 휘어 찼다.
오른쪽 상단 구석을 노렸던 쿠벌러의 슈팅은 옆 그물을 흔들고 말았다.
“으아아, 젠장!”
마지막 공격이 무산되자 쿠벌러는 울부짖으며 땅을 때렸다.
이어서 심판의 종료 휘슬이 울려 퍼졌다.
환호하는 맨유 선수들과 달리, 캄 노우의 8만 관중들은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갑자기 터진 도핑 루머 때문에 분위기가 뒤숭숭하긴 했어도 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건만.
정말이지 이 악몽 같은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
1. 실제 역사에서 1959-1960 시즌 유러피언 컵 4강에서 바르셀로나는 레알 마드리드와 맞붙었습니다.
당시 에레라 감독은 자신과 불화를 일으킨 에이스 쿠벌러를 1, 2차전에서 모두 제외했고, 그 두 경기 모두 레알에 패배했습니다.
당연하지만 이후에 임원과 팬들에게 질타를 받으며 해임되었습니다.
2. 2004년 AFC 챔피언스리그 때 당시 성남 일화가 결승 1차전에서 알 이티하드 홈에서 3 대 1로 승리하며 우승을 목전에 둔 일이 있었죠.
하지만 AFC에서 올해 우승해도 클럽 월드컵 못 나간다고 김을 빼 버린 데다, 2차전 심판은 편파 판정으로 악명 높던 심판 루쥔이었습니다.
결국 성남은 홈에서 5 대 0의 대패를 당하며 우승을 놓쳤죠. 성남 올드팬들에겐 악몽과도 같은 경기로 언급되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