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84. 금단의 덫
“Goooo-oal!”
“해냈다, 해냈어~!”
이른 시간에 터진 맨유의 선제골!
득점에 성공한 클러프는 준영과 시원하게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역시 챔피언은 쉽게 쓰러지지 않는 걸까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오늘 경기 선제골을 가져갑니다.」
중계 캐스터의 목소리에는 실망이 섞여 있었다.
지난 시즌 챔피언인 맨유를 쓰러트리면 우승은 따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
그렇다 보니 지역 차원에서 큰마음 먹고 TV 생중계로 이번 경기를 방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초장부터 선제골을 맞고 말았으니!
“괜찮아. 곧 역전할 테니까.”
“그래, 쿠벌러가 다 해결할 거야!”
경기장에 모인 홈팬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이제 경기 초반인 데다, 공격수들의 예열이 끝나면 화끈한 골 퍼레이드가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듯 쿠벌러가 멋진 돌파로 맨유 진영을 파고들었다.
바싹 붙어 마크하는 던컨을 뿌리치고 날린 그의 슈팅은 해리 그렉의 펀칭을 맞고 골대를 넘어갔다.
“Kubala! Kubala!”
8만여 명의 관중들이 쿠벌러를 연호하며 열띤 응원을 펼쳤다.
이어지는 코너킥 찬스에서 분명히 동점 골이 나올 터.
기대에 찬 관중들의 시선이 맨유 페널티 박스 중앙에 떠오른 공으로 향했다.
「코츠시스, 헤딩-! 아… 존 Y. 리가 먼저 끊어 냅니다. 유나이티드의 역공입니다. 빨리 수비로 전환해야죠!」
준영이 끊어 낸 공을 잡은 짐 박스터는 재빨리 좌측면으로 공을 보냈다.
총알같이 달려가 공을 잡은 바비 찰튼은 쫓아오는 바르사 수비수들을 끌고 코너 플래그까지 달려갔다.
그리고 공이 터치라인을 넘기 직전 중앙으로 크로스를 올렸다.
그 크로스는 쇄도하던 클러프와 알렉스 퍼거슨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맨유 입장에선 아쉬운 기회였지만, 바르사에겐 섬뜩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와, 큰일 날 뻔했네.”
“영국 놈들, 장난 아닌데? 아주 이 꽉 물고 덤벼들고 있어.”
“젠장, 감독 놈이 쓸데없는 소릴 해 가지고…….”
자칫 잘못하다간 사냥감인 맹수에게 잡아먹힐 판.
그 위기의식은 관중들뿐만 아니라 바르사 선수들도 느끼고 있었다.
“동점 골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실점을 하면 안 돼.”
“다른 건 몰라도 상대의 빠른 역공은 확실히 막아 내야 해.”
바르사 선수들은 한동안 지연하며 맨유 쪽으로 흘러가는 경기 분위기를 돌리려 했다.
어차피 급한 건 골이 필요한 맨유이지, 자신들이 아니니까.
그러나 이러한 바르사의 지연 전술을 맨유는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가서 눌러 버려.”
준영이 사인을 보내자, 2톱이던 맨유 공격진에 데니스 로가 전진하며 3톱을 이루었다.
이들 세 공격수들은 마치 사슴 떼를 쫓는 늑대같이 과감하게 공을 향해 달려들며 바르사 수비수들을 압박했다.
‘흥, 그런 식으로 달려든다고 내가 공을 뺏길 거라 생각하냐.’
엔리크 겐사나는 클러프가 달려들자 황급히 동료인 그라시아에게 공을 보냈다.
하지만 공은 그라시아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 라인 밖으로 나가 버렸다.
“뭐 하냐. 패스도 똑바로 못하고!”
“기껏 전진했는데 상대에게 찬스를 주면 어떡하냐고.”
실수 한 번으로 다시 수비로 전환하는 바르사 선수들도 허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각자 마크할 녀석들을 확실히 체크해!”
“빈 공간으로 들어오는 놈들을 놓치지… 앗, 조심해!”
맨유의 드로잉 볼이 준영의 헤딩과 데니스 로의 발을 거쳐 반대편에서 전진해 온 던컨에게 전달되었다.
기겁한 그라시아가 황급히 마크하러 달려오자 던컨은 그대로 슈팅을 날렸다.
허공에 하얀 궤적을 그은 슈팅은 골대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
숨이 멎을 뻔했던 관중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거야? 방금 슈팅한 녀석, 수비수 아니야?”
“아까 선제골 어시스트를 한 동양인도 수비수였지.”
“골이 필요하니 수비수도 공격에 막 가담하는 건가? 그 틈을 노려서 역공을 해야 하는데…….”
그러나 관중들이 떠드는 것처럼 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건 경기를 지켜보는 감독들이 제일 잘 알았다.
“흥, 쿠벌러 자식, 제가 다 할 것처럼 잘난 척을 하더니만…….”
경기를 보고 있던 에레라 감독은 혀를 찼다.
초반부터 경기 흐름이 영 좋지 않았다.
거기다 맨유는 존 Y. 리와 던컨 에드워즈, 바비 찰튼이 위치를 바꾸며 혼란을 주고 있었다.
존 Y. 리가 전진하면 던컨이 최후방을 지키고, 던컨이 공격에 가세하면 바비 찰튼이 수비로 내려가는 식으로.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체력이 강해. 저 셋은 유달리 강한 편이고…….’
만약에 저들의 왕성한 활동이 경기가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면 상당히 곤란해질 수 있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지만, 세운다 해도 선수들이 따를지는 의문이었다.
안 그래도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놈들이 언론의 입방정이 시작되자마자 대놓고 반기를 들었으니까.
‘쳇, 하필이면 이 시점에 터질 게 뭐람!’
스페인을 넘어 유럽 전체에 명성을 떨칠 기회가 왔건만!
분통한 마음에 에레라의 찡그려진 표정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
경기는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양 팀 모두 실점에 주의하면서 활발하게 공격을 펼쳤기 때문에 경기는 지루하지 않고 빠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선제골 이후로 골이 나오지 않는 건 좀 아쉽군.”
“그러게. 양쪽 다 찬스를 잘 살렸으면 2~3골은 더 나오지 않았을까 싶은데 말이야.”
“어쨌거나 흥미로운 경기야. 각기 다른 전술에 공격 스타일을 가진 팀이 부딪치는 모양새가 참 볼만하단 말이지.”
바르사는 공격수들의 날카로운 패스와 과감한 돌파로 찬스를 만들었고, 맨유는 주로 공수에서의 왕성한 활동과 빠르고 간결한 전개로 상대 문전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선수는 이준영이었다.
주로 수비와 미드필드 지역에서 움직였지만, 과감하게 바르사 진영 깊숙이 들어올 때도 많았다.
“또 저 동양인이 올라왔어.”
“돌파해 들어오고 있잖아. 빨리 막아야지!”
바르사는 1차전에서 했던 것처럼 공을 가진 선수를 겹겹이 둘러싸고 그 주변까지 견제하는 방식으로 수비를 했다.
하지만 오늘은 공격 쪽에 치중해서 그런지, 수비가 약간 헐거운 편이었다.
그 헐거운 틈새를 파고든 준영은 빈 공간에 있는 동료의 앞으로 패스를 밀어 주었다.
「짐 박스터, 페널티 아크 앞쪽에서 슛-! 하지만 라마예츠가 잡아 냈습니다.」
짐 박스터의 슈팅을 마지막으로 전반전이 끝났다.
한 점 뒤진 상태로 라커룸으로 돌아온 바르사 선수들을 맞은 건 에레라 감독의 비웃음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나 없이도 이길 수 있을 것처럼 굴더니 지고 있구만.”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쿠벌러의 대꾸에 에레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보기에 쿠벌러의 능력으론 경기를 뒤집기 힘들었다.
‘공격력이나 찬스를 만드는 능력은 분명히 디 스테파노 못지않아. 하지만 필드 전체에 대한 영향력은 부족하단 말이지.’
전반전 맨유의 공격은 속도를 빼면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주로 많은 활동량과 양쪽 측면을 활용해서 쇄도하는 공격수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는 단순하고 뻔한 패턴이었다.
조금만 신경 쓰면 헛심만 쓰게 하고 기회를 주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유나이티드가 그런 단순한 공격으로 일관하는 데도 분명히 이유가 있어.’
어쨌든 팀이 이겨야 체면은 살고, 루머는 가라앉는다.
이에 에레라는 선수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내 방식이 너희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매우 중요한 경기를 하고 있어. 우리끼리 다투어서 좋을 것은 없지.”
그렇게 말한 에레라는 컵에 물을 따라서 쿠벌러에게 건넸다.
“후반전엔 더 힘들어질 거야. 그러니 충분히 수분을 섭취해 두는 것이 좋아.”
그러나 물컵을 받은 쿠벌러는 곧장 바닥에 물을 쏟아 버렸다.
에레라가 무섭게 노려보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쏘아붙였다.
“이제 당신이 주는 건 받아먹을 생각이 없어.”
경기 전날 매번 차에 암페타민을 타서 주는 감독이 그냥 생수를 건네지는 않을 터.
쿠벌러는 더 이상 에레라의 수작에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후회할 거다, 쿠벌러.”
“남 걱정하지 말고, 당신 앞날이나 걱정하시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린 두 사람.
다른 선수들도 에레라를 무시하거나 냉소로 일관했다.
다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팀 역사에 남을 중요한 경기에서 터지게 된 것은 심히 유감이 아닐 수 없었다.
***
하프타임이 끝나고 양 팀 선수들이 다시 필드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작된 후반전에서도 경기 양상은 전반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그나마 달라진 점이 있다면 데니스 로가 최전방으로 적극적으로 나가며 거의 3톱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여기에 바비 찰튼도 틈만 나면 적극적으로 전진하며 바르사 수비에 압박을 주었다.
“유나이티드가 점점 공세를 높이는 것 같은데?”
“공격진으로 들어가는 패스도 상당히 날카로워졌어.”
후반전 맨유의 공격 지원을 담당한 건 짐 박스터.
전반에는 다소 숨죽이고 있던 그가 후반에는 좌우, 중앙 폭넓게 필드를 살펴보며 공격수들에게 패스를 공급했다.
“험한 일은 내가 해 줄 테니까 신나게 날뛰어 봐.”
“알겠습니다, 주장.”
수비 쪽으로 내려온 준영은 바르사 공격수들의 패스를 가로채서 박스터에게 전달했다.
박스터는 그것을 공격수들에게 넘겨주거나 기회가 생기면 직접 돌파해 들어갔다.
“애송이 주제에!”
바르사의 미드필더 플로타츠와 베르제스가 달려들었지만, 박스터는 유려한 발놀림으로 그들을 제쳐 냈다.
“와, 저 녀석, 뭐지?”
“허수아비 같은 모양새와 달리 발재간이 기막힌걸!”
짐 박스터는 188센티미터의 신장에도 불구하고 피지컬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매우 효율적으로 움직일 줄 아는 데다, 개인기도 뛰어났다.
‘전반전이면 몰라도, 후반전에는 박스터의 플레이가 바르사 입장에선 곤혹스러울걸.’
준영의 예상대로 바르사 수비수들은 박스터나 맨유 공격수들을 막느라 진땀을 뺐다.
체력이 점점 떨어지는 시점이다 보니 발이 무거워지고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길, 왜 이리 힘든 거야?’
‘어떻게든 버텨 내지 않으면……!’
뭔가 휘청대는 느낌이 드는 바르사 선수들이었지만, 그래도 맨유의 공격들을 잘 막아 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더 힘들어졌다.
“아무래도 수비를 거들지 않으면 안 되겠어.”
“마르티네스와 치보르, 너희 둘이 내려가서 좀 도와줘.”
사실 지치기는 바르사 공격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전반전에 단순하지만 매우 왕성하게 뛰어다닌 맨유 선수들을 상대하느라 그만큼 피로해졌기 때문.
여기에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쳇, 그러기에 잔말 말고 받아먹었으면 좋았잖아.”
에레라 감독은 점점 지쳐 가는 바르사 선수들을 보며 투덜댔다.
그는 항상 경기 전날 다과회를 하면서 차에 암페타민을 타 주었다.
그 각성 효과 때문에 선수들은 강훈련에도 지치지 않고 경기를 잘 뛸 수 있었다.
하지만 도핑 루머가 터지면서 어제 다과회는 취소되었고, 하프타임 때 급하게 투여하려던 시도도 쿠벌러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단칼에 끊는다고 될 일이 아니란 말이다!’
각성제에 길들여진 만큼 부작용을 겪게 된다.
그동안 본인들도 모르게 암페타민을 복용했던 바르사 선수들은 지금 그 부작용에 발목이 잡힌 상태였다.
***
엘레니오 에레라의 도핑에 대해서 논란이 된 것은 그가 감독으로 부임해 있던 인테르의 에이스 산드로 마졸라의 동생이 폭로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이 논란은 이후 줄리아노 타콜라가 사망하면서 더 커졌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도핑은 불법이 아니었고, 스포츠 업계에서도 만연하다 보니 이 일은 은근슬쩍 묻히고 말았습니다.
번외로 에레라는 1966년 북한이 이탈리아에 승리한 것을 인상 깊게 보고 1971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해 한국 문화를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한국 청소년 선수들을 잠시 가르쳐 주기도 했는데, 어째 태권도 도장에 더 많이 들락거렸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