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81. 사라진 에이스
1960년 4월 21일.
유러피언 컵 4강 1차전이 열리는 올드 트래퍼드는 빈자리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경기장을 찾아온 대다수 관중들은 목청 높여 응원 구호를 외쳤다.
“Glory Manchester! Glory United!”
“We are the Champion!”
상대는 지난 시즌 저승사자 군단을 누르고 프리메라 디비시온의 왕좌에 오른 FC 바르셀로나.
스페인과 헝가리의 특급 공격수들을 앞세운 그들은 강력한 도전자였다.
하지만 맨유 팬들은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들은 챔피언이니까.
그리고 이곳은 자신들의 홈인 올드 트래퍼드니까.
「골! 루이스 수아레스의 강력한 슛! 팽팽하던 경기의 균형을 무너트려 놓습니다!」
예상과 전혀 다른 현실에 맨유 팬들은 대략 정신이 멍한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얼떨떨한 건 경기를 뛰는 선수들이 더했다.
전후반 압도적인 골 점유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상대에게 선제골을 내주다니!
“0 대 1…….”
준영은 수정된 스코어보드를 보며 분통이 섞인 한숨을 토해 냈다.
“오늘은 진짜 안 풀리는군.”
“그러게. 저놈들, 단체로 약 먹고 나온 건가?”
던컨의 말에 준영은 살짝 낯빛을 굳혔다.
“던,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
“농담하는 거 아니거든. 쟤네를 자세히 보라고. 원정을 왔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긴장감이나 피로함이 없어.”
“그만큼 준비를 철저히 한 거겠지.”
FC 바르셀로나는 선수 구성도 만만찮았지만, 감독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엘레니오 에레라.
훗날 인테르로 가서 카테나치오를 완성시킨 명장이다.
오늘 그가 꺼내 든 수비 전술은 완성된 카테나치오는 아니지만, 맨유의 공격을 아주 효과적으로 차단했다.
3~4명의 적극적인 맨 마킹으로 공을 탈취하고, 두세 번의 패스로 순식간에 역습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역습은 제대로 통했다.
맨유 좌우 풀백 레이 윌슨과 던컨 에드워즈가 공격 지원을 하러 전진하면서 나온 빈 공간을 제대로 노린 것.
몇 차례 역습 기회에서 맨유의 수비진을 흔들어 놓던 루이스 수아레스는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망할, 21세기의 우루과이 흡혈귀만큼이나 잘하는군.’
생각해 보니 그 우루과이 흡혈귀도 바르사에서 뛴 적이 있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만회.
아직 후반전 시간은 30분 이상 남아 있었다.
‘아직 골을 넣을 시간은 충분해. 흐름을 바꾸면 역전도 가능하겠지.’
그러니 침착하게 공격을 진행하자.
이렇게 생각한 준영은 킥오프 이후 직접 공을 몰고 바르사 진영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곧장 바르사의 주장인 호안 세가라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를 뿌리치고 나오자, 이번엔 수비수 시그프리드 그라시아가 길목을 막아섰다.
‘쳇, 역시나 이중, 삼중으로 덤벼드는군.’
준영은 개인기로 제치려 했지만, 그라시아는 쉽사리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껌딱지 같은 자식!’
‘후훗, 네 개인기는 이미 다 분석했다.’
사실 그라시아를 제치고 가더라도 또 다른 마크맨이 붙게 될 상황이라 빠져나간다 한들 딱히 소용은 없었다.
하지만 준영은 주변의 동료에게 섣불리 패스를 돌리지 않았다.
가까이서 패스를 받을 만한 동료 주변에도 바르사 선수들이 도사리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좌측면으로!’
공이 있는 곳 근방에 바르사 선수들이 몰려 있다는 건, 측면 쪽은 공간이 있다는 소리.
이에 준영은 무인지경인 공간으로 파고든 레이 윌슨 쪽으로 롱 패스를 건넸다.
공을 건네받은 레이는 과감하게 슛을 쏘았다.
제대로 걸린 유효 슛.
그러나 바르사 골키퍼 안토니오 라마예츠가 이를 펀칭으로 쳐 냈다.
브라이언 클러프가 리바운드 볼을 잡아 재차 슛을 날렸지만, 이 역시 놀라운 몸놀림으로 잡아챘다.
‘진짜 엄청난 순발력이군. 오늘 대체 몇 개나 막은 거야?’
과연 ‘마라카낭의 고양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한 몸놀림.
그러나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라마예츠는 재빨리 롱 킥으로 최전방에 있는 수아레스에게 공을 보냈다.
그 공은 수아레스가 잡아채기 전, 빌 포크스가 끊어 냈다.
“조심해, 빌!”
“앗!”
마치 빌이 차단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2선에 있던 율로지오 마르티네스가 총알같이 달려들어 공을 빼앗았다.
“달려들지 마, 빌리! 지연시켜!”
준영은 황급히 수비에 가세했다.
센터백 빌리 맥닐은 그의 지시대로 지연시키며 마르티네스를 측면 쪽으로 몰았다.
‘좋아, 이제 주장이 중앙으로 들어오면…….’
맥닐이 안도하던 그 순간, 마르티네스가 갑자기 방향을 전환하며 그의 마크를 뿌리쳤다.
‘이건 주장의 주특기인데!’
맥닐이 쫓아가 몸을 날렸지만, 마르티네스의 슛을 막진 못했다.
해리 그렉이 몸을 날렸지만, 그의 손끝을 스친 슈팅은 골대 상단 구석에 정확히 박혔다.
「하아, 또다시 실점…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
라디오 중계 캐스터의 한숨이 길게 터져 나왔다.
0 대 2.
정말 예상 밖의 상황에 올드 트래퍼드가 고요해졌다.
소수의 스페인 관중과 기자들만 쾌재를 부를 뿐.
“유나이티드가 여기서 무너지는 건가?”
“대회 3연패가 쉬운 건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제길, 한 골이라도 넣어 보라고!”
실망과 우울, 분통한 감정이 경기장에 들끓고 있었지만, 맨유는 경기 흐름을 쉬 반전시키지 못했다.
그것은 정규 시간이 모두 끝난 상황에서도 그랬다.
오히려 추가 시간에 빈틈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바르사 공격수들에게 또다시 기회를 내줬다.
“이런, 코츠시스 쪽으로……!”
마르티네스가 찔러 준 패스가 수아레스에게 흐르자, 맨유 수비수들의 시선이 수아레스에게 쏠렸다.
그러자 수아레스는 뒤쪽 발로 절묘하게 중앙 쇄도를 하는 코츠시스에게로 패스를 내줬다.
‘저게 들어가면 끝장이다!’
준영이 황급히 인터셉트를 시도했다.
그러자 코츠시스는 페인트로 접으며, 골대 빈 곳으로 슈팅을 날리려 했다.
바로 그때, 맥닐이 달려들어 코츠시스의 발밑에서 공을 빼냈다.
“나이스 컷!”
“다들 튀어 올라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한 골이라도 만회하기 위해 맨유는 종료 직전 역습에 나섰다.
맥닐의 패스를 받은 바비 찰튼이 질풍같이 달리며 중앙선을 넘어 최전방의 브라이언 클러프에게 침투 패스를 찔러 주었다.
슬쩍 측면으로 돌아 들어간 클러프를 호안 세가라가 막아섰다.
“비켜!”
공을 가볍게 툭 치곤 스피드로 세가라를 제쳐 낸 클러프는 골키퍼 라마예츠와 일대일 기회를 잡았다.
‘망할 고양이 자식! 이번에는 뚫어 주마!’
클러프가 때린 슈팅이 라마예츠의 겨드랑이 사이로 빠져나갔다.
골대 하단 구석을 노렸던 슈팅은 골포스트를 맞고 튕겨 나갔다.
그리고 경기 종료를 알리는 심판의 휘슬이 길게 울렸다.
“이런, C발!”
화가 났던 클러프는 골대를 발로 걷어찼다.
분통을 터트리는 그의 모습이 기자들의 카메라에 선명하게 찍혔다.
***
준결승 1차전 0 대 2 패배.
홈경기에서 패했다 보니 맨유 입장에서는 더욱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맷 버스비 감독은 다음 날 회복 훈련에 나온 선수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애썼다.
“우리는 이보다 더 어려운 상황도 극복해 냈지. 나는 자네들이 이번 위기도 이겨 낼 저력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아.”
“감독님 말씀대로야. 끝날 때까지 끝난 건 아니야.”
버스비 감독에 이어 주장인 준영이 격려하고 나섰다.
그러자 숀이 크게 박수를 치면서 맞장구를 쳤다.
“절체절명이긴 하지만, 그만큼 더 드라마틱한 승리를 만들 수 있는 기회이긴 해.”
“맞아! 이 고난을 이겨 내면 다들 영웅이 될 수 있다고!”
던컨과 바비, 해리 등 팀의 고참 선수들도 동의하며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
그때 클러프가 손을 들며 말했다.
“중요한 전투를 치르기 전에 배신자를 처단합시다.”
“뭐?”
다들 그의 말에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어제 부진했던 선수들을 골라내서 비판하자는 말 같았으나…….
“골대 말이야. 올드 트래퍼드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바르셀로나 놈들 편을 든 녀석을 가만히 둬선 안 돼.”
“나 참, 난 또 뭐라고…….”
“네가 잘못 차 놓고 왜 골대 탓을 하냐?”
어지간히도 어제 마지막 찬스를 날려 먹은 게 신경 쓰였던 모양.
엉뚱하긴 해도 클러프의 너스레는 모두를 웃음 짓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시 힘차게 일어선 맨유 선수들은 27일에 열리는 2차전에 대비한 훈련을 시작했다.
한바탕 땀을 쏟아 낸 그들은 이후 온수가 가득 찬 욕탕에 몸을 담갔다.
다들 처음엔 클럽 하우스의 목욕탕과 사우나 시설을 부담스러워했지만, 요즘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용했다.
온수욕을 하면 회복이 한결 빨랐기 때문이다.
“로마가 왜 강했는지 알 것 같다니까. 이렇게 피로를 풀었으니 싸움도 잘하지.”
“난 요즘 때수건으로 밀지 않으면 목욕한 것 같지도 않더라고.”
이 시기에는 아직 한국에도 때수건이 나오지 않았다.
이에 준영은 조셉 포스터에게 부탁해서 사포 같은 질감을 가진 거친 천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조셉은 이탈리아에서 수입되는 비스코스 섬유로 된 레이온 원단을 추천했다.
그리고 직접 테스트를 해 본 준영은 만족감을 느꼈다.
‘이래서 이태리타올이라 했구만.’
그는 이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한 건 물론, 나2키 상품으로 등록해서 판매했다.
처음에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 어리둥절해하던 이들도 한 번 밀어 보고는 그 쾌감에 홀딱 빠졌다.
“그런데 존, 어제 경기에서 좀 의아한 게 있던데…….”
“뭐가?”
목욕을 끝마치고 나온 후, 던컨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준영에게 말을 건넸다.
“아직도 바르사 녀석들이 약을 빨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쿠벌러 말이야. 왜 어제는 출전하지 않았던 거지?”
바르셀로나의 헝가리 특급 공격수 라슬로 쿠벌러.
그는 어제 출전 명단에도 없었고, 심지어 영국에 오지도 않았다.
“뭐, 부상이거나 선수비 후역습 전술에 안 맞아서 빠진 거겠지.”
“글쎄, 과연 그럴까?”
사실 그 점은 준영도 의문이긴 했다.
전력 분석팀의 친구들이 스페인까지 가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쿠벌러의 기량은 디 스테파노에 전혀 뒤지지 않았으니까.
아니, 발재간에서는 그 이상일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 정도 기량의 선수라면 수아레스나 코츠시스를 밀어내고 주전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공격수들도 나름의 개성과 특기가 있고 쓰임새가 달라. 아마 그렇기에 빠진 게 아닐까 싶어.”
그게 아니면 쿠벌러는 2차전을 위해 아껴 뒀다거나.
지난 시즌 레알 마드리드만 해도 푸스카스를 1차전에 출전시키지 않았다가 홈경기에 내보내지 않았던가.
“듣고 보니 그럴듯한데, 여전히 신경이 쓰여. 어제 경기 끝나고 만났던 기자가 해 준 말 때문인가?”
“기자?”
“아, 개인적으로 친분 있는 사람이야. 경기 전날 에레라 감독이랑 인터뷰를 하면서 쿠벌러에 대해서 물어봤더니 꽤 거북한 기색을 보이더래.”
어째서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혹시 에레라 감독은 쿠벌러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기라도 한 건 아닌지?
‘뭔가 있군.’
감독과 에이스 선수 사이의 대립과 불화.
어디서든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 보니 준영도 이 상황에 대해 던컨만큼이나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
감독과 팀 에이스 간에 마찰이 일어나는 경우는 꽤 많습니다.
보통 선수 경력이 화려한 감독들은 경력발로 압살시키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감독들도 많죠.
위 사진의 히딩크와 호마리우 같은 경우, 히딩크는 팀 분위기를 저해하는 호마리우를 제압하기 위해 일부러 시계 시간을 당겨 놓고 호마리우를 지각으로 몰아붙이거나, 경기에서 제외시키곤 했습니다.
결국 자기가 없어도 팀이 잘나간다는 걸 알게 된 호마리우는 투항하고 말았죠.
이렇게 잘 해결된 사례가 있기도 하지만, 파국으로 치닫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차범근 감독과 현역 시절 최강희가 그러했는데, 1990년대 초에 당시 차범근 감독은 독일식의 규율 축구를 기반으로 한 엄격한 선수 지도와 하드한 훈련을 강조했는데, 최강희는 이것을 탐탁잖아 했습니다.
결국 대놓고 술, 담배를 하며 규율을 어기다가 대판 싸우고 은퇴하고 말았죠.
최강희는 차 감독의 강압을 탓하는데, 아무리 봐도 선수로서 자기 관리를 똑바로 못한 본인의 잘못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