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80화 (280/400)

Round 280. 강력한 도전자

‘저 녀석, 괜찮을지 모르겠군.’

히라키 류조의 상태를 본 준영은 작년 유러피언 컵 4강 2차전을 떠올렸다.

그때 푸스카스의 강슛을 맞고 경미한 뇌진탕 증상을 겪었다.

그 때문에 집중력과 판단력도 뚝 떨어졌고, 신체 반응 속도도 느려졌다.

당시에 몹시 고전했었기에, 지금 같은 고생을 하는 히라키가 안타깝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안됐지만, 승부는 냉정한 법. 봐주지 않을 거야.’

준영뿐만 아니라 맨유의 다른 선수들도 히라키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

당연히 그가 있는 쪽으로 돌파와 침투 패스를 계속 시도했다.

히라키는 이를 막아 보려 애썼지만, 술 취한 듯이 멍한 몸뚱이는 말을 듣지 않았다.

“저 Jap 녀석, 정신 안 차리고 뭐 하는 거야!”

“빌어먹을, 계속 저 자식 쪽으로 뚫리고 있어!”

관중들의 성토에도 불구하고, 히라키의 상태도, 웨스트햄의 열세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렇게 수비 밸런스가 무너진 상황에서도 역전 골을 허용하지 않은 건 바비 무어의 분전 덕분이었다.

그는 쉴 새 없이 좌우로 쏘다니며 히라키가 맡아야 할 공간까지 커버했다.

그 왕성한 활동량과 정확하게 패스와 돌파 루트를 차단하는 솜씨는 준영이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버틸 수는 없어.’

금방 역전 골을 만들지 못했다고 준영은 물론, 맨유 선수들도 성급하게 굴지 않았다.

상대 역습에 충분히 대비해 가면서 수비의 약한 부분을 쉬지 않고 두들겨 댔다.

「웨스트햄의 패스를 끊어 낸 조니 자일스, 캡틴 리 쪽으로 패스해 줍니다. 바비 무어가 달려 나오지만, 그 전에 공은 리의 발밑에서 떠났습니다. 위기입니다!」

준영은 논스톱으로 페널티 박스에 패스를 재빨리 찔러 넣었다.

때마침 측면에서 달려 들어온 존 레논이 그 패스를 건네받았다.

“이런, 텅 비었잖아!”

“으앗, 안 돼!”

웨스트햄 팬들은 골키퍼의 선방을 기대했지만, 레논의 슈팅은 그대로 골대 안쪽 그물을 흔들었다.

맨유의 역전 골.

홈팬들은 한숨을 토했고, 웨스트햄 선수들의 어깨는 축 늘어졌다.

바비 무어의 표정은 누구보다 크게 일그러졌다.

방금 전 존 레논이 슛을 한 위치는 자신의 담당 구역이었으니까.

버벅대는 히라키를 거들고, 요주의 대상인 이준영을 신경 쓰다 보니 정작 자신의 담당 구역을 방치하고 말았던 것이다.

“벌써 역전이라니. 웨스트햄은 최악의 상황을 맞았군.”

“저 일본인 수비수가 계속 저런 상태라면…….”

“패배가 문제가 아니야. 잘못하면 대량 실점이 나올 수 있어.”

기자들이 우려 어린 시선으로 웨스트햄 진영을 바라보는 가운데, 히라키는 필드에 놓인 물병을 들어 머리에 끼얹었다.

물이라도 덮어쓰면 이 얼떨떨한 상태를 떨쳐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이준영의 강슛에 맞은 후유증은 예상보다 더욱 심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수 없는 노릇.

이준영을 이기고 말고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간신히 출전 기회를 잡았는데, 이대로 무너져 버리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지 모른다.

‘버텨라, 히라키! 더 이상 실점을 허용해서는 안 돼.’

히라키가 스스로 다그치고 있을 때, 그의 곁으로 나가누마 겐이 다가왔다.

“도와주마, 히라키.”

“선배…….”

“어차피 내 실력으론 유나이티드 수비를 뚫기 힘들어. 동료 놈들이 패스도 잘 안 해 주고.”

나가누마의 가세로 위태롭게 휘청이던 수비 불안은 약간이나마 안정을 되찾았다.

덕분에 웨스트햄은 추가 실점 없이 전반전을 마칠 수 있었다.

***

후반전에 웨스트햄의 테드 팬튼 감독은 선수들의 위치에 변화를 주었다.

히라키를 미드필드 지역으로 올리고, 대신 하프백이던 켄 브라운을 최후방으로 내렸다.

그리고 나가누마를 히라키의 앞쪽에 붙여 여차하면 지원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래 봤자 미봉책이야. 사실상 11 대 10이라는 상황은 변함이 없다고.’

가장 좋은 방법은 컨디션이 안 좋은 선수는 교체해 주는 것.

그러나 이 시대에는 아직 정규 경기에 선수 교체 규정이 없었다.

예외가 있다면 골키퍼였다.

골키퍼는 못 뛸 정도로 부상을 당하거나 상태가 나쁘면 교체를 허가해 주었다.

‘축구 종가가 먼저 교체 규정을 도입하면 다른 나라나 FIFA에서도 따르지 않을까 싶지만… 그렇게 할 FA가 아니겠지.’

준영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그의 앞쪽 공간으로 패스가 전달되었다.

황급히 달려가 공을 잡은 순간, 나가누마의 태클이 날아들었다.

“死ね, ちょうせんじん!”

발바닥이 보일 정도로 높은 태클.

그러나 준영은 재빨리 공과 함께 태클을 껑충 뛰어넘었다.

“큭, 거기 서라!”

태클에 실패한 나가누마는 곧장 일어나 준영을 쫓아갔다.

단순히 막지 못해 분한 게 아니라, 준영이 가는 쪽에 히라키가 있었기 때문이다.

‘히라키 혼자서 저놈을 못 막아. 도와주지 않으면……!’

사력을 다해 쫓아온 덕분에 다행히 이준영이 히라키를 제치고 가기 전에 도착했다.

광견같이 달려드는 나가누마를 살포시 접어서 제쳐 낸 준영은 히라키의 태클도 스쿱 턴으로 뿌리치고 나왔다.

‘이런 건 사기잖아!’

저렇게 큰 놈이 물 흐르듯 유연한 개인기까지 쓰다니.

히라키가 손을 뻗어 유니폼을 잡아당겼지만, 그것으로도 준영을 저지할 순 없었다.

뻐엉-!

두 일본인을 제치고 날린 중거리 슛이 골대를 향해 무섭게 쭉 뻗어 나갔다.

「골! 유나이티드, 골! 붉은 악마의 주장이 엄청난 골로 해머스의 골대를 흔들어 놓습니다!」

넋을 잃은 웨스트햄 팬들이 머리를 움켜쥐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물론 이와 달리 맨유 원정 팬들과 한국 교민들은 신이 나서 서로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Oh, Captain! Our Captain!”

“대한건아 이준영 만세!”

그렇게 경악과 열광이 교차하는 그 가운데 매의 눈으로 경기를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과연 동양의 거인… 알려진 대로군.”

“확실히 레알 마드리드에 두 번이나 고배를 안길 만한 실력이군요.”

“예상대로 요주의 대상이야. 어떻게든 봉쇄할 방법을 찾지 않으면…….”

스페인어로 열심히 떠드는 그들은 손에 든 무비 카메라로 부지런히 경기를, 준영의 활약을 촬영했다.

마치 그의 모든 것을 낱낱이 연구하고 분석하겠다는 듯이.

***

웨스트햄 원정 경기를 3 대 1 역전승으로 마친 후, 준영은 런던에서 지인들을 만났다.

작년 총선에서 당선된 마거릿 대처와 전시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이었다.

“대처 의원님, 기대했던 정치 최일선에 나간 느낌이 어떠셨어요?”

준영의 물음에 대처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실망스럽더군요. 유치하게 말꼬리를 잡아서 입씨름들이나 하고…….”

대처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자, 처칠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의회는 품위 있는 난장판 아닌가. 지지 않으려면 자네도 부지런히 입심을 키우는 게 좋을 게야.”

“아무튼 공공 기관의 회의에 대중과 언론의 참관을 허가해야 한다고 봐요. 그래야 의원들이 좀 점잖아질 테니까요.”

“글쎄, 오히려 더 튀려는 놈들이 생기지 않을까 싶네만……. 어쨌거나 나는 자네 의견에 찬성이야. 국민들이 정치에 보다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될 테니까.”

그리 말한 처칠은 문득 생각이 난 듯 준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존 자네는 이번에 고국에서 일어난 혁명에 한몫했다지?”

“정작 피 흘리며 싸운 분들은 따로 있는데… 너무 치켜세워 줘서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누가 찍었는지 몰라도 준영이 탱크 앞에서 조재미 준장을 설득하는 사진이 한국은 물론 영국 언론에도 나왔다.

마치 준영이 계엄군을 설득한 것인 양.

“저 혼자였으면 절대 설득이 불가능했을 겁니다. 불의에 맞서 싸운 시민들, 그리고 군에 명망이 있는 오성 장군님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죠.”

“모두가 불의에, 독재에 맞서 싸웠다는 거로군. 훌륭한 일이야.”

미소를 짓던 처칠은 가만히 뭔가를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존, 내가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이야기했었지. 한국이 쓰레기통 같은 나라라고 말이야.”

그에 발끈한 준영은 지금은 쓰레기통일지 몰라도 나중엔 장미꽃이 필 것이라고 장담했다.

어떤 영국 기자가 한국이 발전하는 건 쓰레기통에서 꽃이 피는 것과 같다는 조롱에 빗대어 말한 것이었다.

“난 아직 그 장미꽃이 필지 안 필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새싹이 돋아난 것은 틀림없어 보이는군.”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돋아난 새싹.

그 싹을 틔우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용감하게 피를 흘렸다.

“수많은 이들의 안타까운 희생이 있었지만, 그 긍지 어린 역사는 아름다운 꽃을 피울 원동력이 되겠지. 존, 자네 고국 국민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네.”

“감사합니다, 각하.”

여전히 마음 한편에 희생자들에 대한 연민이 있었던 준영.

그에게 있어 오늘 처칠의 말은 위로가 되기에 충분했다.

***

라 마시아(La Masia).

FC 바르셀로나의 홈구장 캄 노우 북쪽에 자리한 작은 저택이다.

1702년에 지어진 이 오래된 전원주택은 캄 노우가 개장되면서 바르사의 클럽 하우스로 리모델링되었다.

이 클럽 하우스에 딸린 작은 구장에 바르사 선수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렇게 하던가?”

“아냐. 좀 더 부드럽게 돌면서 발 안쪽을 사용하는 거라고.”

주장인 호안 세가라를 비롯해 공격수 라슬로 쿠벌러, 루이스 수아레스, 산도르 코츠시스, 율로지오 마르티네스 등등.

바르사의 간판선수들은 존 Y. 리의 개인기를 분석 중이었다.

월드컵과 유러피언 컵에서 그 동양의 거인이 펼친 발재간은 이미 영상으로 널리 퍼졌다.

바르사에서도 그 영상을 보고 기술을 훔쳐 배운 선수들이 있을 정도.

“이건 아무리 봐도 남미식 기술 같은데……. 그 동양인은 어디서 이런 기술을 배운 걸까.”

“난들 알겠냐. 중요한 건 그 녀석의 개인기를 분석해서 막아 내는 거라고.”

바르사는 곧 있을 유러피언 컵 4강에서 존 Y. 리가 있는 맨유와 맞붙는다.

멍청한 마드리드 놈들처럼 고배를 마시지 않으려면, 상대를 낱낱이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양발잡이라서 더 성가셔. 거기다 덩치도 있고 발도 빨라서 그냥 치고 갈 수도 있고…….”

“이놈 한국 출신이지? 어이, 산도르, 너 월드컵에서 한국이랑 경기했다고 했지?”

쿠벌러의 물음에 산도르 코츠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1차전 한국전에서 그는 해트트릭을 기록했었다.

“한국 놈들, 성향이 어때? 이놈처럼 덩치도 좋고 발 기술도 뛰어나?”

“덩치는 동양인치고 좋은 편이었지만, 기량이 뛰어나다는 느낌은 없었어요.”

체력도 약해서 후반전이 되기 전에 죄다 퍼져 버렸다.

탈진해서 실려 나가는 선수도 여럿 나와서 저러다 몰수 패를 당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끈덕진 구석은 있었죠. 특히 골키퍼가 그랬어요.”

“그럼 참고가 안 되겠네. 완전 별종이란 소리니까.”

바르사 선수들은 늦게까지 훈련장에 남아 분석에 열을 올렸다.

밤에는 영국을 다녀온 분석관들이 가져온 영상을 보며 상대의 움직임을 뇌리에 새기고 어떤 식으로 막아 낼지 계속 생각했다.

‘반드시 이긴다! 이번 시즌 유럽 챔피언은 우리야.’

‘마드리드 놈들도 한 우승을 우리가 못할쏘냐!’

질 수 없음.

자존심을 걸고 경기를 준비하는 바르사 선수들은 전의를 뜨겁게 불태웠다.

***

라슬로 쿠벌러는 당시 걸출한 실력으로 바르사에 있어 디 스테파노의 대항마가 되는 선수였습니다.

실력이 출중한 만큼 인기도 많아서 바르셀로나의 아이돌로 사랑받았다고 하네요.

그는 혈통이 복잡했는데, 아버지는 슬로바키아 출신의 헝가리인이었고, 어머니는 폴란드 사람이었죠.

거기다 군대 가기 싫어서(…) 이 나라, 저 나라 옮겨 다니며 축구를 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 스페인의 국가대표 선수로 뛰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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