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79화 (279/400)

Round 279. 새로운 싸움을 준비하며

“형님들도 4월 말에 경기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준영의 물음에 최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마 올림픽 최종 예선? 혁명도 마무리되었으니 서둘러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럴 틈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승만의 하야가 발표되었다지만, 계엄령은 아직 해제되지 않았다.

정치하는 분들은 선거를 다시 치러서 새 정부를 구성할지, 수석 국무위원인 허정을 중심으로 과도 내각을 수립할지 한창 의논 중이었다.

거기다 자유당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경찰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다 보니, 헌병을 비롯한 군인들이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치안 업무에 특무대 역시 동원되었고, 특무대에 소속된 축구 선수들도 예외는 될 수 없었다.

“듣자니 경남에선 군인들이 관공서 업무까지 맡았다고 하더군.”

“아니, 그걸 왜요?”

“혁명 때문에 공무원들이 출근을 안 했거든. 거기다 공무원들이 그동안 해 온 일 처리가 최악이었대.”

사실 그건 비단 경남만 그렇지 않았다.

서울 시청이나 각 행정 부서의 업무 처리도 별반 차이가 없다고.

“자유당이 박살 난 건 좋은데, 어째 더 혼란스럽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확실히 골치 아프겠군요. 아무튼 제가 어떻게든 힘닿는 데까지 도울 테니, 형님들도 힘내십쇼.”

“그래, 고맙다.”

험한 산을 하나 넘었지만, 아직 목적지는 멀고 길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기로 결심한 준영과 이 시대 한국 축구의 레전드들은 계속 앞으로 나갔다.

***

준영이 다시 영국으로 떠나는 날.

이억관 일가나 강윤의 가족 등, 공항에 나온 여러 사람들 속에 김홍일도 있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시네요.”

“아, 사람들 만나서 설득하고 합의해 주느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야.”

4월 혁명을 거치며 김홍일은 유력한 차기 대통령감으로 부상했다.

과거 전적도 빼어난 데다, 민관군에 두루두루 명망을 얻은 인물이기 때문.

주변의 기대가 큰 만큼 김홍일 역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꿈을 꾸었어. 분명히 서울인데, 내가 아는 서울 풍경하곤 사뭇 다르더군. 마치 미국처럼 마천루들이 솟구쳐 있는 거야.”

“그래요? 신기했겠네요.”

준영은 혹시 오성 장군이 21세기의 풍경이라도 본 건가 싶었다.

그리고 김홍일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렴, 신기했지. 먼 훗날 대한민국이 아닌가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더군.”

도로엔 차들이 즐비하고, 공장에서는 쉴 새 없이 상품을 생산했다.

항구에는 수출입 화물들이 가득 쌓여 있었으며, 들판에는 대풍을 알리는 황금빛 나락이 춤을 추었다.

“참으로 풍요로운 나라가 되었구나 싶더군. 그런데… 표정이 어두운 사람들이 많았어. 특히 젊은이들이.”

‘아… 진짜 미래를 제대로 보셨네.’

21세기 한국은 선진국 반열에 올랐지만,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들로 골치를 앓았다.

특히 청년들은 취업을 비롯해 여러 고민거리를 안고 있었다.

“그런 풍요를 누리는데도 수심이 깊은 걸 보면, 아마도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일이 있는 게 아닌가 싶더군.”

“어떤 시대든 난관과 고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홍일은 준영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거야. 그러니까 꿈에서 본 것보다 더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먼 미래의 아이들이 겪게 될 고난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도록…….”

“네, 반드시 그래야죠.”

역사는 변하고 있다.

정해진 운명을 따라가는 듯하면서도 여러 가지가 달라졌다.

준영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김홍일의 바람대로 더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잘 가게, 이 군. 앞으로도 좋은 활약을 펼쳐서 국민들에게 힘과 자긍심을 주게나.”

“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김홍일과 굳은 악수를 나눈 준영은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리고 새로운 싸움이 기다리는 머나먼 서쪽을 향해 날아갔다.

***

올 때처럼 기나긴 항행을 거친 끝에 준영은 맨체스터로 돌아왔다.

“준!”

공항에 마중 나온 리즈는 준영이 나타나자 곧장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다녀왔습니다, 여왕님.”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준영이 떠나고 리즈는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갑자기 한국으로 간 이유가 자신에게 말한 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닌가 하고서.

중간에 괜찮다는 연락이 왔음에도 내내 마음을 놓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그의 품에 안기자, 그 모든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잘 돌아왔네, 존.”

“주장, 기다리다 눈이 빠질 뻔했어요!”

알버트를 비롯한 가족들과 팀 동료들도 마중 나와 준영을 반겼다.

그들의 밝은 미소를 보고 있자니 준영은 그동안의 긴장이 싹 풀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아 참, 내가 없는 사이 경기들은 어떻게 됐어?”

“두 경기 다 이겼어요. 근데 데니 녀석이 페널티킥을 실축해서 힘든 경기를 했죠.”

준영의 물음에 답한 알렉스 퍼거슨의 말에 데니스 로는 발끈했다.

“누구 때문에 힘든 경기를 했는데! 자책골이나 넣은 주제에!”

“수비하다 어쩔 수 없이 그런 거라고! 그리고 만회하려고 페널티킥 얻어 냈었잖아! 남이 애써 얻은 걸 날려 먹은 주제에……!”

두 녀석이 아웅다웅하는 걸 보니 팀은 여전한 모양.

공항 근처 호텔에서 모두와 함께 간소하게 귀환 축하 파티를 즐긴 준영은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꿀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팀 훈련에 합류했다.

“여독이 있을 텐데 쉬는 게 좋지 않나?”

버스비 감독의 우려에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몸을 둔하게 만들기 싫어요. 유러피언 컵 준결승 상대도 만만찮으니까…….”

“그렇다면 더 만류하진 않겠네. 하지만 절대 무리해선 안 돼. 알겠나?”

준영이 없는 동안 던컨이 주장을 맡아서 팀을 잘 이끌었다.

하지만 준영이 있을 때와 없을 때 팀 전력 격차는 컸다.

수비 안정감이나 공격 전환 속도, 점유율 등등, 준영이 없을 때는 아쉬운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존이 없어도 유나이티드는 강하다. 하지만 그가 없이는 챔피언이 되긴 어려워.’

리그 우승을 리버풀이 확정한 상황에서 맨유가 노릴 것은 FA컵과 유러피언 컵뿐.

이 중에서 버스비는 유러피언 컵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번에 우승하면 남미 챔피언과 인터콘티넨털 컵에서 맞붙을 수 있으니까.

거기서 우승하면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클럽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버스비는 준영이 무탈하게 시즌을 끝내 주길 바랐다.

‘다행히 한국을 다녀와서 그런지 존의 마음도 훨씬 홀가분해 보이는군.’

그렇기에 곧 있을 중요한 경기에서 보일 활약도 기대가 되었다.

구슬땀을 흘리는 준영을 바라보는 버스비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

봄 내음이 물씬 풍기는 4월 중순.

업튼 파크, 혹은 불린 그라운드라고 불리는 런던 동쪽의 경기장에서는 홈팀인 웨스트햄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리그 38라운드 경기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미 우승 팀은 결정 났고, 하위권에서는 살벌한 강등전이 벌어지는 중이다.

웨스트햄은 현재 13위였지만, 오늘 경기까지 포함해 아직 5경기가 남아 있었다.

그사이 승점 관리를 잘못하면 자칫 강등이란 지옥으로 굴러떨어질 수 있었다.

“근데 왜 주전들이 별로 없는 거지?”

“남은 일정이 빡빡하잖아. 만만한 팀을 확실히 잡자면, 상위권 팀과의 경기는 버리면서 전력을 보존할 필요가 있는 거지.”

사실 일정 문제 때문에 선발에 변화를 준 건 맨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취재 기자들의 예상과 달리, 준영은 오늘 경기에 출전했다.

둔해졌을 경기 감각을 다시 날카롭게 갈아 놓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맞붙게 되었지만…….”

“필드에서 직접 보니 진짜 괴물이네요.”

오늘 경기 웨스트햄 출전 명단에 오른 공격수 나가누마 겐과 수비수 히라키 류조는 준영의 위압적인 체격에 혀를 내둘렀다.

후배 가와부치는 이놈과 볼 경합을 하다 쇄골이 부러졌다.

아무리 그래도 겨우 그 정도로 부상을 당할 수 있나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물러설 수 없다!’

‘응원하러 와 준 국민들을 위해서라도!’

두 일본인 선수가 각오를 다지는 사이, 심판이 킥오프를 알리는 휘슬을 불었다.

“頑張れ, 長沼! 頑張れ, 平木!”

“이. 준. 영! 이. 준. 영!”

경기가 시작되자, 관중석에 있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사람들이 목이 터져라 응원을 펼쳤다.

태극기와 일장기가 휘날리고, 꽹과리와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 치열한 한일전 열기에 영국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저 사람들, 갈라놓길 잘했군.”

“경기 시작 전에 장외에서 이미 치고받았으니 말이지.”

경찰과 경기장 용역들이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는 사이, 웨스트햄이 기선을 제압했다.

바비 무어가 전진해 들어오면서 찔러 준 패스를 건네받은 공격수 말콤 머스그로브가 때린 중거리 슛이 우측 골포스트를 맞히고 들어갔다.

기가 막힌 선제골에 웨스트햄 팬들이 일제히 함성을 터트렸다.

“요시! 잘했다, 나가누마!”

“골을 넣은 건 영국 선수인데?”

“나가누마가 수비수를 잘 끌어내 줘서 말콤이 슛을 때릴 수 있었던 거야!”

일본인들도 덩달아 신이 나 있을 때, 맨유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조니 자일스가 측면으로 달려가는 존 레논에게 패스를 건네주었고, 레논은 중앙으로 날카롭게 크로스를 올려 보냈다.

숀 코너리가 달려들어 헤딩슛을 시도했지만, 그 전에 히라키 류조가 재빨리 걷어 냈다.

“오, 히라키도 기합이 제대로 들어가 있는데?”

“저것 봐. 나가누마가 공을 잡았다!”

히라키가 걷어 낸 공을 잡은 웨스트햄의 미드필더 필 우스남이 나가누마에게 패스를 건넸다.

하지만 나가누마가 치고 나가려는 순간, 이준영이 달려와 먼저 길목을 막고 나가누마를 밀어냈다.

“컥!”

밀려 나간 나가누마는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나동그라졌다.

라인 밖의 A보드 광고판까지 굴러간 그를 보고 준영은 순간 당황했다.

‘저거 시뮬레이션 액션을 한 건가, 아님 피지컬이 봉다리급인가?’

어쨌거나 심판은 휘슬을 불지 않았다.

곧장 동료에게 패스를 건넨 준영은 웨스트햄 진영으로 달려 들어갔다.

「유나이티드 캡틴 리, 짐 박스터의 리턴 패스를 받아 웨스트햄 골문 앞으로 접근합니다. 이를 막아서는 바비 무어…….」

쉴 새 없이 혀를 놀리는 중계 캐스터처럼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이준영과 바비 무어에게 쏠렸다.

표범처럼 잔뜩 몸을 낮춘 바비 무어는 준영이 등을 돌려 물러나는 순간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방향을 바꾼 준영이 그를 벗겨 내고 페널티 박스 안으로 들어와 슈팅 자세를 잡았다.

“막아, 얼른!”

골키퍼의 다급한 외침에 히라키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뻐엉-!

“……!”

준영의 강슛이 히라키의 얼굴을 맞고 골대를 넘어갔다.

웨스트햄 팬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가운데, 준영은 벌렁 나자빠진 히라키에게 손을 건넸다.

“야, 괜찮냐?”

“大丈夫, 오케, 노 프라블러무.”

준영의 손을 잡고 일어난 히라키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눈앞은 어질어질하고, 술에 취한 것처럼 다리는 휘청거렸다.

그냥 주저앉고 싶었지만 지금은 경기 중.

정말 어렵게 얻어 낸 출전 기회인 데다, 반드시 쓰러트려야 할 숙적을 상대하는 중이다.

그러니 물러설 수 없다! 절대로!

“골! 동점 골!”

“잘했어요, 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상대 팀의 환호성.

히라키는 골 셀레브레이션을 하는 맨유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언제 경기가 재개되었고, 언제 골이 들어간 것인지?

“이 얼간이가! 뭐 하고 있었던 거야!”

“공이 올 때 같이 점프라도 했어야지!”

히라키는 동료들의 사나운 질책보다 준영의 측은한 시선이 더 쓰리게 느껴졌다.

적에게 동정을 사다니, 정말 굴욕이 아닐 수 없었다.

***

히라키 류조는 1954년 일본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1962년까지 서른 번의 국제 대회에 출전했습니다.

이 당시 일본 축구가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선수로서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축구 행정가로서는 상당히 많은 업적을 남기며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올라갔습니다.

J리그 나고야 그램퍼스 초대 감독을 맡기도 했는데, 이때 게리 리네커를 잠깐 지도하기도 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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