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78화 (278/400)

Round 278. 용서할 수 없는 대죄

「국민 여러분, 우리가 이겼습니다! 자유 대한의 민주주의가 승리했습니다!」

앰프를 단 트럭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억관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성급하군. 아직 상황이 끝난 것도 아닌데…….”

“뭐, 대세는 이미 기울었으니까요.”

준영의 말대로 혁명은 국민의 승리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이에 시위에 참여했던 시민과 학생들도 일상으로 되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경찰 대신 교통정리도 하고, 어지러워진 거리를 청소하는 이들도 있었다.

계엄군에서 신경 쓰는 시위대의 총기 반납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물론 밝고 활기찬 일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덕수야, 이놈아… 으흐흑!”

“아이고! 이 어미는 어찌 살라고! 아이고!”

시내 곳곳에 마련된 안치소에서 유족들의 애끓는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희생자 집계를 하러 온 군인과 기자들은 고개 숙여 정중히 조의를 표했다.

준영도 여러 곳에 문상을 가서 유족들을 위로하고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었구나.’

태극기로 덮인 관들이 무수하게 늘어선 광경에 그는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혁명이 성공했다는 기쁨도 수많은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을 보는 순간 깡그리 증발해 버렸다.

‘내가 바꾼 역사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죽었을지 몰라. 그것도 더 많이…….’

마음이 무거웠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순 없었다.

조금이라도 원래 역사보다 더 좋은 미래를 만들어야 저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아, 이준영 선수, 여기 있었군요.”

준영은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누군가 했더니 탱크를 막으러 갔을 때 만났었던 15사단의 조재미 준장이었다.

“준장님도 조문을 오신 겁니까?”

“그렇소. 유족들이나 시위대 대표들에게 전할 말도 있어 겸사겸사 찾아왔소.”

조재미는 이승만 대통령이 민주당과 시위대 대표를 만나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각하께선 이준영 선수도 지목했소. 내일 경무대로 가게 될 테니 준비하시오.”

‘뭐야, 날 만나서 무슨 소릴 하려고?’

어리둥절했던 준영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조재미에게 부탁했다.

“준장님, 특무대 영창에 지금 최정민, 함흥철 선수가 투옥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석방시켜 주십시오.”

“아, 그건 염려 마시오. 이미 특무대팀 사람들을 만나서 사정을 들었으니까.”

조재미의 말에 따르면 특무대팀 선수들은 계엄군이 시위대 편에 서는 걸 보고 냉큼 합류했다고 한다.

“그보다 나도 개인적으로 부탁이 있소. 좀 조용한 곳으로 갑시다.”

무슨 부탁이려나.

준영을 안치소 밖으로 데리고 나온 조재미는 주변을 둘러보다 펜과 수첩을 건넸다.

“사인 좀 해 주시오. 아들놈이 이준영 선수 팬인데… 그래도 이런 시국에 사인이나 받고 있으면 눈총을 받게 될 테니까……”

“아, 예.”

혹시 뭔가 특별한 부탁이라도 하려나 싶었건만.

피식 웃음을 지은 준영은 조재미의 수첩에 시원하게 서명을 해 주었다.

***

다음 날.

준영은 계엄군의 차를 타고 경무대를 찾아갔다.

“각하께선 이미 오전에 장면과 시위대 대표, 그리고 김홍일과 이범석을 만나 향후 행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래요? 도대체 날 뭐 하러 부른 건지…….”

상대적으로 만만한 축구 선수를 상대로 불만과 푸념이라도 늘어놓을 생각일까.

전혀 의도를 알지 못한 상태로 준영은 이승만과 대면하게 되었다.

“어서 오게, 미스터 리.”

“예,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상과 달리 이승만은 미소를 지으며 준영을 맞았다.

다만 뭔가 맥이 빠지고 시무룩해 보였다.

“듣자니 올해는 우승을 놓치게 되었다던데? 최근엔 퇴장까지 당하고…….”

“아쉽지만 늘 이기거나 잘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래, 그렇지. 잘될 때가 있으면 못 될 때도 있는 거니까.”

수긍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이승만은 커피로 입을 축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듣자니 자네가 이번 혁명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하더군. 계엄군의 마음을 돌려세웠다던데?”

“공이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닙니다. 당연한 사실을 알려 주었을 뿐이니까요.”

“당연한 사실을 말할 때도 용기가 필요한 경우가 있지. 그런 점에서 자넨 범상한 사람은 아니야.”

그 비범한 능력을 자신을 위해 써 줬으면 좋았을 것을.

내심 아쉬워하던 이승만이 말했다.

“내가 오늘 자네를 부른 건, 자네가 국민들에게 독재를 타도하라고 부추긴 이유를 묻고 싶어서였어. 이 늙은이가 그렇게 많이 잘못한 것 같던가?”

“예.”

“허허허… 거참 딱 잘라서 말하는군.”

섭섭한 기색을 보이던 이승만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 늙은이가 과욕을 부린 것은 사실이야. 밑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한 것도 많지. 하지만… 정도를 걷기엔 이 나라의 상황이 수월하지 않았어.”

해방 후 찾아온 냉전.

국내 정치는 어지럽고, 중요한 경제 기반도 안정적이지 못했다.

거기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간다 싶던 순간 전쟁이 터지고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었다.

“나도 미국에서 살아 봐서 잘 알아. 민주주의가 가장 선진적인 정치 체제이지. 하나 기본적인 삶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사상도 공염불이 되고 말아.”

그것은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만 봐도 알 수 있다.

바이마르는 가장 선진적인 민주 헌법을 갖고 있었지만 극심한 경제난 앞에 정부는 붕괴되었고, 국가는 나치즘에 잡아먹혔다.

“우리에겐 통일이라는 숙제가 있었고, 그 전에 공산당과 체제 경쟁에서 승리해야 했어. 그리고 부국강병을 이뤄 강대국들 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목표 또한 존재하지.”

“그래서 부득이하게 독재 정치로 나라를 발전시키려 했다 이겁니까?”

미래에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비겁한 변명이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고.

하지만 준영의 생각은 달랐다.

“각하, 이렇게 된 게 각하나 자유당이 독재를 한 걸 두고 국민들이 화가 나서 그런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일어난 게 이번 혁명 아닌가?”

“아뇨. 잘못 생각하셨습니다.”

이승만이 읊은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집권 세력의 부정을 알면서도 그들은 이해했다.

냉전이니까, 북한과 전쟁 중이니까, 어떻게든 빈곤을 벗어나야 하니까.

그렇게 참고 또 참다가 여기까지 왔다.

“각하와 자유당은 미래를 짓밟았습니다. 사람들이 화가 난 건 그 때문이라고요.”

“미래라…….”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란 기대.

이번에 자유당 정권은 사람들의 그런 기대를 짓뭉갰다.

대놓고 부정 선거를 저질렀고, 이에 항거하는 어린 학생을 무참하게 살해해서 바다에 던져 버렸다.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겼고, 미래에 나라의 주역이 될 새싹은 짓밟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누가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준영의 낮고 강한 일갈에 이승만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외국에서 잘 알려진 유명 인사이자,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이 청년은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그가 가진 영향력이라면, 훗날 자신의 평가가 달라질 수 있을 거란 기대가 들었으므로.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런 기대도 허튼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미래를 짓밟은 죄라……. 확실히 큰 죄로군.”

이 나라의 국부로 부강한 통일 국가 대한민국을 꿈꾸며 헌신해 왔다고 생각했건만.

자신이 한 일이 그 미래를 짓밟은 것이었다니!

새삼 이승만은 자신이 늙고 추한 괴물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이보게, 미스터 리. 이 늙은이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함세.”

“말씀하십시오.”

이승만은 처음 준영을 맞을 때보다 더 허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네는 나처럼 되지 말게. 이 늙은이처럼 추하게 늙지 마.”

사람은 변한다.

올바르게 바뀔 때도 있지만, 형편없이 타락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준영은 자신도 예외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방금 말씀은 가슴에 새겨 두겠습니다.”

“그래, 이야기는 끝났으니 이만 나가 봐.”

준영은 힘없이 어깨를 떨군 늙은 대통령을 두고 경무대를 떠났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이승만의 하야가 언론에 발표되었다.

***

혁명이 끝난 뒤에도 준영은 며칠 더 한국에 머물렀다.

친척 핑계를 대며 할아버지 가족의 생활도 살펴 주고, 겸사겸사 미스터리 푸드 지부나 승리제화 등의 현황을 살피기도 했다.

한국 축구인들과 만남도 가진 것은 물론이다.

“진짜 그땐 죽는 줄 알았다니까. 아우님 아니었으면 벌써 총살당했을지도?”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다 국민들이 피 흘린 덕분이죠.”

상관에게 당한 폭행의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던 최정민과 함흥철은 붕대와 반창고로 얼굴을 두르고 있었다.

그래도 일이 좋게 끝났기 때문인지 두 사람 모두 표정은 밝았다.

“아무튼 이번 혁명 때문에 특무대나 군부 분위기도 좀 시끄럽더라고.”

김창룡과 비슷하게 평소 이승만이나 자유당을 지지하던 이들은 축출당하고 있다고.

한편으로 이 기회에 공을 세우지 못했다며 뒤늦게 숟가락을 얹으려 한 이들도 있었다.

“그저께 육사 생도들의 혁명 지지 행진만 해도 그렇지.”

“그거 오성 장군께선 무척 안 좋게 보던데요.”

신문에 떠들썩하게 난 그 일은 육사 11기 출신의 장교들이 후배들을 부추기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자발적이지도 않고 때늦은 숟가락 얹기이다 보니, 김홍일은 꽤 불쾌하게 여겼다.

‘군인이란 놈들이 정치적인 계산을 하고 이딴 짓을 하다니……. 아주 싹수가 노란 놈들이야. 싹 다 쫓아내 버려야 해.’

현재 군부에서 김홍일의 위상과 영향력이라면 철부지 장교 몇 명 쳐 내는 건 일도 아니다.

문제는 그 사건의 주동자들 중에 훗날 대통령이 되는 사람이 둘이나 있다는 것.

바로 머머리 전 씨와 보통 사람을 자처하던 노 씨였다.

‘그 둘이 군부에서 쫓겨나면 역사가 상당히 달라지겠군.’

사실 그들보다 당장 1년 후에 일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문제의 박 씨는 부산에서 군수사령관으로 재직 중인데, 이번 사태에서 중립으로 일관했다.

다만 은근슬쩍 두각을 드러내고 싶었던지, 언론에 이번 사태와 관련해 ‘혁명 후 질서 확립을 위한 소고’라며 장문의 기고문을 올렸다.

대강 프랑스 대혁명 직후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예로 들면서, 이를 방지하는 데 민관군이 모두 협력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내용 자체는 옳긴 한데……. 그래도 요주의 대상이니, 오성 장군에게도 미리 일러둬야겠군.’

준영이 그리 마음먹었을 때, 함흥철이 말을 건네 왔다.

“이봐, 아우님, 뭘 그렇게 골몰히 생각하고 있어?”

“그냥 앞으로 어찌 될까 생각했죠. 뭐, 다른 거 걱정하기 전에 남은 시즌 경기들이나 신경 써야겠지만요.”

“남은 경기라……. 리그 우승은 이미 실패했다고 들었고, 남은 건 FA컵이랑 유러피언 컵인가?”

“예, 곧 있으면 유러피언 컵 4강전인데, 올해도 상대가 만만치 않아요.”

상대는 울버햄프턴을 대파하고 올라온 FC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와 함께 현재 스페인 프리메라 디비시온을 양분하는 강팀이다.

지난 시즌 저승사자 군단을 밀어내고 리그 우승을 차지한 그들은 21세기 못지않은 스타 군단.

유러피언 컵 3연패에 도전하는 맨유와 준영에겐 매우 강력한 도전자였다.

***

1959-60 시즌 바르셀로나 주전 선수들입니다.

루이스 수아레스를 비롯해 50년대 세계 최고 스트라이커로 꼽히던 라슬로 쿠벌러, 산도르 코츠시스, 크루이프 턴의 베타 버전인 마르티네스 턴의 창안자 율로지오 마르티네스 등이 뛰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언급된 수아레스는 우루과이의 흡혈귀(…)와 다른 사람이니 착오 없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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