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77화 (277/400)

Round 277. 국민의 군대

김홍일이 탱크 바로 앞에 당도하자, 전차장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머뭇거렸다.

그건 도보로 행군 중이던 장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성 장군이다.”

“김홍일 장군께서 직접…….”

병사들은 물론, 장교들도 감히 나서지 못하고 쩔쩔맸다.

결국 부대 지휘관이 나섰다.

황급히 달려 나온 그는 다짜고짜 행군을 멈춰 버린 김홍일에게 깍듯이 경례했다.

“15사단 사단장 조재미입니다.”

“반갑군… 이라고 할 상황이 아니니 유감이로군.”

조재미 준장에게 거수경례로 답례한 김홍일이 말을 이어 나갔다.

“제군들이 나선 걸 보니, 송요찬 그 친구도 결국 결정을 내린 모양이군.”

김홍일의 말을 듣고 있던 준영이 곁에 있던 이억관에게 나지막하게 물었다.

“송요찬이 누굽니까?”

“육군참모총장이야. 현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사람이지.”

송요찬은 ‘호랑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거침없고 전공이 뛰어난 맹장.

하지만 공비 토벌과 전쟁에서 민간인 학살로 악명을 떨치기도 한 인물이기도 했다.

“고지식해서 위에서 시키면 그냥 저질러 버리는 작자야.”

‘으윽, 그런 사람이 결정을 내렸다면…….’

준영은 긴장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가 아는 역사에서 4.19 혁명은 국민이 승리했다.

하지만 현재의 4월 혁명은 그때보다 이르게, 그리고 더 격렬하게 진행 중이었다.

만약에 여기서 역사와 다르게 진행이 된다면?

준영이 진땀을 빼는 가운데 김홍일과 조재미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조 준장, 자넨 현 시국을 어떻게 생각하나?”

“중장 각하, 저희는 정치는 모릅니다. 그저 폭동을 진압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시행하러 가는 중입니다. 중장 각하께서도 이해하실 거라 믿습니다.”

조재미의 말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비켜요’.

그러나 김홍일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현재 상황이 누구 때문에 벌어졌는지 모른단 말인가?”

“현재 혼란한 상황을 틈타 철책 너머 북괴 놈들이 넘어오지 않을까 우려할 뿐입니다.”

현재 남북은 휴전 중이고, 북한의 대남 도발도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므로 조재미의 말에도 분명 타당성이 있다.

“그렇다면 자네들은 최대한 빨리 이 사태를 정리하고 싶겠군.”

“그야 당연히…….”

“그렇다면 날 먼저 쏴라. 난 제군들의 첫 번째 걸림돌이다.”

김홍일의 발언에 조재미는 진땀을 흘렸다.

다른 정치인이 나와서 이런 얘기를 했다면 부하들을 시켜 정중히(?) 끌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김홍일이다.

독립운동가, 전쟁 영웅으로 명망이 높은 데다, 해방 후에는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맡으며 장교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다.

외교관을 은퇴한 후의 행보는 또 어떤가.

정부는 물론, 모두가 군을 등한시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선배 군인으로서 장병들을 위로, 격려해 주었다.

거기다 상이용사들의 생계를 해결해 주기 위해 발품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분에게 감히 총구를 겨누었다간, 당장 그놈의 머리에 구멍이 뚫리고 말 것이다.

“제가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이준영 선수?’

머뭇거리는 조재미에게 가까이 다가온 준영이 말했다.

“대한민국 국군은 누구를 위해 싸웁니까? 자유당입니까, 아님 이승만 박사입니까?”

“국토를 방위하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는 게 국군이요.”

조재미는 그런 물음 자체가 불쾌하다는 기색으로 대답했다.

준영은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잘 알면서 왜 보호해야 할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려는 겁니까?”

“우리는 폭도들에게서 국민을 보호하려는 거요.”

“그래요?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본데요.”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시오?”

사실 조재미도 내심 준영의 말이 옳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뜻이 그렇다고 군을 멋대로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

그렇기에 이준영이 타당한 근거를 모든 장병들에게 똑똑히 알려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아시겠지만, 전 축구 선수입니다. 맨체스터라는 지역을 대표해서 뛰고 있고, 그래서 맨체스터 시민들이 저나 저희 팀 선수들을 무척 좋아해요.”

“그래서?”

“지금 구경하는 시민들 눈빛을 보세요. 여러분이 진짜 국민들을 보호하러 온 거라고 생각했으면, 저 사람들이 박수와 환호를 보냈을 테죠.”

준영의 말이 맞았다.

지금 도로변에서 군인들을 바라보는 서울 시민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불안감과 못마땅한 기색뿐이었으니까.

“준영 군의 말이 맞네, 조 준장. 국민의 미움을 받는 군대는 더는 국군이라 할 수 없어.”

“중장 각하…….”

김홍일의 말에 조재미는 결심을 굳혔다.

그러곤 다시 한번 경례를 올리며 말했다.

“맹세컨대, 국군은 결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총을 겨누지 않을 겁니다.”

그의 진심 어린 다짐에 준영과 김홍일은 반색을 했다.

그리고 이억관은 지켜보는 시민들을 향해 외쳐 댔다.

“여러분! 국군은 국민의 편이 되겠답니다! 국군이 우리 편이 되었어요!”

이억관의 외침에 불안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터트리며 달려 나왔다.

우르르 몰려나온 시민들은 장병들을 얼싸안거나 악수를 청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울한 고요함이 흐르던 거리는 떠들썩한 환희로 가득 찼다.

“대한민국 국군 만세!”

“자유 민주주의는 승리한다!”

흥분한 사람들은 탱크와 트럭 위로 올라가 태극기와 피켓을 흔들었다.

준영이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조재미 준장이 김홍일에게 협조 요청을 했다.

“중장 각하, 각하께서 시위대가 무장한 총기를 반납할 것을 설득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군들이 진짜 폭도들을 쫓아내 준다면 시민들이 알아서 반납할 걸세.”

“진짜 폭도라면…….”

“어디에 있는지 귀관도 알고 있을 거라 믿네.”

김홍일이 힐끔 눈짓으로 가리킨 방향.

거기에는 경무대가 있었다.

***

종로 3가.

수만 명의 시위대가 경무대 쪽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독재 정권 물러나라!”

“물러나라! 물러나라!”

계엄군이 서울로 진입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대통령을 만나 담판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를 그냥 두고 보고 있을 경찰이 아니었다.

그들은 곧장 도로를 봉쇄하고 접근해 오는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고 최루탄을 날렸다.

선두에 있던 수십 명이 쓰러지며 시위대가 주춤했다.

그때 경찰들의 사격이 멈췄다.

“뭐 하고 있나. 계속 사격해! 폭도들을 접근시키지 말란 말이다!”

“총경님, 저기…….”

주춤하는 시위대 앞쪽으로 어린아이들이 나타났다.

이제 국민학교에 다닐 만한 나이대의 꼬마들은 제법 그럴듯한 현수막과 피켓까지 들어 가며 외쳐 댔다.

“독재 반대!”

“경찰은 언니, 오빠들에게 총을 쏘지 마라!”

기겁한 시위대가 만류하고 나섰지만, 병아리 같은 아이들의 외침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보는 경찰들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아, 이제는 저런 코흘리개들까지…….”

집에 가면 저만한 자식들이 있는 이들은 심한 자괴감이 밀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총경이 펄펄 뛰었다.

“뭐 하는 거야! 빨리 쏘란 말이다! 빨갱이는 늙다리고 애새끼고 싹 다 죽여야 해!”

눈에 핏발이 선 총경의 닦달에 경찰들이 다시 총구를 들어 올리던 그때,

그르르르릉!

땅울림과 요란한 소음이 울린다 싶더니 거리에 탱크들이 나타났다.

“도망쳐! 탱크다!”

“계, 계엄군이 왔다!”

놀란 시위대는 황급히 부상자들을 부축해서 도망쳤다.

그 광경을 보며 총경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후후, 이제야 왔군. 이제 빨갱이 새끼들을 싹 다…….”

“초, 총경님, 탱크가 우리 쪽으로 옵니다!”

“뭐?”

왜 시위대를 쫓아가지 않고?

황급히 확성기를 든 총경이 외쳤다.

“거기 선두의 탱크, 멈춰라! 당장 멈추란 말이다!”

탱크들은 계속 전진해 왔다.

심지어 탱크 포신까지 이쪽으로 향한 채로.

“서, 설마 이 군바리 새끼들이?”

섬뜩한 불안감과 두려움에 이성이 나간 총경은 부하들을 닦달했다.

“뭐 하나! 쏴라! 쏴서 저것들을 정지시켜!”

“예? 저희 화력으론 절대…….”

“쏘라고, 새끼야! 얼른 쏴!”

타탕! 탕! 티잉-

경찰들이 쏜 소총탄이 탱크를 두들겼다.

그러나 2차 대전 때 일본군 전차도 아니고, 국군의 셔먼 탱크가 소총탄에 멈출 리 만무했다.

퍼엉- 꽈광!

“으아아악!”

“도망쳐! 여기 있다간 다 죽는다!”

탱크의 포격이 길바닥에 떨어지자, 혼비백산한 총경과 경찰들은 허둥지둥 달아났다.

놀라 도망치던 시위대는 이 광경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탱크가 경찰들을 쫓아 버렸어.”

“설마 계엄군이 우리 편이 된 건가?”

“틀림없어! 그렇지 않으면 경찰을 공격했을 리 없지!”

시위대는 환호성을 지르며 탱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탱크를 앞세운 시위대는 경무대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태극기가 힘차게 휘날리는 가운데, 누군가가 부르기 시작한 애국가가 사방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

“하, 이런 빌어먹을…….”

경무대 밖의 풍경을 본 곽영주는 충격과 허탈감에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시위대가 독재 타도와 이승만 하야를 쉴 새 없이 외쳤다.

그들이 단상처럼 올라가 있는 탱크들은 경무대 쪽으로 포신을 겨누고 있는 상태.

경찰 대신 입구에 진을 친 계엄군은 시위대가 경무대로 진입하는 것을 만류하고 있었다.

“젠장! 이 빌어먹을 군바리 새끼들!”

절망감에 몸을 떨던 곽영주의 시선에 군복을 입은 이들이 들어왔다.

국방부 장관과 육군참모총장, 제1야전군사령관 등등.

울화통이 터진 곽영주가 그들에게 고함을 터트렸다.

“이 배신자들! 이게 당신네가 말한 엄정 중립인가!”

계엄군 출동 전, 이들은 군이 엄정히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시내 치안 유지를 맡지, 시위 진압에는 나서지 않겠다고 했던 것.

그랬던 군이 경찰에 포를 쏴 갈기고, 경찰을 무장 해제시키고, 시위대와 함께 경무대를 포위했다.

“이거 놔! 이건 반역이야! 네놈들 전부 반역자라고! 부끄러운 줄 알아!”

“흥,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게 누군데 우리 탓을 하나?”

병사들에게 끌려 나가는 곽영주의 발악에 군부 수뇌들은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현실이 되고 보니 무척이나 고소했다.

물론 앞으로 수습할 일을 생각하면 머리도 아팠지만.

“대통령 각하는 어쩌고 계신가?”

“맥카나기 주한 미국 대사, 그리고 에반스 주한 영국 대사와 면담을 하고 있습니다.”

“설마 엉뚱한 소리는 하지 않겠지?”

구한말에 위정자들이 외국 군대를 등에 업고 권력을 잡은 적이 있었다.

이승만도 젊은 시절에 그 상황을 목격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고,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두 나라 다 들어 줄 생각이 없을 겁니다.”

그 말이 맞았는지, 두 대사와 면담을 끝마친 이승만이 민주당의 장면과 시위대 대표들을 만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김홍일이랑 이범석이도 오라고 해. 그리고… 이준영이도 국내에 와 있지, 아마?”

“예, 각하. 그렇습니다.”

“그 친구도 불러. 할 말이 있으니까.”

축구 선수는 왜 부르라는 걸까.

국방부 장관은 의아하긴 했지만, 그대로 수락했다.

맥이 빠진 늙은 대통령의 요청을 들어준다고 해서 딱히 문제가 되진 않을 거라 생각했으므로.

***

4.19 당시 서울 시내로 들어왔던 국군 셔먼 탱크입니다.

당시 초등학생, 아니 국민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던 것도 사실입니다.

실제 경찰의 총격에 어린 학생이 사망한 일도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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