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76. Tank Man
김신 장군이 내준 차를 탄 준영 일행은 서울 시내로 들어갔다.
그런데 시내 곳곳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고 있다 보니 더 이상의 차량 이동이 힘들었다.
“앞쪽에서 경찰이 검문을 하고 있습니다.”
“할 수 없군요. 거의 다 왔으니 여기서부터는 도보로…….”
타탕! 탕탕!
갑작스러운 총성에 준영은 깜짝 놀랐다.
“검문에 불응한 이들이 도주한 모양입니다. 그쪽에 시선이 쏠린 틈을 타서 빠져나가죠.”
로베르트의 제안에 따라 차에서 내린 준영은 바로 근처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길을 통해서 이억관의 집으로 갈 생각이었지만, 이 역시 쉽지 않았다.
“앞쪽에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군요. 제가 시선을 끌 테니까 그사이에…….”
“아뇨. 잠깐만요.”
준영은 희생을 각오하는 로베르트를 만류했다.
골목길을 지키는 저 2명의 군인들을 작년 방한 때 본 적이 있었으므로.
그래서 천천히 다가가 말을 건넸다.
“거기 두 사람, 특무대 축구단 분들 맞죠?”
“앗! 이준영 선수가 왜 여기에……?”
특무대 축구단 소속의 김찬기와 문정식은 준영이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그러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준영에게 말을 건넸다.
“미쳤소? 한국 상황이 어떤지 전해 듣지도 못한 거요?”
“더는 두고 볼 수 없어서 말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지금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아요. 정민 선배와 흥철 주장이 영창에 끌려갔다고.”
“예? 어쩌다가요?”
깜짝 놀라는 준영에게 김찬기는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준영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이것들이 돌았나. 아무리 군인이라고 해도 그렇지, 축구 선수들을 시위 진압에 투입하다니!’
그만큼 자유당 정권의 상황이 다급해진 게 아닌지?
그리 생각하고 있던 준영에게 문정식이 말했다.
“이 앞쪽은 시위대 영역인데, 저기서 볼일이라도 있는 거요?”
“예,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얼른 가 보시오. 아무도 없는 지금이 기회일 테니.”
특무대 축구 선수들도 소극적인 저항을 하는 중이었다.
경찰의 시위 진압을 거들 때는 하늘을 겨냥해 발포한다거나, 이번처럼 시위대의 이동을 눈감아 준다거나.
“고맙습니다, 두 분.”
“나중에 또 봅시다!”
두 선수의 호의로 검문을 통과한 준영은 이후 시위대 구역에 도착했다.
“이준영 선수?”
“와, 여긴 어쩐 일이래?”
바리케이드를 쌓아 놓은 곳에서 경계를 서던 시위대가 그를 알아보고 냉큼 들여보내 주었다.
그가 자신들과 같은 편이라는 건 이미 신문에 나온 바 있으므로.
그렇게 순조롭게 전진하는 준영을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준영이 형!”
“오, 필립아, 오랜만이다!”
도중에 이억관의 아들 필립과 만난 준영은 필립을 따라 이억관이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동네 성당이었는데, 현재는 시위대의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가벼운 부상을 입은 이들을 여기서 치료하기도 하고, 공동으로 식사를 준비해서 배급하기도 한다고.
“이준영이다! 이준영이 왔어!”
“우리랑 같이 싸워 주러 온 건가?”
“그냥 입만 산 사람이 아니었나 봐!”
준영을 보고 주변에서 사람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안전한 곳에서 정의와 투쟁을 외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코앞에 있는 불의와 맞서는 건 보통 용기로는 어려운 일.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전한 영국에서 지구 반대편인 한국까지 찾아와 줬으니까.
“고맙습니다, 이준영 선수. 이제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 같군요.”
눈물을 글썽이는 청년의 등을 준영은 툭 쳤다.
“그런 소리 마십쇼. 죽긴 왜 죽습니까. 우린 이길 겁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맞아!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잖아!”
용기백배한 사람들이 소란을 떨자, 아내와 함께 식사 준비를 하던 이억관은 뭔 일인가 싶어 성당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 준영이 형 왔어요!”
억관은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준영을 보고 반색을 했다.
안 그래도 온다는 연락은 받았지만, 도중에 체포되지 않을까 걱정하던 차였으니까.
“자넨 정말이지……. 아무튼 무사해서 다행이군.”
“아저씨도요. 근데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은 겁니까?”
“괜찮을 리 있나. 자네랑 자네 친척들 때문에 어디 잠을 잘 수 있어야지.”
“아이고, 이거 죄송합니다.”
“사과는 됐고……. 아무튼 자네 친척들은 모두 무사하니 걱정할 필요 없어.”
그러면서 이억관은 성당 옆에 있던 병원으로 준영을 안내했다.
무수한 부상자들이 치료받고 있는 그곳에 준영의 할아버지 강윤과 그의 부친 이 씨가 있었다.
성당에 도착했을 때처럼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던 준영은 마침내 자신의 선조와 대면하게 되었다.
“와, 진짜 이준영 선수가 왔네! 소희 누나, 이 사람이 우리 오촌 당숙 어른이래.”
준영은 강윤의 옆에 서 있는 소녀에게 눈길을 돌렸다.
“최, 최소희입니다. 강윤이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예… 소희 학생, 만나서 반가워요.”
최소희라는 소녀의 차분해 보이는 용모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닮아 있었다.
‘그렇군. 이분이 우리 할머니구나.’
두 분은 이 역사적인 현장에서 인연이 맺어진 걸까.
그런데 예상과 달리, 어린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대화를 나눌 일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증조할아버지 이 씨가 기관총같이 질문을 날렸다.
“자네가 정말 태석이 삼촌의 손자인가?”
“예, 한국에 친척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찾아서 뵙게 될 줄은…….”
“삼촌은 어찌 되셨나?”
“잘 모릅니다. 중국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가족들이 흩어진 뒤론 소식을 못 들었습니다.”
“허어, 그런……. 그럼 자네 부모님은?”
“그야… 지금은 세상에 안 계십니다.”
“아이고, 저런! 미안하네. 가슴에 묻어 둔 걸 들먹이게 해서.”
“괜찮습니다.”
“아 참, 그건 그렇고…….”
경찰에게 두들겨 맞아 몸이 불편하다는 증조할아버지는 혀는 전혀 불편하지 않은 듯했다.
덕분에 설정대로 썰을 푸는 준영도 투머치토커 증조부를 상대로 연방 진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
한동안 할아버지 가족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병원을 나온 준영.
그는 이억관에게 현재 상황에 대해 전해 들었다.
“경찰이 무차별 발포를 시작한 후로 사상자가 급증했어. 병원마다 의약품을 구한다고 난리라더군.”
“의약품과 생필품이 부족할 것 같아서 제가 어느 정도 주문해 뒀습니다. 아마 3~4일 안에 도착할 겁니다.”
영국뿐만 아니라 가까운 일본에서도 MI6 정보원을 통해 부탁해 놓았다.
하지만 이억관은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
“그거 도착하면 정부 놈들에게 다 뺏길 텐데…….”
“걱정 마세요. 공군은 우리 편입니다.”
준영은 서울 공항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도 이억관은 그리 밝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김신 장군이라면 믿을 만해. 하지만 문제는 육군이야.”
현재 대한민국 국군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육군.
이미 경남에서는 육군이 계엄령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일단은 중립을 지키고 있다고 하지만, 그 뒤에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난 말이야. 군인들이 어부지리를 노리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 그들도 자유당 정부에 불만이 많긴 하지만, 욕심에 혹할 수 있지 않겠나?”
“난세를 틈타 정권을 강탈할 수 있단 거군요.”
“그래, 김홍일 장군도 그 점을 많이 걱정하시지.”
김홍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준영은 눈빛을 반짝였다.
중화민국 대사에서 물러난 후, 오성 장군이 아주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단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인망을 쌓았다고 했다.
‘이번 사태에서도 자유당 정권 인사들이나 자신이 충성했던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지? 어쩌면 그가 이 상황에서, 그리고 이후의 사태를 해결할 열쇠가 되어 줄지 몰라.’
그런 기대감에 준영은 이억관에게 오성 장군의 현재 행방에 대해 물었다.
“김홍일 장군이면 지금쯤 민주당 당사에 있을걸. 야당 쪽 사람들과 힘을 합쳐서 정부를 압박할 거라고 했으니까.”
그 말을 들은 준영은 곧장 이억관의 안내를 받아 민주당 당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김홍일을 만날 수 있었다.
“여, 왔군.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군님. 근데 제가 온 게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났습니까?”
“김신 총장이 연락을 해 주더군. 이준영이가 자유당을 박살 내는 걸 거들러 왔다고 말이야. 혹시 영국 여왕 친서 같은 거라도 받아 왔나?”
“아뇨. 그런 건 없는데요?”
“그래? 여왕이랑 식사도 할 정도로 친하다고 들었는데…….”
“찌라시에서 어떻게 떠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영국에서 전 그냥 축구 잘하고 돈 잘 버는 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준영의 말에 김홍일은 아쉬운 기색을 보였다.
혹시나 준영이 여왕의 친서 같은 걸 갖고 왔으면, 경무대에 외교적인 압박을 넣기 좋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
“장군님, 우리 일은 우리가 해결해야 합니다. 어떤 방식이든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신세를 지는 건 좋지 못하다고 봅니다.”
이억관의 일침에 김홍일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사장 말이 맞아. 우리 힘으로 해결해야지. 빨리 상황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좋지 못한 생각을 했군.”
서울은 물론 지방에서도 예상 이상의 사상자가 나오고 있는 상황.
그렇다 보니 어떻게든 사태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김홍일도 그런 쪽으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크, 큰일 났습니다!”
젊은 당원 하나가 당사 안으로 달려 들어와 급보를 알렸다.
“시내로 탱크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
군이 드디어 본격적인 진압에 나섰다!
탱크를 앞세운 15사단 병력이 시내로 진입하는 광경을 본 시위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지?”
“군은 중립이라 들었어. 단순히 치안 유지가 목적일지도…….”
“우린 이미 무장봉기를 했어. 치안 유지가 목적이면 누구부터 공격하겠나!”
당황한 시위대가 물러나고, 시민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시내를 행군하는 장병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선두의 탱크가 갑자기 멈춰 섰다.
앞쪽 대로에서 세 사람이 천천히 탱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
그들은 바로 김홍일과 이억관, 그리고 이준영이었다.
‘내가 탱크맨이 될 줄이야.’
시내로 탱크가 들어왔다는 말을 들은 김홍일은 자신이 나서 보겠다며 움직였다.
그리고 그를 혼자 보낼 수 없었던 준영과 이억관이 따라나섰다.
그런데 따로 지휘관을 만나 설득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오성 장군은 탱크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덩달아 준영과 이억관도 탱크맨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심장이 떨리는 건 15년 전 쁘리옥 항구에서 일본군 수송선을 탈취하려 할 때 이후로 처음이군.”
“월드컵 결승전도 이 정도는 아니었죠.”
이 혁명을 끝내는 데 뭐든지 거들어 보리라.
그리 마음먹었지만, 미래의 어느 중화 대협처럼 맨몸으로 탱크에 맞서게 될 줄은 몰랐다.
‘뭐 이렇게 된 거, 까짓것 끝까지 한번 해보자!’
탱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심장은 더욱 심하게 뛰었지만, 준영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실제 당시 서울 시내에 진입한 계엄군의 모습이 찍힌 사진입니다.
당시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노인분이 이들의 앞에 나섰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