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75화 (275/400)

Round 275. 레전드의 품격

“경찰이 발포를 시작했다!”

경무대 앞에서 벌어진 참극은 삽시간에 사방에 알려졌다.

거기다 경무대뿐만 아니라 종로나 서대문 부근에서도 경찰이 발포를 하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크게 불타올랐다.

“여러분, 이대로 죽거나 굴복할 순 없소!”

“맞습니다! 우리도 무장해서 경찰에 맞서 싸웁시다!”

일부 시위대들이 이렇게 결심하고 경찰을 기습하거나, 파출소를 털어서 무기를 손에 넣었다.

이들 무장 시위대와 경찰들이 곳곳에서 연달아 충돌하다 보니, 이제 서울 시내에서 총성은 예사로 들렸다.

당연히 시위 사망자도 늘었고, 병원마다 총상 환자들이 급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물러날 줄을 몰랐다.

시위에 참여하는 숫자가 점점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지 않았던 것이다.

“서대문 방면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경무대에서 서울 시내 진압 상황을 전해 듣고 있던 곽영주와 홍진기 등은 방금 들어온 보고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서대문이라면 이기붕의 집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특별히 많은 병력이 배치되어 있는데도 막아 내지 못했다고?

“이런 빌어먹을! 그쪽에 있는 놈들은 대체 뭘 한 거야? 총이 있으면 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발포는 했습니다. 화랑 동지회 쪽 지원도 받았습니다만…….”

아무리 총을 쏘고 최루탄을 날려도, 시위대는 꾸역꾸역 밀고 들어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돌진해 온 시위대는 최종 방어선에 진을 친 건달들도 짓밟아 버리고 이기붕의 집으로 난입했다고 한다.

“이기붕 부통령은?”

“부통령과 그 일가는 간발의 차이로 탈출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어디로 피신했는지는…….”

서울을 빠져나갔는지, 아님 시위대에 잡혔는지는 잘 모르는 상황이라고.

곽영주는 이기붕에게 오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가 가장 우선으로 지켜야 하는 건 대통령이었으니까.

“이대론 안 됩니다. 현재 경찰 병력만으론 진압이 불가능하오. 경남에서 했던 대로 군 병력을 동원합시다.”

“군대 동원이라…….”

곽영주는 탐탁잖은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그의 반응에 홍진기가 닦달하고 나섰다.

“이미 계엄령까지 내려진 상황이요. 주저할 까닭이 없지 않소?”

“그렇습니다만… 군부 쪽 인사들이 영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곽영주는 과거에 군의 진급 문제에 개입해서 군부의 반발을 산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일찍 군 병력을 동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헌병 부대만 불러들인 데 그쳤다.

“마산과 부산에 투입된 진압군들이 어쩌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냥 기본적인 치안 유지만 하면서 시위는 내버려 두고 있답니다.”

지방 군인들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이번 사태에 중립을 고수하고 있었다.

서울과 경기 지역 군인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육군 사관 학교나 일부 세력들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보고가 있었다.

“휴, 김창룡 장군이 있었으면 이런 걱정을 안 해도 되었을 텐데…….”

이승만에 대한 김창룡의 충성심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영국에서 실종된 후로 아직까지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자들이 쿠데타를 생각했으면 벌써 들고일어났을 거요. 거기다 다른 데는 몰라도 특무대 쪽 인사들은 아직 믿을 만하지 않소?”

“확실히 그쪽이라면…….”

곽영주는 곧장 특무대에 연락을 취했다.

점점 악화되어 가는 현재 상황에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으므로.

***

최정민과 함흥철 등, 특무대 축구단 선수들은 훈련 중에 갑작스러운 명령을 받았다.

“전원 완전 군장을 갖추고 연병장에 집결하도록!”

축구 선수라 하지만 일단 군인 신분.

그렇다 보니 종종 이런 명령이 떨어지곤 했다.

하지만 때가 때이니만큼 다들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설마 진압 부대로 출동하게 되는 건가?”

“그럴 리가. 아직 수도사단이 움직였단 얘기도 없다고.”

선수들은 불안감을 감춘 채 군장을 갖추고 연병장에 모였다.

잠시 후 그들 앞에 나타난 지휘관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제군들도 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들었을 것이다. 금일 이 시간 이후로 우리 특무대 병력도 경찰과 헌병에 합류, 폭도 진압에 나설 것이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크게 술렁이는 선수들을 향해 지휘관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뭘 겁먹고 있나! 제군들도 군인이다! 군인답게 명령을 받들고, 훈련받은 대로 싸우면 된다.”

지휘관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다들 당혹한 기색을 떨치지 못했다.

전투에 나가는 게 겁나는 건 아니다.

다만 휴전선 너머의 북괴군이 아니라 시민들, 그것도 자신들을 성원해 주는 팬들에게 총을 겨누라니!

“꾸물거릴 시간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은 폭도들에 의해 잠식되고 있다. 전원 차량에 탑승하도록!”

지휘관이 연병장에 세워진 트럭을 가리키자, 선수들은 머뭇거리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한 걸음도 떼지 않는 이가 있었다.

바로 최정민이었다.

“뭐 하나? 당장 출동하라는 명령을 못 들었나?”

“그 명령은… 따를 수 없습니다.”

최정민의 거부에 지휘관의 눈꼬리가 사납게 휘어졌다.

“따를 수 없어? 야 이 새끼야! 그게 군인의 입에서 나올 말이냐?”

사나운 발길질에 최정민이 벌렁 나자빠졌다.

하지만 곧장 일어난 그는 반박하고 나섰다.

“저는 군인입니다! 나라를 지켜야 할 군인이 국민에게 총을 겨눌 수 없습니다!”

“뭐, 뭐가 어째?”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지휘관은 인정사정없이 최정민을 두들겨 팼다.

“시건방진 새끼가! 국가대표 선수라고 봐줬더니 눈깔에 뵈는 게 없냐? 엉?”

한참 때리고 걷어차던 지휘관은 멍하니 이 광경을 바라보던 선수들에게 버럭 호통을 쳤다.

“탑승 안 하고 뭐 하나! 지금 폭동을 일으킨 것들은 전부 반역자에 빨갱이들이다! 나라가 빨갱이에게 넘어가는 꼴을 보고 싶은가!”

“그 빨갱이란 기준은 누가 정한 겁니까? 자유당에서 정한 거 아닌가?”

보다 못한 함흥철이 반박을 하고 나섰다.

그는 지휘관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지든 말든 할 말을 다 했다.

“난 대한민국 국가대표이자 군인입니다. 동대문의 시정잡배들처럼 자유당 똘마니가 되는 건 사양하겠습니다.”

함흥철은 손에 든 총을 내려놓았다.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며 각오를 다진 그에게도 무자비한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때리고 밟아도 함흥철의 눈빛은 죽지 않았다.

그러자 지휘관은 권총을 뽑아 들었다.

바로 함흥철을 쏠 것처럼 겨눈 그의 눈에 싸늘하게 이를 바라보는 선수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무언의 압박에 그는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젠장… 뭐 하고 있나! 이 역적 놈의 새끼들, 당장 영창에 처넣어!”

그렇게 최정민과 함흥철은 영창에 감금되었다.

최정민은 자신과 똑같이 피투성이가 된 함흥철에게 물었다.

“왜 그랬냐?”

“아까 못 들었냐? 깡패 새끼들처럼 되기 싫어서 그랬다. 그러는 너는?”

함흥철의 물음에 최정민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부끄러운 형이 되고 싶지 않더라고.”

지구 반대편에서 뛰고 있는 이준영이 독재 타도를 부르짖는 사진을 신문을 통해 보았다.

아우님도 나서는 상황에서 형님이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는가.

안 그래도 위정자들 하는 짓이 맘에 들지 않았다.

“우리 이제 어떻게 될 것 같냐?”

“총살이겠지, 뭐.”

함흥철의 담담한 대꾸에 최정민은 아쉬운 기색을 보였다.

“4월 말에 올림픽 최종 예선도 있는데…….”

“윗대가리들이 그런 거 따지겠냐. 어이, 황금발, 죽는 게 무섭냐?”

최정민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각오는 했다. 다만 세계 무대에 도전할 기회를 잃는 게 아쉬울 뿐.

“지난번에 꿈을 꾸었어. 우리나라가 월드컵에 나갔는데, 독일을 2 대 0으로 이겼지.”

“진짜 꿈이네, 그거.”

“진짜처럼 생생하더라. 독일 놈들 맹공을 계속 막아 내다가 막판에 얻은 코너킥으로…….”

최정민은 꿈에서 본 경기를 이야기했고, 함흥철은 즐겁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어쩐지 암담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

준영이 탄 컨스텔레이션 여객기는 태평양을 건너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MI6 정보원에게서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 전해 들었다.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했다고요?”

“예,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을 지은 정보원이 준영에게 경고를 보냈다.

“한국 정부에서 이준영 선수가 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체포하려고 벼르는 모양이더군요.”

“흥, 쩨쩨한 놈들!”

“한국에 가는 건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정보원은 맨체스터 출신이었다.

그렇다 보니 고향 팀의 주장인 준영이 혹여 잘못되는 걸 원치 않았다.

“염려해 줘서 감사합니다만, 저는 가야 합니다. 가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으니까.”

잠시 후, 연료 보급이 끝나자 준영은 다시 비행기에 올라 서울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한국 영공에 진입하자, 지난번처럼 전투기들이 날아왔다.

“도쿄에서 출발할 때 미리 연락해 두었지만… 마중 나왔다고 보기엔 응대가 차갑군요.”

“혹시 격추하러 온 건지도?”

로베르트의 말에 준영은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사실 내심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 공해상에서 격추시켜 버리곤 소련이나 북한의 짓이라고 둘러댈 수 있으니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여객기는 무사히 여의도 서울 공항에 착륙했다.

준영이 비행기에서 내리자, 그를 호위해 온 전투기의 파일럿이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반갑소, 이준영 선수. 난 대한민국 공군 참모총장 김신이오.”

“아… 만나서 영광입니다, 총장님.”

드라마에 나온 사람.

분명히 백범 김구 선생의 아들인가 그랬다.

준영은 그와 나란히 걸으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공군에 명령이 떨어졌소. 이 선수가 도착하면 바로 체포하라고.”

“그래서 총장님이 직접 절 잡으려고 나선 겁니까?”

준영의 물음에 김신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난 그냥 확인하러 온 거요. 진짜 비행기에 이준영 선수가 탔는지 아닌지.”

“그럼…….”

“안 탔다고 보고할 거요. 그럼 윗선에서도 중간에 다른 루트로 입국하거나, 안 오려나 보다 생각하겠지.”

김신은 부친의 정적이었던 자들의 쩨쩨한 짓거리에 동참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준영을 모른 척하고 넘어가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어차피 어수선해서 확인하기도 힘들 테지. 따로 차를 준비해 줄 테니, 얼른 가서 볼일 보시오.”

“감사합니다, 총장님.”

“아, 가기 전에 사인 좀…….”

준영은 바로 김신의 장갑에 사인을 해 주었다.

“궁금해서 묻는데, 앞으로 무얼 할 거요?”

“일단 친척과 지인들이 무사한지 살필 거고요. 그 후에는…….”

갑자기 멀리서 들려온 총성에 준영은 잠시 말문을 끊었다.

그러다 서울 시내 쪽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저 상황을 끝내는 걸 거들어야죠.”

“일개 축구 선수에 불과한 당신이 그걸 할 수 있겠소?”

김신의 물음에 준영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제가 아는 어떤 선수는 조국의 내전을 멈추는 데 기여했죠.”

아직 태어나려면 18년은 더 있어야 하는 21세기의 레전드 플레이어.

준영도 그를 본받아 조금이나마 이 혁명에 힘을 실어 보기로 했다.

***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첼시의 왕 디디에 드록바는 자신의 조국 코트디부아르의 내전 종식에 기여했습니다.

거기다 드록신(…)의 활약으로 코트디부아르라는 낯선 나라가 알려졌으니, 정말 국가를 대표하는 레전드 플레이어라 할 만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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