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74. 4월 혁명
“이게 무슨 일인가! 백주에 깡패들이 학생과 시민들을 때려죽이다니!”
경무대에 늙은 대통령의 노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이번 일은 정말 심각했다.
마산 같은 지방 도시도 아니고 수도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그야말로 불난 집에 기름, 아니 폭탄을 던져 넣은 꼴이었다.
“뭐라고 말들 해 봐! 도대체 이번 사태를 무마할 생각들이 있는 건가!”
회의실에 모인 장차관들이 쩔쩔매는 가운데, 신임 치안국장이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각하, 그리 큰일도 아닙니다, 사망자는 고작 한 명에 대부분 부상자들로…….”
“숫자가 문제가 아니야! 시민들이 보고, 국내외 언론에도 알려졌어. 다들 이 나라, 이 정부를… 그리고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나!”
“진정하십시오, 각하. 전쟁이나 소요 사태 때는 피치 못하게 인명 피해가 나기 마련입니다. 지난 전쟁 때만 해도…….”
“지금이 전쟁 중인가? 북괴군에게 나라가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냔 말이야!”
이승만이 권좌에 오른 것은 단지 명성이나 인지도 때문은 아니다.
그는 정치 시류를 볼 줄 알았다.
그렇기에 이 상황이 선을 넘어도 대차게 넘었음을 눈치챘다.
서둘러 수습하지 않으면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무너질 것이다.
자신의 권력도, 명성도, 미래의 평가도.
“두말하지 않겠네. 관련자들 죄다 잡아들여! 깡패들과 그 두목부터 해서, 사태를 방관한 경찰 관계자들까지 전부 다!”
대통령의 엄명을 마지막으로 회의가 끝났다.
한숨을 내쉬던 장차관들은 곽영주를 째려보았다.
이번 일을 저지른 반공청년단과 동대문파는 그와 친분이 두터웠으므로.
“무식한 깡패 새끼들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인지…….”
“이게 다 깡패들을 감싸고도는 누구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관료들의 빈정거림에 곽영주는 분기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개 같은 놈들! 선거나 정치 활동에 건달들 써먹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하지만 눈앞에 있는 관료들보다 이번 일을 주도했을 유지광이나 임화수에게 더 화가 났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사실 건달들이 시위대에 폭력을 행사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시위를 해산시키기 위해 위협하는 정도였지, 이번처럼 작정하고 사람을 때려죽이고 반병신으로 만들진 않았다.
‘젠장, 이러면 이준영 그놈에게도 할 말이 없잖아!’
지난달 말에 이준영이 골을 넣고 보였던 골 셀레브레이션, 득점 뒤풀이는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이승만이나 곽영주는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한국에 왔을 때 그리 잘 대해 줬는데, 심지어 훈장까지 줬는데 독재 타도를 외치다니!
그야말로 자신들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동안 따질 겨를도 없었지만, 이젠 따질 수도 없게 되었다.
마산에서 죽은 김주열의 경우에는 경찰 측의 실수로 우길 수 있지만, 이번엔 너무 대놓고 저지른 일이니까.
“저기, 경무관님…….”
“무슨 일이야?”
심란한 와중에 직원이 말을 건네자, 곽영주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덜덜 떨던 직원이 곽영주에게 전보 한 장을 내밀었다.
“런던에 있는 김유택 대사가 경무관님께 알릴 것이 있다며…….”
전보를 낚아챈 곽영주는 내용을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준영 이 자식, 무슨 생각인 거야?”
안 그래도 골치 아픈데, 이놈이 대체 무슨 속셈을 가진 걸까.
잔뜩 찡그려진 곽영주의 표정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
소희를 업고 가까운 병원으로 달려온 강윤은 초조하게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수술실에서 의사가 나오자 황급히 물음을 건넸다.
“어떻게 됐어요, 선생님? 누나는 괜찮은 거예요?”
“머리를 다친 거니 일단 좀 두고 봐야겠지만, 상태는 양호하니 마음 놓으렴.”
안도의 한숨을 내쉰 강윤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혹시나 소희가 이대로 잘못되는 건 아닌지 걱정했으니까.
“야 인마, 이강윤!”
벼락같은 호통에 강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고개를 돌리자 목발을 짚은 아버지와 친구 필립이, 그리고 그의 부친인 이억관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 아버지, 여긴 어떻게……?”
철썩-!
절뚝이며 다가온 강윤의 부친 이 씨는 아들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몹쓸 놈 같으니라고! 이 아비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해? 내 속이 얼마나 탔는지 알기나 하냐고!”
“…죄송해요.”
강윤이 고개를 떨구자, 이 씨는 더 꾸짖지도 못하고 아들의 몸을 살펴보았다.
반창고를 몇 군데 붙이고 있긴 해도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응급실 앞으로 줄지어 늘어선 부상자들에 비하면 정말 양호했던 것이다.
“다신 데모하러 가지 마라. 네가 그런다고 아비 팔다리가 금방 아무는 것도 아니야.”
“아버지!”
발끈하려는 강윤에게 이 씨의 호통이 떨어졌다.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지금 영국에서 네 오촌 당숙까지 오고 있어.”
“예? 당숙이라뇨?”
“이준영 선수 말이다. 여기 이활 사장님이 그러는데, 그 사람이 우리 친척이 맞는 모양이라더라.”
그리 말한 이 씨는 이 사실을 알려 준 이억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실 이렇게 아들을 찾을 수 있었던 것도 이억관이 서울 시내 병원을 돌아다니며 손을 써 두었기 때문이다.
혹시 이준영을 닮은 어린 학생이 찾아오면 바로 연락해 달라고.
“난 영국에 있을 때부터 준영이 그 친구와 절친한 사이였어. 그 친구가 너희 가족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잘 살펴봐 달라고 부탁하더군.”
이억관의 말에 강윤은 어째서 그가 성심성의껏 자신의 가족을 돌봐 줬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준영이가 영국에서 오고 있어. 아마 2∼3일 후에 도착할 듯해.”
“잠깐만요. 아직 시즌 중일 텐데요?”
“그만큼 너희 가족이 걱정된 모양이지. 그 친구는 벌써 이런 일이 벌어질 것도 예상하고 있었어. 그래서 너희 가족을 국외로 피신시키려고도 했는데…….”
이억관의 설명을 들은 강윤과 이 씨는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릴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괜찮을까요?”
“그러게 말이다. 대놓고 가슴팍에 독재 타도 써 갈겼는데, 자유당 놈들이 가만있을지…….”
그때 이 씨는 뭔가 알 것 같다는 듯이 손바닥을 치며 말을 이었다.
“그 친구 행동을 보니 확실히 우리 친척이 맞구나.”
“예?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
“생각해 봐라. 앞뒤 안 가리고 행동하는 게 너랑 같잖냐. 술김에 순사를 때려 패 버리고 만주로 갔던 삼촌이랑도 닮은 것 같고.”
“아버지도 참…….”
민망해하는 강윤을 보며 억관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 씨의 말대로 그런 점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준영이 마냥 그렇게 행동하진 않았다.
지금 한국에 오는 것도 뭔가 목적이 있을 것이다.
단순히 강윤의 가족을 만나는 것 말고 다른 뭔가가.
‘어쩌면 이번 일도…….’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긴 했지만, 준영이라면 혹시 모른다.
그가 숱한 승부에서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았으니까.
거기다 이번 사태 역시 예상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억관은 작은 기대를 품어 보리라 마음먹었다.
***
어스름하게 안개가 낀 앵커리지 공항.
비행기가 급유하는 틈을 타서 밖으로 나온 준영은 출발할 때 챙겨 온 공을 가지고 리프팅을 하며 굳은 몸을 풀고 있었다.
“앞으로 14시간 뒤면 도착인가.”
갑작스러운 한국행이긴 하지만, 일단 절차는 다 거쳤다.
구단과 감독에게 허락도 받았고, 리즈나 다른 가족들의 동의도 얻었다.
물론 처음에는 모두가 반대했다.
준영이 무엇을 했는지 잘 알기에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독재나나 그 하수인에게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니까.
하지만 준영의 뜻은 단호했고, 다들 조건을 내걸고 그를 보내 주었다.
절대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말 것, 그리고 무사히 돌아올 것.
“대령님이 보기엔 어때요? 제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준영이 고개를 돌린 쪽에는 루이스 대령이 서 있었다.
그가 온 걸 눈치챌 수 있었던 건, 지난번 대학 강연회에 나타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지몽 같은 것도 잘 보여 주시더니……. 이번에는 그런 서비스 없습니까?”
섭섭한 표정을 짓고 있던 준영의 머릿속으로 루이스의 것으로 여겨지는 목소리가 울렸다.
‘내가 알려 주는 건 가능성이다. 미래는 네가 행동하는 것에 따라 달라지지.’
그럼 지금 내 행동의 결과는?
마음속으로 건넨 준영의 물음에 루이스의 대답이 들려왔다.
‘세상에는 정해진 운명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 바꿀 수 있는 미래도 있지. 너는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꿔 왔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바꿀 수 있는 건가.
예지몽, 아니 가능성을 보여 주지 않은 것은 그럴 필요가 없어서인가?
‘스스로를 믿어. 네가 바꾸어 온 것, 그리고 너로 인해 달라진 이들의 힘을…….’
루이스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힘을 짜내 준영에게 말했다.
‘리즈를… 모두를 부탁한다.’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은 결의가 담긴 그의 눈빛에 루이스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캡틴 리, 급유가 끝났습니다.”
경호원 로베르트의 외침에 준영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는 방금 전과 사뭇 달라진 주변 풍경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만 해도 안개가 덮고 있었을 텐데…….”
“그랬죠. 근데 해가 떠서 그런지 금세 사라져 버리더군요.”
로베르트 말대로 멀리 동쪽으로 밝게 먼동이 터 오고 있었다.
준영은 좀 전에 루이스가 서 있던 자리와 일직선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캡틴?”
“갑시다, 서쪽으로.”
배웅하듯이 내리쬐는 햇볕을 맞으며 준영은 비행기에 올랐다.
***
대통령의 엄명에 의해 어제 시위대를 습격한 깡패와 사태를 방관한 경찰 간부들이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런 조치로 이미 화산처럼 폭발한 민심을 누그릴 순 없었다.
“정작 체포해야 할 놈들은 안 하고 말이야!”
“그래, 이기붕이 그놈부터 잡아넣어야지!”
“곽영주 그놈은 어떻고? 그놈이 깡패들 뒷배잖아!”
이번 사태의 원흉이 처벌될 때까지 물러설 수 없다.
이런 이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시내 곳곳에 다음과 같은 격문을 붙었다.
<우리는 조국을 사랑하기에 조국의 운명을 염려한다.
우리는 공산당과의 투쟁에서 피 흘렸던 것처럼, 독재와 부정과 사회악을 배격할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참아 왔는가!
무참한 살상 앞에 안일만을 탐할쏘냐! 한숨만 쉴쏘냐!
동포여! 우리 모두 정의를 위하여 총궐기하자!>
격문을 본 사람들은 너 나 할 거 없이 어울려서 거리를 행진했다.
종로, 서대문, 을지로, 태평로의 국회의사당 등등.
경무대 앞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인파가 모여 분노의 함성을 터트렸다.
“부정 선거 원흉을 처벌하라!”
“이승만 박사, 물러나라!”
경무대 앞에 집결한 경찰과 헌병 병력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대대적인 봉기.
선두에 배치된 소방차들이 물줄기를 뿌려 대도 시위대의 진군을 저지하지 못했다.
아니, 저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시위대에 소방차를 빼앗겼다!
“시위대가 최후 저지선 가까이 접근해 왔습니다.”
다급한 보고에 곽영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발포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일전에 준영이 한 말이 생각났다.
‘훗날 역사의 단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곽영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단죄는 피할 수 없다.
그리고 머리통이 박살 나더라도 대통령 각하를 지키는 게 자신의 임무.
그는 절대 뽑지 말아야 하는 카드를 뽑았다.
“사격 개시!”
타타탕! 타타타타탕!
총성과 함께 잔인한 4월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
본문의 격문은 실제 4.19 당시 서울대 문리학과 게시판에 붙은 격문을 참고로 작성했습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불의에 용감히 맞서 싸운 당시 학생과 시민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