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73화 (273/400)

Round 273. Qui A Tue Grand Maman

모즐리 서쪽에 있는 준영의 별장.

어두운 홈시어터에는 영사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준영이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을 보고 있을 때, 홈시어터 안으로 리즈가 들어왔다.

“준, 거기서 뭘 하고 있어요?”

“복습.”

리즈는 짧게 대답한 준영의 옆에 앉았다.

“그저께 리버풀 원정 경기예요? 퇴장당했었던?”

“그래, 그거야.”

자신에게 기대는 리즈를 살며시 끌어안은 준영은 다시 스크린으로 눈길을 돌렸다.

지금 영사기가 재생하고 있는 16밀리미터 필름에는 맨유 전력 분석팀이 찍은 경기의 주요 장면들이 담겨 있었다.

준영의 선제골과 펠레의 동점 골, 연달아 리버풀의 공격을 막아 내는 장면과 후반전 전방 압박으로 만들어 낸 존 레논의 골 등등.

그러다 마침내 문제의 퇴장 장면이 나왔다.

그 광경을 본 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왜 저기서 백태클을 한 건지.”

“그땐 그게 좋은 선택이었다고 봤던 거죠?”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덤볐는데… 이 영상으로 보니까 해리의 선방을 믿는 게 나을 뻔했어.”

준영이 퇴장당한 후, 펠레는 페널티킥을 깔끔하게 성공시켰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사납게 맨유 문전을 두들겨 댔다.

그러나 리버풀에서 기대하던 역전 골은 나오지 않았다.

9 대 11이라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맨유 선수들이 필사적인 수비를 펼친 덕분이었다.

위기 상황에서 똘똘 뭉친 그들은 엄청난 집중력과 투지를 보여 줬다.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한 건 던컨 에드워즈.

그는 여기저기 번개같이 나타나서는 펠레와 로저 헌트가 시도하는 패스와 슛을 모조리 끊어 냈다.

심지어 후반 43분에는 바비 찰튼과 패스를 주고받으며 깜짝 역공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과감한 돌파 후에 날린 중거리 슛은 리버풀 골대 그물을 세차게 흔들었다.

아쉽게도 옆 그물이었지만, 콥스를 기겁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만약에 저게 들어갔다면, 두고두고 언급될 명승부가 되었을 텐데요.”

“리버풀 입장에선 흑역사가 되었겠지.”

양 팀에겐 아쉽게도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다.

아쉬움의 크기는 리버풀이 컸다.

이 경기에서 승리함으로써 리그 우승을 확정 지으려 했지만, 그 잔치는 다음으로 미루어졌다.

거기다 맨유를 이기지 못한 우승이라는 껄끄러움까지 남았다.

“정말이지 던컨이 있어서 다행이야. 녀석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두 골은 더 먹고 졌을 테니까.”

“거기엔 준의 역할도 컸다고 생각해요.”

리즈의 말에 준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퇴장당한 게 오히려 모두의 전의를 높여 줬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 준이 아니었다면 던컨 씨가 저렇게 활약할 일도 없었을 거잖아요.”

원래 던컨은 1958년에 사망.

하지만 비행기 사고를 막으려 했던 준영의 필사적인 노력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발롱도르까지 받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던컨 씨뿐만 아니죠. 그때 부상으로 은퇴한 사람들도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고 있잖아요.”

로저 바인, 토미 테일러, 데이비드 펙, 마크 존스, 재키 블란치플라워 등등.

현재 그들은 전력 분석관 혹은 스카우터로 활동하거나, 유소년 선수 지도를 하는 등 새로운 활동을 하며 팀에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에디 콜먼이나 리암 휄란같이 학업에 힘써 세무나 행정 쪽으로 방향을 잡은 이들도 있다.

“그렇긴 해도… 더 나은 결과를 만들지 못한 게 아쉬워.”

준영은 그때와 같은 아쉬움과 초조함을 지금 다시 느끼고 있었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혁명의 불길은 뜨거워지고 있는데, 할아버지 일가의 안전을 보전할 방안은 번번이 어긋나 버렸다.

할아버지 일가를 외국으로 피신시키는 것도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이젠 할아버지의 행방도 묘연한 상황이다.

“준의 할아버지라는 분, 아직도 어디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거예요?”

“반정부 시위에 동참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서 억관 아저씨가 이리저리 수소문하는 중인데, 아직 성과가 없는 모양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할아버지의 운명이 어긋나는 걸 겁내지 말고 일찍 만나거나 조치해 놓을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런 불안과 답답함 때문에 경기에서도 실수한 건지 모른다.

그런 마음을 가라앉혀 보려고 일상에 집중하려 애쓰고 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걱정 말아요.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리즈는 심란해하는 준영을 꼭 부둥켜안았다.

항상 자신을 지탱해 주는 연인의 따스한 마음에 준영은 잠시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

걱정거리가 있어도 일상에서 마냥 손을 놓기는 힘들다.

준영은 정상적으로 팀 훈련에 참여하며,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동료들을 도왔다.

“주장, 왜 이리 굼뜨고 맥이 없어? 이래선 허수아비랑 마찬가지잖아.”

브라이언 클러프가 준영에게 쓴소리를 날렸다.

방금 전 세트 플레이 훈련에서 너무 간단하게 헤딩슛을 성공시켰다.

평소 위압적인 준영의 마크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퇴장당한 걸 아직 맘에 두고 있는 거야?”

“그런 거 아냐.”

“그럼 다음 경기 출전 안 한다고 애인이랑 밤새…….”

“아, 진짜!”

갑자기 민망한 소리가 나오자, 준영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그러나 클러프는 태연했다.

“그것도 아닌 거야?”

“남의 사생활에 대해서 캐묻지 마.”

“…했구만.”

준영은 깐죽대는 클러프에게 비(Be)폭력을 시전할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시시하게 이런 일로 다퉈서 득 되는 건 없으니까.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훈련에 집중해.”

“허수아비 상대로는 훈련 성과가 나지 않을 것 같은데?”

“진지하게 아이언맨 모드로 해 줄게. 성과가 확실하도록!”

이후에 이어진 훈련에서 준영은 클러프에게 단 하나의 골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바탕 땀을 흘리고 훈련을 끝마친 준영은 이후 트래퍼드 파크의 미스터리 푸드 공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헨리 케일 상무에게서 보고를 받았다.

“생산은 차질 없고, 유럽 현지 공장 건설도 순조롭습니다. 도표를 보시다시피 판매량도… 아, 작년에 개발해서 시판했던 이온 음료 말입니다…….”

“왜요? 그게 무슨 문제라도 일으켰어요?”

상품명을 ‘아쿠아’라고 붙이고 시판한 이온 음료는 시장에서 혹평을 받았다.

미스터리 푸드의 유일한 실패작이라 들먹여질 정도.

그렇다 보니 현재는 생산을 일시 중지했고, 재고는 생수보다 싼값에 떨이로 처리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어디든 마이너한 취향을 가진 이들은 있는 법.

싼값에 대량으로 매입했다가 맛을 들이거나, 효용을 깨달은 이들도 나타났다.

“영국 올림픽 대표팀에서 아쿠아의 납품을 요청했습니다. 특히 육상 선수들이 호평을 했다고 합니다. 8월 로마 올림픽에서도 현지 배송을 받고 싶어 하더군요.”

“역시! 그쪽에서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고집부려 만든 보람이 있었다.

아쿠아를 마신 선수들이 메달을 따면 홍보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등 돌린 대중도 이온 음료에 대해서 다시 보게 될 터!

“일단 올림픽 대표팀 납품은 무상으로…….”

빠직-!

뭔가 부서지는 듯한 소음.

몸속에서 울린 그 소리에 준영은 흠칫 놀랐다.

‘방금 그 소리는 뭐지? 뼈가 부서지는 것 같은…….’

슬쩍 자신의 몸을 살펴보던 준영은 한순간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사장님, 왜 그러십니까? 어디 안 좋은 데라도?”

준영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케일이 걱정스런 기색으로 물었다.

준영은 내색하지 않고 웃음을 지었다.

“그게, 아까 훈련하다 타박상을 입은 곳이 쓰려서요.”

“그러십니까? 혹시 안 좋으면 병원에라도…….”

“아뇨.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니까 나가서 파스, 습포라도 구해다 주세요.”

그 말에 케일 상무가 집무실에서 나갔다.

그가 떠난 후, 준영은 좀 전에 힐끔 보았던 자신의 다리를 다시 살펴보았다.

“젠장, 잘못 본 게 아니었군.”

마치 수명이 다 된 형광등처럼 무릎 아래쪽이 희미해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희미하게 사라질 때의 모습은 마치 예전에 루이스 대령이 나오는 꿈에서 본 것과 비슷했다.

마치 온몸이 부스러지는 것처럼 사라지는.

혹시 이러다 꿈에서처럼 사라지게 되는 건 아닌지?

진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지만, 다행히도 얼마 후 다리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안도할 수 없었다.

‘뭔가 발생했어.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안 좋은 일이 벌어진 걸까.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준영의 이마에선 진땀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

“자유당은 물러나라!”

“민주 역적 몰아내자!”

급조한 시위 현수막과 피켓을 든 학생들이 거리를 행진했다.

날로 격화되는 시위에 경남 일대는 물론 서울 지역까지 계엄령이 내려졌지만, 분노한 시민들은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시위에 동참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먹거리를 전해 주며 시위대를 격려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강윤은 전자였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라는 형님들의 권유를 거부하고 시위대에 남았다.

그리고 오늘도 국회의사당까지 행군하며 목이 터져라 분노의 함성을 내질렀다.

“어, 소희 누나!”

시위에서 돌아오던 길에 강윤은 소희를 발견했다.

“누나, 여기에 왜 있어? 내가 그랬잖아. 위험하니까 시위하는 데 나오지 말라고!”

“시위하러 온 거 아냐. 힘든 일 하는 사람들에게 물이라도 전해 주려고 온 거야.”

그러면서 소희는 양손으로 들고 있던 커다란 주전자를 내밀었다.

안 그래도 마침 목이 탔던 강윤은 주전자의 물을 마시고, 다른 시위대에게도 나눠 주었다.

“고마워, 누나. 하지만 이런 일도 하지 마. 앞으로 점점 더 위험해질 거라고.”

자유당은 야당과 여론을 깡그리 무시하고 이번 시위를 공산주의자들의 사주로 몰고 갔다.

계엄령을 내린 그들은 현재 가장 항쟁이 격화된 마산과 부산에 군대를 출동시켰다.

서울도 조만간에 그리될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 오늘만 해도 경찰과 제대로 충돌할 뻔했다.

“알았지? 일이 끝날 때까지 절대 집에서 나오면 안 돼.”

“위험하다면서 넌 왜 시위를 계속하는 건데? 너야말로 그만둬.”

“나는…….”

강윤이 소희를 설득하려는 순간, 갑자기 큰 소란이 벌어졌다.

“아아악!”

“깡패들이다! 다들 물러서!”

골목에서 튀어나온 반공청년단과 동대문파의 깡패들이 마구잡이로 몽둥이를 휘둘러 댔다.

순식간에 수십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면서 거리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큰일 났다. 잘못하면 소희 누나가…….’

강윤은 황급히 소희의 손을 잡고 현장에서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덩치 큰 깡패 하나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빨갱이 애새끼들, 어딜 도망치려고!”

“으악!”

강윤을 때려눕힌 깡패는 뒤이어 소희에게도 가차 없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빡-!

“소희 누나!”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소희를 본 강윤은 재차 몽둥이를 휘두르는 깡패에게 달려들어 박치기를 날렸다.

그러곤 쓰러진 깡패 쪽은 거들떠보지 않고 곧장 쓰러진 소희를 들쳐 업었다.

“정신 차려, 누나! 죽으면 안 돼!”

“가, 강윤아…….”

다행히 완전히 의식을 잃지는 않은 모양.

강윤은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수라장 속에서 시위를 취재하던 기자들은 피 흘리는 소희를 업은 강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무자비한 폭력에 길바닥에 쓰러진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의 모습도.

피에 젖은 거리에 적막감이 맴도는 가운데, 거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의 노래가 구슬프게 들려왔다.

***

Qui A Tue Grand Maman, 우리나라 말로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라는 노래는 1971년 프랑스에서 발표된 곡입니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에는 ‘오월의 노래’로 번안되어 불린 노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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