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72. 위기는 곧 기회
아직 교체 규정이 없는 이 시대 축구에 있어 부상 이탈은 팀에 치명적인 타격이다.
맨유는 1957-58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어니 테일러의 부상 이탈로 매우 힘든 경기를 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그 경기는 이겼고, 챔피언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아찔했던 상황은 지금은 무용담처럼 언급되곤 했다.
‘언제든 그런 상황이 또 발생할 수 있다. 다음에도 무용담처럼 얘기하고 싶으면 대비를 게을리하지 않으면 안 돼.’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한 머피 코치는 한 명, 혹은 둘이 이탈한 상황에 대비한 훈련을 하곤 했다.
그 덕에 맨유 선수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적절히 대응해 나갔다.
한 명이 빠진 만큼 서로 역할이나 공간을 분배하며 진영을 안정시켰던 것.
그러나 훈련과 실전은 마냥 같지 않은 법.
맨유가 한 명 부족한 만큼, 리버풀은 공격에 한 명 더 가세시킬 수 있었다.
여기에 다소 넓어진 간격의 틈을 펠레와 로저 헌트 등이 마구 헤집으며 들어왔다.
‘확실히 수월해졌지만, 왠지 재미는 없어졌어.’
그렇다고 펠레는 승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존 Y. 리와 바비 찰튼.
자신의 눈앞에서 챔피언의 영광을 앗아 간 놈들에게 패배의 쓴맛을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펠레, 유나이티드 문전으로 돌파를 시도하지만, 던컨의 마크에 일단 물러나면서 패스… 알란 아코트가 공을 받아 이안 캘러헌에게로 흘려 줍니다!」
측면에서 기습적으로 파고든 이안 캘러헌은 빌 포크스의 마크가 들어오기 직전에 슈팅을 날렸다.
칼날같이 예리한 슈팅은 아슬아슬하게 크로스바를 넘어갔다.
“와, 큰일 날 뻔했네.”
“펠레에게 시선이 집중되니까 오히려 저런 녀석을 놓치게 되는군.”
“아니, 저런 녀석이라고 깔보기엔 심상찮은 놈 같은데…….”
맨유 팬들이 불안감에 웅성이고 있는 사이, 해리 그렉이 멀리 걷어찬 공이 최전방에 있던 준영에게로 떨어졌다.
하프백 포지션에 있으면서 공격 때는 데니스 바이올렛의 빈자리를 메워야 했던 준영은 머리로 받아 낸 공을 절묘하게 안쪽으로 돌려놓았다.
그러고는 끈질기게 달라붙는 수비수를 뿌리치고 리버풀 문전을 향해 달려갔다.
“단독 돌파를 시도하려고? 예전이면 몰라도 이젠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거다, 존.”
섕클리 감독의 장담대로, 리버풀 수비수들은 준영의 개인기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진로를 막으며 지연시켰다.
하지만 준영이 정말 상대 수비가 버거워서 돌파를 지체했던 것은 아니었다.
‘공격은 혼자보다 여럿이 같이해야 수비에 혼선을 주고 성공할 확률도 높아지니까.’
그래서 동료 공격수들이 접근해 오기를 기다렸다.
가장 먼저 호응해서 다가온 것은 존 레논.
그는 공을 받자마자 리버풀 박스 안으로 돌파해 들어갔다. 마치 좀 전에 이안 캘러헌이 했던 것처럼.
“이 딴따라 자식이!”
“너 같은 놈에게 뚫릴 리버풀 골대가 아니다!”
지난번에 한 번 뚫려 놓곤.
피식 웃음을 지었던 레논은 리버풀의 중앙 수비수 로니 모란까지 제쳐 냈다.
하지만 마지막 터치가 살짝 길었던 탓에 슈팅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골키퍼의 품에 잡혔다.
‘이크, 바로 리버풀의 역습인가.’
아쉬워할 겨를도 없이, 준영과 맨유 공격수들은 황급히 수비로 전환했다.
일부러 골키퍼나 그에 가까이 있는 수비수들에게 얼쩡거리면서 쉽사리 공이 전방으로 전달되지 못하게 지연시켰다.
그런데 지연을 목적으로 했던 그 압박 플레이가 의외의 찬스를 만들어 주었다.
「유나이티드 공격수들이 공을 향해 적극적으로 달려듭니다. 로니 모란, 화이트의 패스를 받아 앞으로… 아, 이게 뭡니까!」
앞쪽으로 공을 보내려던 로니의 패스가 준영이 쭉 뻗은 발에 맞고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그 공을 공격수 워렌 브래들리가 잡아서 냉큼 페널티 박스 안으로 몰고 갔다.
“으악! 안 돼-!”
“막아! 얼른 막으라고!”
콥스의 닦달을 듣기라도 한 듯, 골키퍼 로버트 슬레이터가 슈팅을 날리는 워렌에게 달려들었다.
로버트의 몸에 맞고 살짝 굴절된 슈팅은 골대를 벗어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번개같이 몸을 날린 존 레논이 골대 안으로 공을 밀어 넣었다.
***
“저, 저럴 수가……!”
뜻밖의 상황에 콥스는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반색을 한 맨유 선수들은 득점에 성공한 레논에게 달려갔다.
“잘했어, 레논! 어, 근데 너 어디 다쳤냐?”
“으으윽… 주, 죽을 것 같아요…….”
골을 넣은 직후, 레논은 포스트 바에 부딪쳤다.
달려든 가속도가 있다 보니 당연히 아플 수밖에 없지만, 하필이면 영 좋지 않은 곳이 심하게 부딪쳤다는 게 문제였다.
그 때문에 승부에 중요한 골을 넣고도 기뻐할 수 없었다.
“아, 안 되겠어요. 터졌나 봐요. 진짜 못 뛰겠어요.”
“나가서 좀 쉬고 있어. 그러다 보면 나아질 거야.”
그 부위가 예민하긴 해도 쉽게 파손되진 않는다.
부축을 받아 필드 밖으로 나간 레논이 숨을 돌리는 가운데, 준영과 맨유 선수들은 곧장 수비로 전환했다.
“참 나, 저렇게 어이없게 골을 먹다니…….”
“상대가 한 명 적다고 방심한 결과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오히려 저 악마들의 밥이 될 거야.”
수비진의 실책에 한숨이 나왔지만, 펠레는 이내 아쉬운 감정을 떨쳐 냈다.
지금은 얼른 동점 골, 그리고 역전 골을 따내는 데 신경 써야 하니까.
「리버풀의 킥오프로 경기가 재개됩니다. 저력을 발휘하는 유럽 챔피언을 과연 잡을 수 있을지……?」
현재 필드에 9명밖에 없는 맨유는 다들 페널티 박스 부근에 모여 밀집 수비를 펼쳤다.
마음이 급했던지 리버풀 선수들은 다소 무리한 패스와 슛을 시도했다.
그것을 몇 차례 끊어 냈지만, 아쉽게도 머릿수가 부족하다 보니 역습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지금은 버티는 게 최선인가.’
농성전을 계속 펼치는 가운데, 못 뛸 것 같다던 레논이 다시 필드로 돌아왔다.
부상(?)의 여파 때문인지 뛰는 폼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없을 때보다는 한결 나았다.
안 그래도 다들 슬슬 체력이 떨어지는 시점이었으므로.
‘발이 느려졌군. 이 틈에 치고 들어가면……!’
알란 아코트에게 공을 보낸 펠레는 재빠르게 맨유 페널티 박스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알란의 리턴 패스가 들어오는 순간, 빌 포크스와 맥닐은 앞으로 나갔다.
오프사이드 트랩을 쓰려고 한 것이지만, 선심은 깃발을 들지 않았다.
‘이런, 한 박자 늦었어!’
준영이 황급히 펠레의 앞으로 달려갔다.
늦지 않게 슈팅 찬스를 막아 냈다 싶던 그때, 현란하게 스텝을 밟던 펠레가 양쪽 다리를 꼬면서 공을 뒤쪽으로 보냈다.
아니, 보내는 척하며 뒷발로 공을 쳐 놓고는 재빠르게 돌파해 나갔다.
‘호커스 포커스!’
이 기술은 어디서, 또 누구에게 배웠단 말인가!
순식간에 돌파당한 준영은 황급히 돌아서 태클을 날렸다.
펠레가 슈팅을 하기 직전에 다리 사이에서 공을 밀어낼 의도였다.
“으악!”
삐익-!
준영의 도박은 실패했다.
그가 날린 백태클은 공이 아닌 상대 발뒤꿈치를 걷어차 버렸다.
그리고 펠레가 쓰러지기 무섭게 심판은 페널티킥을 불었다.
“아아, 하필 거기서 파울이라니.”
“저 상황에선 캡틴 리도 어쩔 수 없… 아!”
탄식하던 맨유 팬들은 뒤이어 내려진 심판의 판정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유나이티드 5번 존 Y. 리, 퇴장.”
‘하아… 역시나.’
심판의 판정에 준영은 길게 한숨을 토했다.
당황해서 무리한 건 사실이다.
그래도 이 시대에는 백태클이 엄격하지 않으니, 괜찮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무참히 어긋나고 말았다.
“미안하다. 어디 다치진 않았냐?”
“뛰는 덴 문제없어.”
준영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선 펠레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랑 끝까지 뛰면서 결판을 보고 싶었는데…….”
“결판은 났어. 반칙을 했으니 내가 진 거지. 다음에 또 맞붙어 보자고.”
“좋아. 갚아 줄 건 아직 잔뜩 남아 있으니까.”
펠레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기 전에 준영은 던컨에게 주장 완장을 채워 주었다.
“진짜 면목이 없다. 주장이란 놈이 팀을 어렵게 만들고 떠나다니…….”
“걱정 마. 뒷일은 이 천재에게 맡기라고.”
던컨은 자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준영의 어깨를 도닥였다.
준영이 필드에서 나간 후, 펠레는 페널티킥을 깔끔히 성공시키며 2 대 2 동점을 만들었다.
추격당했다는 사실보다 더 힘든 건 이제 9명으로 11명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현실.
맨유는 매우 힘든 상황에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던컨의 두 눈에서는 어느 때보다 강한 투지가 일렁였다.
위기는 곧 기회도 되니까.
“어디 해 볼까? 영웅이 되기 딱 좋은 순간이니.”
역전을 노리는 축구 황제를 향해 잉글랜드의 천재 플레이어가 과감하게 달려들었다.
***
“독재 타도라……. 꽤 맹랑한 짓을 하는 친구로군.”
소장 계급장을 달고 있는 군인은 신문에 커다랗게 실린 이준영의 사진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이 사진을 보고 있을 누군가를 생각하니 쉽게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곽영주 그놈이 보면 펄펄 뛰겠군. 이준영이 이 친구, 곽영주와 친했던 거 아닌가?”
박 소장의 물음에 곁에 있던 부관이 대답했다.
“곽영주와의 사이는 모르겠지만, 술자리에서 만송 선생과 대판 말싸움을 벌였다는 소문이 있는 걸 보면 자유당 하는 짓이 별로 맘에 들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하긴 그게 정상이지. 더구나 슬슬 말로가 보이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네, 올 것이 오고 있습니다.”
서슴없는 부관의 말에 박 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문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학생들이 들고일어났고, 시민들이 봉기했지. 이제 운동선수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에서도 자유당 정권에 대한 성토를 높이고 있어.”
학생 김주열의 참혹한 죽음은 국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학생이 주도하던 시위는 이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참가하고 있었고, 그 횟수나 규모도 이전보다 커졌다.
특히 마산을 중심으로 경남 일대는 대규모 항쟁이 발생해 더 이상 경찰력으로는 손쓸 수 없는 지경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들이 있는 이곳 부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명선거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이 거리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대학 교수와 같은 지도층 인사들도 이들의 행렬에 합류했다.
“요즘 자괴감이 느껴지긴 해. 학생과 시민들은 저렇게 용감한데, 정작 총을 든 군인은 비겁하게 눈알이나 굴리고 있으니 말이야.”
“모든 일엔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선 말입니다.”
“때가 있다……. 태준이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나? 난 어째 때를 기다리다 기회를 놓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한데 말이야.”
박 소장은 요즘 조바심이 들었다.
김홍일이나 이범석 등 군부에서도 명망이 높은 이들이 자유당을 비난하며 주가를 계속 높이고 있는 상황을 보면 더욱 그랬다.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란 말이 틀린 게 아니야. 만약 내가 지금 부산 군수 기지가 아니라 수도사단에 있었으면…….”
박 소장이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을 때, 밖에서 노크와 함께 장교 한 명이 들어와 경례를 했다.
“무슨 일이야?”
“그게…….”
낯빛이 굳은 장교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손에 들린 전문을 낚아챈 박 소장은 곧장 내용을 살펴보았다.
“…진짜 올 것이 왔군.”
‘계엄령’이라는 세 글자가 박 소장이 낀 선글라스에 선명하게 비쳤다.
***
마지막에 등장한 인물은 힌트가 충분하니 누군지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축구도 꽤 좋아했었죠. 특히 함흥철 선수의 팬이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자기 이름을 딴 국제 대회도 만들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