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70화 (270/400)

Round 270. 분노 충천

‘정말 끔찍하군.’

사진에는 경찰이 쏜 최루탄이 머리에 박혀 죽은 학생이 찍혀 있었다.

시신은 바다에서 발견되었는데, 선거 직전 마산에서 일어난 항쟁에서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아마 진압했던 경찰 쪽에서 문제가 심해질까 싶어 시신을 유기한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캡틴 리가 아는 역사에서도 있었던 일입니까?”

“예, 끔찍하게 피살당한 학생의 시신이 발견되어 전국적인 시위로 번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준영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들은 정보를 떠올렸다.

죽은 학생의 이름은 김주열.

그의 시신이 발견된 건 4월 11일이었다.

오늘이 3월 26일이니, 실제 역사보다 이르게 발견된 셈이다.

‘그럼 4.19 혁명도 더 앞당겨지는 건가? 그게 어떤 영향을 불러오게 될까?’

준영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번즈가 다시 말을 건네 왔다.

“현재 해당 지역 경찰은 정확한 사인을 분석한다며 시신 공개를 미루고 있습니다. 신원 역시 마찬가지고요.”

“미뤄서 무마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거지요.”

역사를 아는 준영은 물론이고, 번즈가 보기에도 이번 일이 대중에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린 학생이 이런 참혹한 죽음을 맞았으니, 독재 정권에 대한 분노는 더욱 거세게 타오를 것이다.

‘진짜 골치 아프군. 사태가 더욱 격화되면 할아버지도 위험해지는 거잖아.’

이억관이 알려 준 바에 따르면, 현재 할아버지 이강윤은 행방이 묘연한 상태라고 한다.

복수하겠단 마음에 시위대에 가담한 것으로 보이지만,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는 파악되지 않았다고.

‘돌아 버리겠군. 하필 이런 식으로 꼬이다니…….’

좀 더 일찍 손을 썼어야 했는데.

할아버지의 인생에 영향을 끼칠까 봐, 그로 인해 자신의 존재에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우려에 접선을 미뤘던 게 후회가 되었다.

“존, 당신이 현재 한국 상황에 관심을 보이는 건 당신의 선조 때문이지요?”

“맞습니다. 만약 할아버지가 잘못되면 내 존재는 그대로 사라져 버릴지도 몰라요.”

작년에 꿈에서 봤던 것처럼.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과거로 보낸 루이스 대령이 그와 관련해서 경고해 주고 있었다.

“당신이 아는 정보를 전부 주십시오. 한국에 있는 우리 정보원들에게 당신 할아버지의 행방을 추적하게 할 테니까요.”

“고맙습니다, 번즈. 늘 신세를 지네요.”

“신세 지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이지요.”

번즈는 준영이 미래의 정보를 모두 털어놓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대로 그가 사라지게 되면 손해.

그러니 준영의 존재가 사라져 버릴 만한 사태는 미리 막아 내야 한다.

“그런데 존,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말입니다.”

“놓치고 있다뇨?”

“할아버지의 안위가 당신의 존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했죠? 그럼 할머니 쪽은 어떻습니까?”

“아, 할머니는…….”

그쪽은 미처 생각을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루이스 대령의 경고는 할아버지와 관련된 것이었으니까.

거기다 할아버지와 달리 할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야단났군. 역사도 가속된 상황에서 할머니 신변에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찝찝했지만, 준영은 일단 할아버지 쪽에 신경을 쓰기로 했다.

지금은 그게 최선이니까.

***

“강윤아, 집까지 바래다줘서 고마워.”

“하하, 고맙긴. 이 정도를 가지고…….”

지구 반대편에서 준영의 속이 타들어 가고 있을 즈음, 강윤은 시위를 하면서 만났던 누나를 바래다줬다.

처음엔 한 살 연상인 줄도 몰랐다. 체구도 작고 인상도 어려 보였으니까.

그런 그녀에 비해 강윤은 고교생들보다도 키가 컸다.

“소희 누나, 내가 누나 몫까지 싸울 테니까 누나는 이제 시위에 나오지 마. 요즘 경찰이나 깡패들 진압도 계속 더 험악해지고 있으니까…….”

“응, 알았어. 강윤이도 조심해야 해.”

생긋 미소를 지은 소희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이 닫힐 때까지 강윤은 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

부러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던 형님들은 강윤의 등을 치거나 어깨를 두들겼다.

“이야, 이강윤. 너 이 자식, 수완 좋구나.”

“이 난세에 피어오르는 사랑이라…….”

형님들이 던지는 말에 강윤은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그, 그런 사이 아니라고요!”

“야 인마,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번 일이 끝나면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해 봐. 이 형님이 근사한 제과점 하나 소개시켜 주지.”

희희낙락 떠들던 형님들은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강윤에게 말했다.

“너도 이제 그만 집에 가. 이 이상은 위험해.”

“왜요?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아까 네가 말했잖아. 진압이 더 험악해지고 있다고.”

서울에 외국 외교관들이 상주하고 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벌써 마산에서처럼 총성이 울리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 형님이 수도사단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하고 있거든? 얼마 전에 연락이 왔는데, 부대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대.”

“예? 그럼 군대가 진압하러 오는 거예요?”

“아직은 몰라. 하지만 계엄령을 내리니 마니 말이 많잖아.”

이런 상황에서 어린 동생들을 휘말리게 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권유했지만…….

“싫어요. 난 끝까지 싸울 거예요. 죄 없는 우리 아버지를 건든 놈들이 몰락하는 꼴을 볼 거라고!”

“휴,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그러는 형님들은? 형들도 민증 안 나온 건 마찬가지잖아!”

언성을 높이던 그들은 근처에 경찰이 나타나자, 냉큼 근처 골목으로 피신했다.

요즘 경찰과 건달들은 거리에 학생들이 보이면 시위하러 나온 게 아니냐며 추궁하곤 했으니까.

실제로 이런 검문 과정에서 잡혀간 학생들도 꽤 있었다.

“휴, 왜정 때 순사에게 쫓기던 독립운동가 어르신들 기분이 이랬으려나?”

“그래도 그때가 더 위험했지.”

조심스럽게 이동하던 강윤의 일행은 시장 근처 거리에서 일어난 소란을 보았다.

시위가 일어난 건 아니고, 사람들이 호외로 뿌려진 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신문을 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왜들 저러지?’

의아했던 강윤은 길바닥에 뿌려진 호외를 집어서 보았다.

그리고 그의 표정도 시장통 사람들만큼이나 충격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마산 경찰들이 은폐하려 애썼던 참상이 공개되고 말았다.

끔찍하게 피살당한 학생의 사진을 본 사람들은 격분했다.

민주주의라는 걸 잘 모르는 노인들도, 바깥일에 무관심한 아낙네들도, 그리고 이 나라 정치에 미래가 없다고 탄식하던 비관론자들까지 모두.

운명의 4월을 앞두고 대한민국 전역이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

1960년 3월 30일.

리버풀과 맨유의 37라운드 경기를 보기 위해 수만 명의 사람들이 안필드로 모여들었다.

“역사적인 경기가 될 거야!”

“그래, 오늘 경기를 이기면 남은 경기와 상관없이 우승 확정이니까!”

“그보다 유나이티드를 격파한 뜻깊은 날이 되는 거라고.”

현재 잉글랜드 풋볼 리그의 대표이자 유럽의 제왕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버풀 팬들은 오늘 경기 승리로 리그 우승은 물론, 맨유가 갖고 있는 패권까지도 가져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제 우리가 풋볼 리그의 대표다!’

‘우리 리버풀이 다음 유러피언 컵 챔피언이, 유럽의 패왕이 될 거라고!’

꿈은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그 꿈을 실감하기 위해서는 먼저 왕좌의 주인부터 확실히 물리치지 않으면 안 된다.

‘올 시즌은 리버풀이 우승을 하겠죠. 하지만 우리를 이기진 못할 겁니다.’

지난번에 존 Y. 리가 인터뷰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

당연하지만 콥스는 물론이고, 리버풀 선수들도 발끈하고 나섰다.

‘반드시 유나이티드를 박살 낼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승을 해도 개운하지 않을 테니까.’

경기 전날 인터뷰에서 리버풀의 주전 공격수 펠레는 이렇게 말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지난번 올드 트래퍼드 원정 무승부가 내내 아쉬웠던 펠레는 이번에야말로 승리를 따내리라 다짐했다.

그건 다른 선수들이나 빌 섕클리 감독도 마찬가지.

그래서 그들은 필승의 뜨거운 열망과 맨유에 대한 강한 분노를 유니폼에 담았다.

‘저건……!’

동료들과 함께 라커룸에서 나온 준영은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리버풀 선수들의 유니폼을 보고 놀랐다.

상, 하의와 삭스까지 모두 붉은색.

리버풀 하면 떠오르는 올레드(All Red)가 드디어 역사의 무대에 나타났다.

“예전에 네 녀석이 그랬지. 우리가 버스비의 짝퉁들이냐고 말이야.”

리버풀의 공격수 알란 아코트의 말에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다.

“짝퉁이 아니란 걸 똑똑히 보여 주지. 너희가 더 이상 챔피언이 아니라는 사실도!”

“그래? 그때 내 말을 기억하고 있다면 이 말도 기억하고 있겠군.”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린 준영은 리버풀을 두 번째로 만났을 때 했던 말을 내뱉었다.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은 있어. 처맞기 전까지는.”

그 말에 알란 아코트 옆에 있던 펠레가 곧장 쏘아붙였다.

“흥, 어느 쪽이 처맞을지는 두고 볼 일이지!”

“두고 볼 일도 없어.”

준영은 오늘 리버풀의 잔칫상을 엎어 줄 생각이었다.

딱히 리버풀에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요즘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 때문에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보니, 스트레스를 확 풀고 싶었다.

그래서 코칭스태프에게도 오늘 수비보다 높은 위치로 전진 배치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자, 말다툼은 거기까지. 시간 됐으니 이만 나가자고.”

주심의 인솔하에 양 팀 선수들이 필드로 나갔다.

경기장 한쪽을 붉게 물들인 콥스는 자신들의 팀에겐 응원의 함성을, 그리고 맨유 쪽에는 야유를 퍼부었다.

“Go! Go Liverpool!”

“Loser United!”

콥스가 야유를 퍼붓건 말건, 바비 찰튼과 나란히 하프백으로 출전한 준영은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삐익-!

경기가 시작되자, 준영과 맨유 선수들은 초반부터 강하게 리버풀을 몰아붙였다.

주요 표적이 된 이는 바로 리버풀 공격의 핵심인 펠레.

준영과 바비는 번갈아서 펠레를 견제하며 그에게로 향하는 패스를 끊어 내거나, 그가 공을 잡았을 때 거칠게 마크하며 공세를 꺾어 버렸다.

“저 자식들, 초반부터 페이스를 높이는데?”

“쳇, 체력이 남아도… 는 놈들이 맞구나, 젠장!”

이준영과 바비 찰튼은 하드 워커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작년에 두 사람은 FA에게 무작위로 지정되어 신체 및 체력 검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 무작위 지정 검사는 이번 시즌 약물 금지 규정이 세워지면서 시작하게 되었는데, 맨유에서는 둘이 처음으로 지목되었다.

일부 언론의 기대(?)와 달리 준영과 바비는 약물 검사에서는 음성, 그리고 체력 검사에서는 리그 톱 수준으로 나왔다.

둘은 그 톱 수준의 체력을 발판으로 펠레를 봉쇄하고, 공을 가로채 역공을 펼쳤다.

“앱스타인 씨가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랬지만… 승부는 냉정하니까.”

바비의 패스를 받은 레논은 측면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갔다.

그러곤 크로스를 올리는 척하며 그대로 돌파, 박스 중앙을 향해 컷백을 날렸다.

중앙의 데니스 바이올렛이 슬쩍 흘려 버린 공은 뒤쪽에서 쇄도하던 준영의 발끝에 걸렸다.

논스톱으로 때린 슈팅은 리버풀 골키퍼 로버트 슬레이터의 펀칭을 뚫고 골대 안에 떨어졌다.

“아악, 제기랄! 또 저놈이야!”

“왜 맨날 저놈에게 당하는 거야!”

전반 16분, 준영의 선제골에 콥스는 단체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든 말든 준영은 기자들 앞으로 다가가 유니폼을 벗어 던졌다.

내의에 적힌 ‘독재 타도’라는 네 글자가 그대로 카메라에 담겼다.

***

리버풀이 올레드가 된 건 60년대 들어서입니다.

당시에 빌 섕클리 감독은 상대 팀을 심리적으로 위축시킬 의도로 올레드 유니폼을 도입했다고 합니다.

붉은색은 위험과 강력한 이미지를 상징하는데, 상대가 그만큼 리버풀을 위험하고 강한 팀이라 인식할 거라 보았던 거죠.

우리나라 대표팀도 올레드 유니폼을 오래 입은 적이 있습니다. 1977년부터 1993년까지 입었죠.

최근에는 리우 올림픽 때부터 러시아 월드컵까지 또 올레드로 입었고, 현재도 살짝 물 빠진(…) 올레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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