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69. 혁명의 시대
“이기붕은 물러나라!”
“독재 정권 타도하자!”
한 무리의 학생들이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그들의 시위를 보던 시민들은 박수를 치고, 동참하기도 했다.
삐익- 삑!
날카로운 호각 소리와 함께 경찰들이 몰려왔다.
그러자 시위대는 냉큼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이런 미꾸라지 같은 놈들!”
“학생이면 공부나 할 것이지!”
경찰들이 투덜거리며 물러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거리에 시위 함성이 울려 퍼졌다.
조금 전에 숨거나 달아났던 학생들이 되돌아왔던 것.
이렇게 게릴라 같은 산발적인 시위가 서울 곳곳에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점점 더 잦아지는군요.”
“앞으로 더 심해지겠지.”
다방에서 양우조와 대화를 나누다 시위를 목격한 이억관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패악이 극에 달한 자유당의 독재가 마침내 종말로 치닫고 있다.
이건 반길 만한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있었다.
“마산은 완전히 전쟁터나 다름없다고 하더군. 더구나 심각한 건 이게 끝난 게 아니라 진행 중이라는 거야.”
“지금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도 시민들이 죽고 다치고 있다는 겁니까?”
이억관의 물음에 양우조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산은 이미 선거 당일부터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민주당 간부들이 사전 투표와 공개 투표를 확인했기 때문.
분노한 그들은 오전 10시 30분에 선거를 포기했고, 소문을 들은 시민들은 민주당 마산시 당사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렇게 몰려온 사람들은 거리를 행진하며 부정 선거에 항의했다더군. 시위대 숫자는 순식간에 수천 명으로 늘어났고.”
마산은 그리 큰 도시가 아니다.
그런데 수천 명의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니 경찰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그들은 시위를 주도한 민주당 간부들을 연행했다.
그러자 분노한 시민들은 너도나도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누구 명령인지 몰라도 아주 멍청한 짓을 했군요. 일단 다독여도 시원찮을 판에…….”
“듣자니 마산 지역 자유당 의원 허윤수가 부추겼다고 하더군.”
만 명이 넘게 늘어난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경찰은 최루탄은 물론, 총격도 서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해산하기는커녕 돌을 던지며 경찰과 맞서 싸웠다.
“그 와중에 자유당 마산 당사와 서울신문 지국, 파출소와 허윤수의 집이 시위대의 습격으로 파괴되고 불탔지.”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군요.”
마산에서 민주 항쟁이 일어났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자유당 정권은 처음에는 빨갱이들의 소행이다, 폭동에 총격 진압은 정당하다며 뻔뻔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김홍일과 이범석 등이 지탄을 했고, 여러 각계각층의 인사들도 비난에 동참했다.
거기다 주요 우방국 중 하나인 영국 정부가 제일 먼저 우려를 표명하고 나서기에 이르렀다.
결국 국내외 압박에 진땀을 뺀 자유당 정권은 내무부 장관 최인규와 치안국장 이가학을 사임시켰다.
“근데 그러면 뭘 하나. 후임자로 임명된 홍진기 그놈도 앞의 놈들과 다를 바 없는데.”
홍진기는 조봉암의 숙청에 선봉장을 맡은 인물이다.
그런 자가 후임으로 나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이기붕과 자유당 실세들이 호락호락하게 권좌에서 물러날 뜻이 없다는 게 아니겠는가.
“어디 그뿐인가? 시위 핑계로 계엄령까지 내리려 한다던데? 나중에 가면 이렇게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도 못하게 할 게야.”
“정말 문제입니다.”
아직 계엄령이 떨어지지도 않았지만, 출입국이 통제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강윤이 가족을 홍콩으로 데려가는 것은 굉장히 어려워졌다.
“근데 수출에 지장은 없나?”
“안 그래도 그 역시 좀 난감해졌습니다. 김현철 장관님도 지난해 물러나서 어디 마땅히 부탁할 데도 없고…….”
“일단 재무부에 내가 아는 이가 있으니 부탁해 보겠네.”
양우조와 사업 근황과 해결 방안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던 이억관은 도중에 병원을 들렀다.
강윤의 부친이 괜찮아졌는지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좀 어떠십니까?”
“사장님께서 살펴 주셔서 한결 좋아졌습니다.”
아직 마음대로 거동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운신은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근데 이 신세를 어찌 갚아야 할지……. 그 많은 병원비도 다 내 주시고…….”
강윤의 부친 이 씨는 이억관이 준영의 부탁을 받아서 자신들 일가를 살펴 주는 것을 아직 몰랐다.
그냥 아들 친구 아버지가 호의를 베푸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 걱정 말고 회복에만 전념하십쇼. 그보다 강윤이가 요즘 잘 보이지 않는군요.”
“아, 그거요? 제가 이젠 괜찮다고 학교에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했지요.”
이 씨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지만, 이억관은 왠지 마음에 걸렸다.
요즘 정국이 심상찮다 보니 어린 학생들도 시위에 나서고 있었으니까.
몇몇 교직원들은 이를 눈감아 주기도 했고, 교실이 텅 비다 보니 사실상 휴학을 한 학교도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이억관은 아들 필립이 귀가하자 바로 강윤에 대해서 물었다.
“강윤이요? 요즘 학교 안 나오는데요.”
“뭐라고?”
“병원에 있는 아버지를 돌봐야 하고, 아버지 대신 일도 하고 생활비도 벌어야 한다면서…….”
불길한 예감에 이억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서울 성북구 정릉동.
서울 토박이들이 모여 사는 이곳도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다.
“독재 타도! 독재 타도!”
“3.15 부정 선거 다시 하라!”
한창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하는 시위대에게 경찰과 화랑 동지회 소속 깡패들이 달려들었다.
“다 조져!”
“한 명도 놓치지 마!”
여느 게릴라 시위대처럼 정릉동의 시위대들도 곧장 흩어졌다.
하지만 요 며칠간 시위대에 시달렸던 경찰과 깡패들은 악에 받쳐 있었다.
당연히 대응이 거칠어짐은 물론, 집요하게 시위대를 쫓아왔다.
“꺄아악!”
시위에 참여했던 여학생이 깡패에게 머리채를 잡혔다.
비릿한 웃음을 짓던 깡패의 얼굴로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아악, 내 눈……!”
돌멩이를 던진 학생은 깡패를 밀쳐 버리고는 여학생을 부축했다.
“누나, 괜찮아요?”
“응. 고마워, 강윤아.”
이억관의 만류에도 복수심을 삭이지 못한 강윤.
그는 요즘 형님과 누나들을 따라다니며 부정 선거 규탄 시위에 가담하고 있었다.
뭉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정릉까지 다다랐다.
“도망쳐. 이쪽으로 경찰들이 오고 있어!”
골목으로 피신해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던 강윤과 시위대 학생들은 허둥지둥 도망쳤다.
하지만 그들은 경찰의 추적을 쉬이 따돌릴 수 없었다.
진압하는 경찰과 깡패들에게 맞고 다친 이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
부상자들을 부축해서 도망치던 강윤 일행은 근처에 있는 절을 보고 황급히 그곳으로 피신했다.
“스님, 밖이 소란스럽군요. 무슨 일 있습니까?”
불공을 하러 경국사를 찾았던 순정효황후의 물음에 주지가 바로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시위하다 다친 학생들이 피신해 왔다고 합니다.”
“그런 딱한 일이…….”
잠시 후, 순정효황후가 있는 대웅전 안으로 학생들이 들어왔다.
그 학생들 중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아, 할머니, 안녕하세요.”
“너는 이 소사의 아들이 아니냐. 너도 시위를 하고 있느냐?”
“예, 그게요…….”
강윤이 설명하려던 그때, 밖에서 부산한 발소리와 격한 고함이 들려왔다.
“절간에 숨어든 게 틀림없다! 샅샅이 수색해!”
사찰 안까지 경찰들이 들이쳤다!
강윤과 학생들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그런 그들을 본 늙은 황후는 무슨 생각을 했던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마마, 어쩌시려는…….”
“조용히 하거라.”
상궁들을 거느리고 대웅전 밖으로 나간 황후는 막 들이닥친 경찰들에게 호통을 쳤다.
“웬 놈들인데 경내를 어지럽게 하느냐!”
“비키십쇼. 공무 수행 중입니다,”
경찰의 말에도 불구하고, 순정효황후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는 죄지은 사람은 없다. 너희가 공무 수행을 할 이유는 없으니 당장 물러가거라.”
“나 이거야 원……. 계속 방해하면 체포합니다!”
“나는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어디 이 늙은이를 잡아가든 때려죽이든 마음대로 해 보아라.”
“아니, 이 노인네가 진짜…….”
피곤하고 짜증이 났던 경찰이 살벌하게 쏘아붙였지만, 황후는 눈 하나도 깜빡하지 않았다.
그녀는 수십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경술국치 당시에 옥새를 치맛자락에 숨기고 친일파 대신들에게 내어 주지 않으려 애썼던 일이.
그때는 결국 빼앗기고 말았다.
하지만 오늘 자신의 치마 품으로 숨어든 아이들은 절대 빼앗기지 않으리라!
그런 결연한 황후의 모습에 경찰들은 저도 모르게 기가 죽고 말았다.
“젠장… 다들 철수해!”
경찰들이 물러나자, 순정효황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안도하는 강윤과 학생들의 모습이 비쳤다.
왠지 모르게 후련한 기분에 늙은 황후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
퍼스트 디비전 36라운드.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는 사태로 심란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준영은 풀럼 원정 경기에 출전했다.
그것도 적극 자청해서.
“존이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러게요. 본인이 자청해서 출전하긴 했지만…….”
준영이 무엇 때문에 심란해하는지 아는 코칭스태프로는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우려와 달리, 준영은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은 채 풀럼의 공격을 잘 막아 냈다.
심지어 전반 19분 코너킥 상황에서는 헤딩 선제골을 터트렸다.
그뿐만 아니라, 4분 뒤에는 데니스 바이올렛에게 멋진 스루패스를 찔러 주며 두 번째 골에 공헌했다.
그 활약에 버스비 감독과 머피 코치는 인상을 활짝 폈다.
“괜한 걱정을 한 것 같군.”
“예, 빼지 않길 잘했습니다.”
준영은 오늘 경기에 평소보다 더 강한 집중력을 보였다.
경기에 뛰는 동안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기 때문.
그렇다 보니 오히려 필드에서 뛰어다니는 시간이 가장 편안했다.
아쉽게도 그 시간은 짧았다.
예전 같으면 길게 느껴지는 90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그 점이 아쉽기는 했지만, 열심히 뛴 덕분에 결과는 대승.
맨유는 후반에 조니 자일스와 던컨 에드워즈, 알렉스 퍼거슨이 차례로 골을 터트리며 풀럼을 5 대 0으로 압살했다.
“대승을 축하합니다, 캡틴 리.”
경기가 끝난 후, MI6의 제이미 번즈가 찾아와 인사를 건넸다.
준영은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영국 정부가 자유당 정권을 압박해 줬단 얘기를 들었습니다. 힘을 써 주셔서 고마워요.”
“고맙긴요. 공짜는 아니었잖습니까.”
외교적으로 나서는 대가로 영국 정부는 또 하나 귀중한 미래의 정보를 얻었다.
차기 미국 대통령 당선자와 중소 국경 분쟁에 대해서.
모두 외교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유용한 정보들이었다.
“현재 한국의 정국에 대해서 우리뿐만 아니라 미국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겠죠. 혹시 혼란을 틈타 북한이 또 남침하면 큰일일 테니까.”
한반도 전체가 적화되기라도 하면 이후에 일본도 위험해지고, 미국의 태평양 방어에도 문제가 생긴다.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준영이 알기로 지금 공산권은 소련과 중국이 으르렁대고 있고, 북한은 여기에 눈치를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부적으로도 한창 김일성의 반대파를 숙청하는 상황이고.
“근데 확실히 한국의 상황이 더 격화될 것으로 보이긴 합니다. 그게 캡틴 리가 아는 역사대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또 무슨 일이 터졌습니까?”
준영의 물음에 번즈는 손에 든 서류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서류의 사진과 내용을 본 준영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
1. 이범석 장군과 달리 김홍일 장군은 4.19 혁명을 윗동네가 사주한(…) 사건인 줄 알았답니다.
실제 역사에선 당시까지 중화민국 대사로 재임 중이라, 입수되는 정보가 정부 기관을 통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죠.
2. 당시 학생들이 시위에 적극 참여했던 건, 선거 가능한 연령대가 많았던 탓도 있습니다.
전쟁 여파나 생활고 등으로 늦게 학교를 다닌 분들도 있었으니까요.
당시 교직원들 중에서도 학생들의 시위를 지지하는 분들도 많았고, 실제 애들 단속 좀 잘하라는 상부의 명령에 대해서도 ‘아이들이 옳은 일을 하고 있는데 뭘 어쩌라고?’ 하면서 대놓고 반발한 분들도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