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68화 (268/400)

Round 268. 올 것이 왔다

상황이 점점 험악해지자, 경기는 중단되었다.

대기하고 있던 경찰과 동대문파 건달들이 나섰지만, 이미 분노한 관중들을 진정시키기란 불가능했다.

“어떤 놈이 자꾸 소란을 피우는 거야? 뒤지고 싶냐, 엉?”

“오냐, 내가 그랬다! 죽여 봐. 죽여 보라고, 이 깡패 새끼야!”

“방귀 뀐 놈이 성질낸다더니! 실력도 개뿔 없는 것들을 데려다 놓고 사기를 쳐?”

“내 돈 내놔! 당장 환불하란 말이야!”

아무리 날고 기는 건달이라고 해도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이 달려들다 보니 속수무책.

벌써 여기저기서 줄행랑을 치거나 멱살이 잡혀 바닥에 내다 꽂히는 경찰과 건달들이 나오고 있었다.

“이거 위험한 거 아냐?”

“잘못하다간 진짜…….”

사태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잉글랜드 대표팀, 아니 잉글랜드 군인 선발팀은 허둥지둥 라커룸으로 피신했다.

마음 같아선 얼른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워낙 살벌하다 보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로군.”

군인 선발팀을 데리고 한국에 왔던 윈터보텀 감독은 길게 탄식했다.

준영이 아직 폭동이 날 상황은 아니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듯싶었다.

이렇게 영국인들이 전전긍긍하는 사이, 분노한 관중들은 경기장에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자유당은 각성하라!”

“국민을 기만하는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자!”

기대에 못 미치는 경기에 대한 불만의 불길은 집권 여당과 정부에게로 옮아 붙었다.

이미 10년이 넘는 집권 동안 실정도 심하고, 부정과 부패, 그리고 정치 깡패들의 만행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오늘 형편없는 경기는 그동안 억눌린 대중의 불만과 분노를 일시에 터트리기에 충분했다.

“자유당은 물러나라!”

“여러분! 더 이상 속으면서 살지 맙시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관중들은 집권당을 비판하는 구호를 외치며 시내 대로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군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전에 약속하고 행동한 것이 아니다 보니, 시위 행렬이 이 길 저 길로 흩어져 버린 데다, 시위 신고를 받고서 기마경찰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도, 도망쳐!”

“큭! 자유당의 개새끼들!”

아무리 숫자가 많다고 해도 말을 타고 경봉을 휘두르는 기마경찰을 당해 낼 방법은 없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도망치고,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웠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하지만 진압은 쉽지 않았다.

흩어진 사람들은 이내 다른 무리들과 뭉쳐서, 시내 거리 곳곳에서 시위를 이어 나갔으므로.

큰불을 잡았다 싶은 순간, 다른 곳에서 다시 불길이 피어오르다 보니 제대로 진압이 될 리 만무했다.

결국 소요 사태는 밤늦도록 계속되었고, 그 여파는 예상보다 넓게 퍼져 나갔다.

***

“빌어먹을,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일을 키워 놔!”

동대문 난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유지광에게 전해 들은 곽영주는 분통을 터트렸다.

그는 이번 축구 경기를 자유당 유세에 노골적으로 활용할 생각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국민들의 관심을 돌려놓고 과열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가라앉히는 게 목적이었다.

“그런데 모든 게 엉망이 되었어! 그 돼지 같은 노인네가 쓸데없이 숟가락을 얹는 바람에!”

“고정하십시오.”

“내가 지금 고정하게 생겼나!”

곽영주는 쉬이 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안 그래도 이 일은 벌써 대통령의 귀에 들어갔다.

잔뜩 불쾌한 기색을 보인 이승만은 지난달 대구에 있었던 학생 시위 때처럼, 이번 소요 사태로 체포된 이들을 바로 석방시킬 것을 명령했다.

여기서 민심을 더 격앙시켰다간 좋을 게 하나도 없었으므로.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작자들이야. 어차피 작전대로라면 당선은 뻔한데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한 건지!”

연방 짜증을 내던 곽영주는 진땀을 쏟고 있는 유지광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자넨 대체 뭘 한 거야? 왜 만송 일파가 멋대로 끼어드는 걸 가만히 두고 보고 있었냐고!”

“그쪽이 워낙 막무가내라……. 더구나 건달인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권력자들의 힘은 막강하다.

전후로 주먹 세계를 주름잡던 이정재 회장도 속절없이 밀려나 버리지 않았던가.

그의 뒤를 이어 동대문파의 보스가 된 임화수가 괜히 이기붕이나 자유당 실세들에게 굽실대는 게 아니다.

‘거기다 저들에게서 돌아서 버리기도 너무 늦었지.’

이미 동대문파와 화랑 동지회는 국민들에게서 자유당의 하수인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그러니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자유당이 집권을 연장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물론 국민들의 반발은 거세겠지만, 그거야 얼마든지 억누르면 그만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서 말이다.

“이제 대선까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어. 그땐 오늘과 같은 일이 생겨서는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이만 가 보라고. 가서 작전이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는지 검토하고.”

유지광이 인사를 하고 나간 후, 곽영주는 또 한 번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예전에 준영이 한국에 왔을 때 했던 말이 울리고 있었다.

‘만송 선생의 욕심은 틀림없이 큰 화를 부를 겁니다.’

그때 본인도 반박 못했을 정도로 준영의 말에 동의했다.

그로부터 1년이 넘은 지금, 준영의 말은 점점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 화를 만송과 그 일파들만 덮어쓰면 좋겠는데, 그리될 것 같지 않으니…….’

이제 와서 손절하기엔 너무 멀리 왔고, 너무 깊이 들어왔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제는 끝까지 가 보는 수밖에 없었다.

***

“으으…….”

“…아버지, 죄송해요.”

만신창이가 되어 병실 한편에 누운 아버지를 보며 강윤은 연방 눈물을 훔쳤다.

그때 친구 필립과 그의 아버지 이억관이 문병을 왔다.

“강윤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어제 동대문 운동장에 갔었는데…….”

강윤은 작년에 이준영의 경기를 보지 못한 것을 내내 아쉬워했다.

그게 신경이 쓰였던 걸까.

아버지는 강윤도 모르게 어제 열린 축구 경기를 예매했다.

이리저리 아는 인맥을 통해서, 저금해 놓은 돈까지 털어서.

그리고 아들과 함께 경기를 보러 갔다.

“하지만 경기 내용은 진짜 기대 이하였어. 나는 물론이고, 아버지도 크게 화를 내셨어.”

당연히 부자는 경기장에 있던 여느 관중들처럼 야유를 터트렸다.

문제는 경기가 중단된 다음.

부자는 시위에 동참할 생각까진 없었다.

다만 집으로 가는 방향이 시위대가 행진하는 방향과 겹쳤을 뿐.

“경찰들이 몰려와서 사람들을 마구 때렸어. 아버지와 난 놀라서 도망쳤는데, 경찰들이 뒤쫓아 와서는 아버지를…….”

그때 상황이 떠올랐던지 강윤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 만류하는 자신에게도 경찰들은 경봉을 휘둘렀다. 아버지는 그런 자신을 감싸느라 더 크게 다쳤고.

“시위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했는데도 때렸단 말이냐?”

이억관의 물음에 강윤은 분통을 터트렸다.

“그놈들은 저희가 하는 말은 듣지도 않았어요. 아버지가 심하게 다쳤는데 그대로 경찰서 유치장으로 끌고 갔죠.”

그나마 이후에 석방이 되어 풀려날 수 있었다.

같이 석방된 사람들이 도와준 덕분에 간신히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도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가만히 안 둘 거야. 아버지가 당한 만큼 갚아 주고 말겠어!”

“진정하렴, 강윤아. 너 혼자 섣불리 나서서 될 일이 아니야.”

복수심에 불타는 강윤의 모습에 이억관은 난감함을 금치 못했다.

준영은 이런 소요 사태에 친족이 휘말릴 걸 예상했던 걸까.

친척을 만날 수 있다며 이들 가족을 설득해서 홍콩으로 피신시키라고 했다.

그러면 준영이 만나러 가든, 다시 영국으로 데리고 오든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강윤의 가족을 홍콩으로 데려가는 건 불가능해졌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강윤아, 절대 엉뚱한 생각 하면 안 된다. 지금은 아버지 곁을 지켜 드려야 해. 알겠니?”

“네.”

애써 분노를 삼키는 강윤의 모습이 억관에게는 불안하게 보였다.

거기다 점점 돌아가는 상황도 심상치 않았기에 그의 근심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

맨유의 클럽 하우스 오스길리아스.

한 차례 훈련을 끝낸 선수들이 휴게실에서 잡담을 나누며 피로를 풀고 있었다.

“어제저녁엔 몰리랑 영화를 보러 갔어요. 근데 기대한 것만큼 재미가 없더라고요.”

던컨의 말에 숀 코너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었다.

“올해 상반기에는 그리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진짜 재밌는 건 하반기에 쏟아질 예정이지.”

“하반기에 뭐가 개봉하는데요?”

“듣자니 히치콕 감독의 사이코에 프랭크 시나트라가 출연하는 오션스11, 스탠리 큐브릭 제작에 커크 더글러스가 주연을 맡은 스파르타쿠스…….”

“서부 영화 같은 건 없어요?”

“있어. 율 브린너와 스티브 맥퀸이 출연하는 작품이 개봉할 거라고 했어. 분명히 제목이…….”

잘 생각나지 않았던 숀은 준영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가 영화 쪽으로도 제법 식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봐, 존, 혹시 그 서부 영화 제목 알아?”

“…….”

멍하니 뭔가 생각에 잠겨 있던 준영은 숀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러다 숀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번쩍 정신을 차렸다.

“존, 내 말 못 들었어?”

“아, 예. 방금 뭐라고 했죠?”

“하반기에 개봉할 서부 영화 말이야. 총잡이 7명이 나온다던데?”

“아, 매그니피센트 세븐 말이군요.”

한국에는 황야의 7인으로 알려진 작품.

나중에 21세기에 만들어지는 리메이크 작품에는 한국인 배우도 출연한다.

하지만 지금 준영은 하반기 개봉 영화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요 며칠 계속 멍하니 있을 때가 많던데……. 그 한국에 있다는 친척은 여전히 안 좋은 거야?”

“예, 아직 병원에 입원해 있다나 봐요. 퇴원하고도 몇 달간 요양은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준영은 이억관에게서 증조할아버지가 크게 다쳤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곽영주가 진행한 친선전 때문에.

‘차라리 내가 안 된다고, 협조할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으면 그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지 몰라.’

이번 일로 할아버지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 건 아닐까.

루이스 대령이 보여 준 예지에 불길한 장면이 있다 보니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 사고 때문에 한국에서 할아버지 가족을 빼내는 것도 실패했지. 억관 아저씨가 계속 지켜보고 있다고 하지만…….’

앞으로 더 큰일들이 벌어질 상황이라 안심이 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어제가 바로 한국의 대선.

만약 역사가 실제와 다르게 흘러간다면…….

“캡틴, 전화 받아요! 국제 전화입니다!”

클럽 하우스 직원의 말에 준영은 부리나케 전화기가 있는 카운터로 향했다.

자신에게 국제 전화를 할 사람이 누군지는 뻔했으니까.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나야, 준영이. 급히 알려 줄 일이 생겨서 연락을 하게 되었어.)

수화기로 들려오는 억관의 다급한 목소리에 준영은 올 것이 왔음을 확신했다.

“역시, 부정 선거가 터졌군요.”

(그래, 지금 난리도 아냐.)

자유당 정권은 몰래 진행했다고 하지만, 몰래 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거기다 참관인 추방과 뇌물 살포 및 협박까지 대놓고 벌어지다 보니, 언론에 숨길 수도 없었다.

게다가 부정 선거가 일어날 거란 예상이 각계각층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벌써 마산에선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라디오에서…….)

혁명은 예정대로 시작되었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가운데, 이제 준영은 불길한 미래가 일어나지 않도록 맞서 싸워야 했다.

***

2013년에 터키 이스탄불에서는 탁심 공원 보전 관련 문제로 시위가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탁심 공원은 우리나라로 치면 3.1 운동이 일어난 파고다 공원 같은 성지인데, 이걸 불법 공사로 없애 버린다고 하니 시민들이 들고일어났죠.

이 시위에서 평소에 서로 잡아먹지 못해 환장하던 갈라타사라이, 페네르바체, 베식타스 3팀의 서포트들이 대동단결해서 경찰과 맞서 싸웠습니다.

당시 이스탄불 경찰이 엄청나게 많은 최루탄을 쏘아 대며 진압을 하려 했지만, 결국 3개 서포트 연합군은 경찰을 쳐부숴 버렸죠.

이렇게 관중들의 봉기나 서포팅 조직들의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는 일은 종종 발생합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축구 경기를 금지하려 한 일도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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