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66화 (266/400)

Round 266. 갑작스러운 움직임

준영은 곧장 상황 파악에 나섰다.

대체 FA가 왜 곽영주의 요청을 수락했는지, 곽영주가 어떤 식으로 그들에게서 허가를 얻어 냈는지에 대해서.

이에 대해서 답을 알려 준 사람은 대표팀 감독인 월터 윈터보텀이었다.

(처음엔 기술위원들도 난색을 표했지. 리그 일정에 여유가 없었으니까.)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윈터보텀의 말에 준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 생각이 달라졌죠?”

(그 한국인이 꼭 정예 멤버일 필요는 없다고 했거든. 그러자 기술위원회에서는 아마추어 선수들이라도 괜찮냐고 물었고.)

이에 대해서 곽영주는 잉글랜드 대표 유니폼만 입고 나오면 상관이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 대전료를 그 자리에서 선불로 내면서 회의적인 기술위원들의 마음까지 돌려놓았다고.

“맙소사, 상관없다고 하더니만 그런 식으로…….”

아니, 어쩌면 곽영주는 수준이 낮은 선수들로 구성되는 것을 더 바랐을지 모른다.

한국 대표팀이 이길 수 있으면, 그만큼 대중의 이목도 끌고 화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까.

“그래서? 아마추어 선수들로 선발해서 대표팀을 꾸리는 겁니까?”

(처음엔 대학 선수들로 구성할까 하다가 그쪽도 학기 일정 때문에 난색을 표하더군. 그래서 군인들을 차출하려고.)

영국군은 부대마다 축구팀이 있고, 여기에 선수 출신이거나 병역 수행 중인 프로 선수들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있었다.

여기서 잘하는 선수들을 모아 일종의 군인 선발팀을 만들 것이라고 했다.

“군인 선발팀이라……. 한국 대표팀 선수들도 대부분 특무대나 군부대 소속이니 형평성은 맞을지 모르겠군요.”

(나야 위에서 시키니까 하는 일이지만… 존 자네는 이번 일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나 보군.)

“그거야 순수한 스포츠 친선 교류가 목적이 아닌, 아주 정치적인 목적 때문이니까요.”

준영은 현재 한국이 대선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과 정국이 대강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려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윈터보텀 감독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거참… 유럽이든 아시아든 독재 집단이 스포츠를 정치의 도구로 삼는 방식은 똑같구만.)

“비단 스포츠만은 아니죠. 사람들이 관심 있는 분야는 다 건드려 보고 자기들 입맛에 따라 통제하려고 들죠.”

(안 그래도 갑자기 극동 아시아 투어를 준비하라고 해서 좀 당황스러웠는데, 자네 얘길 들으니 더 가기가 싫군. 가서 폭동에 휘말리는 건 아닌지…….)

“아직 그 정도로 악화되진 않았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이에 준영은 윈터보텀에게 한국에 있는 지인들의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만약 뭔가 문제가 일어나거나 난감한 일이 있으면 그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될 겁니다.”

(고마워. 제대로 챙겨 주지도 못하는 감독을 이렇게 신경 써 주다니.)

“고마운 건 오히려 접니다. 협회 쪽에서 이런 거 알려 줄 사람은 감독님밖에 없으니까요. 아무튼 조심해서 다녀오십쇼.”

(그래, 언제 시간 나면 한번 보자고.)

통화를 종료한 후, 준영은 품속에서 수첩을 꺼냈다.

거기엔 올해 일어날 일 중 가장 큰 사건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3.15 부정 선거, 그리고 한 달 뒤에 4.19 혁명…….”

언 발에 오줌 누기 수준인 곽영주의 수작으론 혁명이라는 거대한 불길을 막아 낼 수 없다.

오히려 불을 끄려고 한 짓이 불을 더 키우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

3월이 되었지만, 아직 날씨는 쌀쌀했다.

유일하게 후끈한 열기가 흘러넘치는 곳은 사각의 필드.

뜨거운 숨을 토하고 뻘뻘 땀방울을 흘리는 맨유와 울버햄프턴 선수들은 쉴 새 없이 뛰어다녔다.

“왼쪽 조심해!”

“멍하니 있지 말고 따라가 붙어!”

관중들의 함성과 나팔, 북소리가 시끄러운 와중에서도 준영은 쉴 새 없이 소리를 지르며 수비를 조율했다.

‘남은 시간은 얼마지?’

준영은 힐끔 스코어보드 쪽으로 눈을 돌렸다.

후반전 남은 정규 시간은 약 5분.

스코어는 0 대 1로 원정팀인 울버햄프턴이 리드하고 있었다.

맨유는 전반 37분 선제골을 내줬다.

낮게 날아온 코너킥이 문전에 몰린 선수들 사이에서 우당탕하다가 상대 공격수 노먼 딜리가 밀어 넣은 것.

이후에 맨유의 슈팅이 연달아 울버햄프턴의 골문을 두들겼다.

하지만 브라이언 클러프의 헤딩슛은 골키퍼의 손에 잡히고, 데니스 로의 논스톱 슛은 옆 그물을 때렸다.

후반 15분에는 던컨의 기습적인 중거리 슛이 골대를 맞고 나오며 또다시 아쉬움을 삭여야 했다.

‘무승부로 끝낼 순 없어. 이러면 2위 자리도 불안해져.’

리버풀이 선두를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맨유와 울버햄프턴이 그 뒤를 잇고 있었다.

현재 맨유와 울버햄프턴의 승점 차이는 단 1점.

패배하면 순위가 뒤집히게 된다.

‘어떻게든 득점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점점 줄어드는 시간을 보며 준영이 초조함을 느끼는 가운데, 오늘 선제골을 넣은 노먼 딜리가 맨유 박스로 접근해 왔다.

곧장 던컨이 마크를 붙자, 그는 옆으로 슬쩍 패스를 내줬다.

그리고 그 패스는 미드필더 배리 스토바트가 잡아챘다.

‘슈팅이다!’

준영의 예상대로 스토바트는 바로 중거리 슛을 시도했다.

다행히 빌리 맥닐이 황급히 몸을 날려 스토바트가 날린 슛을 막아 냈다.

맥닐의 몸에 맞고 약해진 공은 골키퍼 해리 그렉이 냉큼 잡아챘다.

“좋아, 역공으로 가자!”

“얼른 패스해!”

다들 앞으로 나가는 가운데, 해리 그렉이 전방으로 멀리 차 보냈다.

그 공을 받아 낸 바비 찰튼은 브라이언 클러프 쪽으로 넘겼다.

수비를 제치고 들어갈까 하던 클러프는 재빠르게 공격 지역으로 들어가는 준영을 보고 패스를 보냈다.

하지만 그 공은 상대 수비수 빌 슬레이터의 발에 맞고 중간에 튀어 오르고 말았다.

‘이런, 받기 힘들잖아!’

돌아서서 가슴으로 공을 받아 낸 준영은 다시 한번 무릎으로 공을 띄워 올린 후, 그대로 바이시클 킥을 날렸다.

멋진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슈팅은 골키퍼의 손끝을 스치며 골대 안으로 떨어졌다.

“동점이다!”

“역시 캡틴 리!”

손톱을 뜯으며 초조하게 경기를 지켜보던 맨유 팬들이 일제히 함성을 터트렸다.

후반 42분.

아직 남아 있는 시간이 있으니 한 골 더 노려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막판에 경기가 원점으로 돌아온 가운데, 울버햄프턴이 다시 공격을 시도합니다. 근데 맥이 빠져 보이는군요.」

라디오 중계 캐스터의 말대로, 맥이 빠진 울버햄프턴의 공격은 무디기 짝이 없었다.

거기다 집중력까지 떨어진 상태.

던컨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냉큼 전진하며 울버햄프턴의 패스를 잘라 내 측면 쪽으로 달려가는 데니스 로에게 밀어 주었다.

“달려! 달려!”

“역전할 수 있어!”

관중들의 응원에 힘입어 나는 듯이 달려간 데니스는 중앙으로 쇄도하는 브라이언 클러프를 노리고 크로스를 올려 보냈다.

하지만 클러프는 그 크로스에 머리를 댈 수 없었다.

달려 나와 펀칭한 골키퍼와 충돌해 버렸기 때문.

“젠장, 이건 페널티킥…….”

투덜대던 그의 표정이 이내 반색으로 돌변했다.

준영이 리바운드 볼을 잡는 걸 보았던 것.

바로 논스톱 발리슛으로 날린 준영의 슈팅은 레이저처럼 곧게 날아가 골망을 흔들었다.

「역전! 역전 골! 캡틴 리가 경기를 뒤집었습니다!」

광고판을 뛰어넘어 간 준영은 열광의 함성을 터트리는 홈팬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통쾌한 역전 골 덕분인지, 곽영주나 한국의 정세로 인한 답답한 마음도 후련하게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

올드 트래퍼드 서쪽에 자리한 맨체스터 대학교.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캠퍼스로 낯선 사내가 모습을 보였다.

누군가 싶어 바라보던 학생들은 이내 ‘아!’ 하는 감탄을 터트렸다.

“저 사람, 캡틴 리 아냐?”

“맞아. 캡틴 리야.”

“저렇게 모자를 쓰고 코트를 입으니까 못 알아보겠는걸.”

준영을 알아본 학생들이 그에게 다가가 악수나 사인을 요청했다.

이미 그는 스타플레이어일 뿐만 아니라, 그레이트 맨체스터의 명사로 손꼽히고 있으니까.

“캡틴 리, 여긴 웬일이죠?”

“개인적인 일이 좀 있어서요. 오늘 이곳에서 유명한 분이 특별 강연을 하고 있다고 하던데요?”

“아, 보어 박사님 강연 말이군요. 그게 어디서 하냐면…….”

친절한 학생이 강연이 진행 중인 강당을 알려 주었다.

긴 의자들이 늘어선 강당을 찾아가니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준영과 같은 외부인들도 많이 찾아왔다.

‘리즈는 어디에… 아, 저기 있구나.’

두리번거리던 준영은 리즈를 찾아내고 냉큼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어머, 왔어요?”

“시간 있으면 한번 와 보라면서? 마침 훈련이 일찍 끝나서 말이야.”

리즈는 옆으로 살짝 옮겨 앉으며 준영에게 자리를 내어 줬다.

“일찍 잘 왔어요. 늦었으면 자리도 없었을 테니까.”

리즈의 말대로 이미 앉을 자리는 다 찼다. 좀 더 시간이 지나자 서 있을 만한 곳도 빽빽하게 늘어섰다.

“강연하는 분이 유명한 모양이구나.”

“닐스 보어라고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예요. 아인슈타인 박사가 살아 있을 때 그와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기도 했죠.”

“그러고 보니 들어 본 것 같기도 한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던 준영은 궁금한 표정으로 리즈를 바라보았다.

“근데 리즈는 컴퓨터 공학 쪽으로 공부한다면서 왜 이런 물리학 강연을 들으러 온 거야?”

“지난번에 준이 보여 준 영화를 보고 흥미가 생겨서요. 영화 설정이 잘 이해되지 않았거든요.”

“아, 그 영화…….”

첩보원인 주인공이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범죄 집단에 대항해 싸우는 내용이었다.

그 21세기 영화를 보고 리즈가 여러 가지 질문을 했지만, 준영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양자 역학이니 엔트로피니 하는 이론들은 축구 선수인 그가 이해, 섭렵하고 있기엔 너무나 난이도가 높은 지식이었으니까.

“더구나 미래엔 양자 컴퓨터라는 걸 개발하고 있다면서요? 그렇다면 관심을 둬야죠.”

리즈가 나지막하게 속삭인 말에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직 제대로 된 컴퓨터도 없는 시대인데 양자 컴퓨터까지 생각을 하다니.

나가도 너무 나간 게 아닌지?

“곧 강의가 시작됩니다, 모두 정숙해 주십시오.”

사회자의 말에 조용해진 청중은 막 강단으로 올라오는 늙은 학자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가 바로 코펜하겐 학파의 수장인 닐스 보어 박사였다.

청중에게 인사를 하고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한 보어 박사는 강연을 진행해 나갔다.

“양자 역학이란 일종의 수학적인 표현입니다. 미시세계의 실재와 인간의 상호 작용에 의한…….”

진지하게 듣는 청중들 사이로 준영과 같이 어색한 미소를 짓는 이들도 있었다.

‘뭐라고 하는지, 원…….’

훌륭하신 박사님이 최대한 쉽게 풀이해서, 여러 가지 예시를 두고 설명을 해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세상에 이런 이론이 있고, 이 시절부터 연구되었구나 라는 사실만 알게 되었을 뿐.

‘리즈는 이해가 되는 건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부지런히 필기를 하고 있는 리즈.

학구열을 불태우는 사랑스러운 연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준영은 한순간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왜 그래요, 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그게…….”

진짜 귀신을 봤다.

지금도 보이고 있었다.

리즈의 등 뒤로, 빽빽하게 늘어선 청중들 사이에 서 있는 루이스 대령의 모습이.

그는 말없이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준영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전혀 다른 풍경이 눈앞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

닐스 보어 박사는 맨체스터의 빅토리아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동양 철학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자신의 문장에 태극을 넣기도 했었죠.

한편 그의 동생인 하랄드 보어도 뛰어난 수학자였는데, 축구를 무척 잘해서 덴마크 국가대표로 뛴 적도 있고, 1908년 런던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기도 했답니다.

축구 선수로 그의 인기는 수학자로 명성을 얻었을 때보다 많았다고 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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