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65.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여, 오랜만이구만.”
환복을 하고 밖으로 나온 준영은 자신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하마터면 인상이 찌푸려질 뻔했지만, 웃음을 지으며 일단 인사를 건넸다.
“경무관님 아닙니까. 영국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자네가 먼 고국까지 찾아와 줬으니, 나도 찾아와서 응원을 해 줘야 답례가 아니겠나.”
경무대 경무관 곽영주.
일단 응원하러 온 건 사실인지, 그와 그의 수행원들은 목에 맨유의 응원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요즘 고전하고 있다더니 오늘은 그렇지도 않더군. 적진에서 화끈하게 대승을 거두다니 말이야.”
“예, 평소와 달리 잘 풀리더군요.”
“아무래도 내 응원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군. 하하핫!”
마치 자신의 덕이 아니겠냐는 듯이 으스대는 곽영주의 모습에 준영은 겉으론 미소를 지으며 속으론 머리를 굴렸다.
‘이 인간이 왜 왔지? 분명히 응원 말고 다른 목적이 있을 텐데……. 혹시 자기 돈을 딴 데 쓴다는 걸 눈치챘나?’
석유 개발로 꼬드겨 곽영주와 임화수에게 뜯어낸 자금.
준영은 그것을 전부 미래 재단의 장학금으로 활용했다.
만약 석유 투자를 위해 돈세탁을 한 게 아니고 진짜 장학금으로 썼다는 걸 알았다면…….
‘아냐. 그랬다면 응원은커녕 바로 멱살부터 잡았겠지. 그럼 혹시 돈 달라고 온 건가?’
안 그래도 이억관에게서 자유당 놈들이 선거 자금을 요구하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보복으로 감사까지 진행했다는 사실도.
‘혹시 그쪽에서 털 만한 게 없으니까 날 찔러 볼 수작으로 온 게 아닐까?’
곰곰이 생각하던 준영은 일단 곽영주와 그 일행을 가까운 카페로 데려갔다.
곽영주는 주변에 자신과 준영의 일행밖에 없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 북해의 석유 말인데…….”
“아, 예. 작년 말에 스코틀랜드 북부 연안에서 시추를 성공했습니다. 몇 가지 검토만 끝나면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할 겁니다.”
“그래, 나도 신문으로 봤어. 북해 중앙엔 더 좋은 유전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지?”
일단 유전 하나가 개발되어 다행.
덕분에 곽영주에게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있었다.
준영은 그가 다른 의심을 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로열 더치 쉘을 비롯해 현재 유전 개발에 협력 중인 업체들, 개발 계획과 주식과 지분 문제 등등.
물론 상세히 알려 주지도 않았고, 중요한 정보는 빼거나 거짓으로 둘러댔다.
이렇게 제법 그럴듯하게 말하니 곽영주도 만족한 기색이었다.
“아쉽구만. 시간이 많으면 그 해상 유전 플랜트라는 걸 보러 갔을 텐데.”
“그럼 바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준영은 반색하는 표정을 감추고, 아쉬운 기색으로 물었다.
“바로 가는 건 아니고, 처리하고 갈 일이 좀 있어.”
“무슨 일입니까? 혹시 선거 자금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준영의 물음에 곽영주는 은근히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도와준다면 좋긴 하겠는데…….”
“안 그래도 자유당 쪽 사람들이 저희 회사 한국 지부를 찾아왔었습니다.”
“뭐라고? 그런 일이 있었어?”
금시초문이라는 듯, 곽영주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제 출신이 어떻든, 일단 저희 회사는 형식상 외국계 업체 아닙니까. 그래서 선거 자금을 함부로 지원하는 건 곤란하다 싶어 거절했는데 갑자기 감사가…….”
“하… 이런 쌍놈들이!”
곽영주는 분통을 터트렸다.
이준영의 업체는 자신이 찍어 놓았는데, 자유당 내 다른 계파에서 이를 모르고 건드린 것 같았다.
아니, 알면서도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이기붕 일파는 지난번 충돌로 준영을 탐탁잖게 여기고 있으니까.
“하여간 일하는 꼬락서니들하곤……. 그 일에 대해선 정말 유감이군. 돌아가면 관련자들을 문책하도록 하지.”
“그럼 선거 자금은…….”
“쩝, 됐어. 석유 개발에나 신경 쓰라고.”
이준영에게 자금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자칫 경영을 어렵게 했다간 나중에 자신의 유전 개발 지분에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이리 판단한 곽영주는 선거 자금을 받아 내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이준영이 아니라도 뜯어낼 호구들은 많으니까.
더구나 이준영은 다른 중요한 일을 맡아 줘야 했다.
“그보다 한 가지만 도와줘.”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됩니까?”
“한국에 한번 와 줄 수 없나? 영국 대표팀, 아니 연합 축구단이라도 좋으니까 같이 와서 경기를 해 줬으면 해.”
“방한 경기를 해 달라고요?”
“그래, 요즘 국민들이 너무 정치 쪽으로 관심이 쏠려서 말이지.”
대선을 앞두고 있으니 정치에 관심이 많은 건 당연하다.
그런데 이걸 스포츠로 덮어 버린다?
잘될 것 같지도 않고, 국민들도 그 의도를 모를 만큼 어수룩하지 않다.
‘그러니 여기서 곽영주의 제안을 수락하게 되면 나는 레전드가 아니라 독재 정권의 하수인이 된다.’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잘 아는 준영은 오점이 남을 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이지만, 한번 묻은 오점을 씻기란 무척 어려우니까.
하지만 한국에 있는 지인들을 생각하면 딱 잘라 거절할 수 없었다.
“도와 드리고는 싶은데, 리그 후반기로 갈수록 일정이 빡빡해서요. 거기다 순위 경쟁도 심하고…….”
“안 된다는 건가?”
“힘들다는 겁니다. 저희 팀은 몰라도 전 잉글랜드 축구협회 쪽도 곤란해할 테니까요.”
곤란한 점을 떠나, 준영은 FA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총무인 스탠리 루스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임원과 기술위원들에게도 등한시되고 있었다.
이는 스웨덴 월드컵 이후로 한 번도 대표팀에 차출된 적이 없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언론에서는 이 점을 의아하게 여겼지만, FA에서는 ‘변화와 세대교체’라는 답변 말고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나중에 윈터보텀 감독이 맨체스터를 방문했을 때 이유를 들을 수 있었지. 순수 잉글랜드 선수들로 구성된 팀을 만들기 위해서라나.’
준영은 FA가 자신을 토사구팽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불쾌했다.
하지만 이미 월드컵도 들어 본 터라 잉글랜드 국대 자리에 미련이나 아쉬움이 크게 느껴지진 않았다.
“어떻게 안 될까? 꼭 정예 선수일 필요는 없어. 2군이라고 해도 상관은 없다고.”
곽영주는 어떻게든 경기만 성사되면 된다고 보았다.
어차피 한국 국민들은 영국 선수 누가 잘한다는 사실까지는 자세히 모르니까.
그냥 월드컵 우승 팀, 유럽 챔피언 클럽이 한국에 와서 경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관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일단… 저희 팀 코칭스태프에게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웸블리의 FA에도 연락할 테니 경무관님이 협상해 보십쇼.”
“그래, 수고 좀 해 줘.”
곽영주의 기대와 달리 준영은 그냥 건성으로 넘길 생각이었다.
자신의 출전에 대해서도, 부상을 입었다고 둘러대고 한국에 가지 않기로 했다.
다만 곽영주가 온 김에 한번 얘기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
“국민들 관심을 돌려야 할 정도로 현재 상황이 심각한 겁니까?”
준영의 물음에 곽영주는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조병옥 박사가 지병으로 별세한 건 자네도 들었겠지? 4년 전에는 당시 야당 대선 후보였던 신익희 선생도 전주로 유세하러 가던 중에 타계했어.”
“아, 그러면…….”
“호사가들 입장에서는 아주 좋은 건수일 수밖에 없지.”
신익희는 뇌일혈, 그리고 조병옥은 지병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그간 자유당이 워낙 막 나갔다 보니, 이들의 죽음에도 의혹을 보이는 이들이 많았다.
더군다나 조병옥 박사 별세 이전부터 부정 선거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게 왜 선거 자금 뜯으러 다니고 정치 깡패가 설치게 놔뒀냐고.’
준영이 내심 비웃음을 짓고 있을 때, 곽영주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야권에서는 어떻게든 정권을 바꿔야 한다고 야단법석이야. 그래서 부통령 선거에서는 승리하려 들고 있어.”
“경무관님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이기붕 선생이 부통령이 될 것 같습니까?”
“되겠지. 되려고 이리저리 노력하고 있으니까.”
노력이라 쓰고 선거 공작이라 읽을 수 있는 짓을 하고 있을 터.
곽영주도 그게 어떤 문제를 발생시킬지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이렇게 과열된 상황에서 자신이 원하는 후보가 당선되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지 몰라. 굳이 빨갱이들이 사주하지 않더라도 말이야.”
“만약에, 어디까지나 만약이지만, 시위가 일어난다면 어찌하실 겁니까?”
준영의 물음에 곽영주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히 폭도들을 진압해야지. 폼이나 잡으라고 경찰과 군인들에게 총을 준 건 아니니까.”
“…발포까지 할 수 있단 겁니까?”
“해야 한다면 해야지.”
곽영주는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결과를 잘 아는 준영으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한단 말인가.
“그랬다간 훗날 역사의 단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에 그러겠다는 거야. 나도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어. 그러니 지금 과열된 분위기를 식혀야지.”
의도는 알 만하지만, 그것은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하지 않을까.
‘이 작자가 나를 찾아온 것 자체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임을 증명하는 걸지도.’
덕분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 말 거라는 걸.
***
“그래서? 그 한국 대통령의 경호실장이란 사람이 그런 요청을 했다고?”
곽영주를 만나고 난 후.
준영은 버스비 감독을 만나 곽영주의 요청 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연하지만 예상대로 버스비 감독은 탐탁잖은 기색을 보였다.
“아무리 2군 선수들이라도 그런 정치놀음의 장기말이 되게 하긴 싫군. 더구나 가까운 유럽도 아니고 극동이라니…….”
고개를 내젓던 버스비는 이내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준영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내가 거절하면 자네가 불이익을 받는 게 아닌가? 한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게 있다면서?”
“그렇긴 합니다만, 저 때문에 나서지 않으셔도 됩니다. 솔직히 저도 축구가 권력자의 도구로 이용되는 건 싫으니까요.”
“그래도 그러면 곤란해질 텐데…….”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질질 끌어 봐야죠. 저쪽도 선거가 발등의 불이라서 지나치게 닦달하진 못할 겁니다.”
만약 곽영주가 강압적으로 나오면 이쪽에도 방법은 있다.
바로 그가 맡긴 석유 개발 자금에 대해서 언론에 공개하겠다며 받아치는 것.
‘일개 경무관이 그 정도 거금을 가졌을 리 없잖아. 분명 부정한 출처일걸.’
선거 기간에 대통령 최측근의 비리 건수가 터져서 좋을 게 없다.
물론 자유당이 부정 선거를 강행하면 그 이슈는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진 못한다.
다만 자유당 내부의 파벌 다툼에서 곽영주의 비리는 반대파에게 좋은 건수가 될 것이다.
즉, 선거 결과와 관계없이 곽영주는 숙청될 수도 있다.
‘하여간 몹쓸 시대라니까. 축구 선수가 이런 정치 다툼까지 신경 써야 하다니…….’
버스비와 대화를 마친 준영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오니 정말 뜻밖의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Mr. Kwak이라는 사람에게 연락이 왔네. 런던에서 FA 측과 이야기가 잘되었다고 하더군.”
“예?”
알버트가 전한 말에 준영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잘되었다니, 어떻게 잘될 수 있단 말인가?
“3월 초에 대표팀을 소집해서 한국에 보내기로 했다더군. 자네가 신경 써 준 것에 감사한다고 했어.”
신경 써 줄 만큼 해 준 것도 없다.
그냥 FA에는 한국의 대통령 비서실장이 찾아갈 거라는 연락을 해 줬을 뿐이다.
딱히 부탁도, 로비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FA가 곽영주의 요청을 수락했다니!
‘이 작자들, 대체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
옛날 축구 경기 목록을 보면 영국이랑 했다, 브라질이랑 했다는 것들이 알고 보니 대표팀 간의 경기가 아니라 상대국 클럽팀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위의 사진 자료는 1995년 코리아컵 국제 축구 대회 때인데, 저때 스코틀랜드 팀이 대표팀이 아니라 FC 킬마녹이라고 스코틀랜드 리그 클럽팀이었죠.
당연히 저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물론 지금은 저런 사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일반인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대충 검색만 해도 다 나오니까요.
다만 태국이나 동남아시아 국가에서는 여전히 사기를 치곤 합니다.
몇 년 전 태국 킹스컵에 우리나라 U-21 팀이 출전한 적이 있는데, 태국 현지에서는 그냥 한국 A대표팀인 것처럼 선전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