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63화 (263/400)

Round 263. 가속되는 운명

“매니저가 독일 투어 공연을 해 보지 않겠냐며 제안했어요.”

머뭇거리는 레논을 대신해 폴이 사정을 설명했다.

“독일? 혹시 함부르크야?”

“네, 맞아요. 근데 어떻게 알았어요?”

너희가 원래 역사에서 활동하던 동네.

물론 그리 말할 수 없었던 준영은 적당히 둘러댔다.

“저번에 잡지를 보니까 함부르크에서 요즘 록 음악이 한창 유행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맞아요. 매니저도 그렇다고 했어요. 거기다 옛날부터 음악의 도시라서 공연 활동도 자유롭대요.”

실제 함부르크는 브람스의 고향이자, 멘델스존과 바흐의 아들이 활동한 도시.

전후에 미국과 영국의 영향으로 록과 같은 현대 음악도 많이 퍼진 상태라고 했다.

“근데 이게 장기 투어가 될 것 같은데, 레논은 선수 활동도 계속하고 싶어서 어찌해야 할지 난감한가 봐요.”

함부르크 투어를 제안한 매니저나 현지 클럽에서는 그 기간 동안 함부르크의 축구팀에 임대 가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고.

실제로 함부르크에는 함부르크 SV와 FC 장크트 파울리라는 팀이 있었다.

“하지만 선수 이적이나 임대는 구단 허가가 있어야 하잖아요. 제가 그냥 2군이면 모르겠는데, 그런 것도 아니고…….”

레논은 난감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는 리그와 FA컵 경기에 종종 출전하고 있었다.

활약도 그리 나쁘지 않은 수준.

거기다 유럽 챔피언인 맨유에 워낙 쟁쟁한 선수들이 많다 보니 백업 선수라고 해서 저평가받지 않았다.

다른 팀에 가면 충분히 주전을 노릴 만한 기량이었던 것.

그렇다 보니 리버풀에 있는 친구나 지인들도 리버풀 FC로 돌아오라며 말하기도 했다.

“제가 축구를 아예 못했으면 이참에 관두고 홀가분하게 함부르크로 갔을 텐데……. 그런 것도 아니고, 맨체스터에서의 생활도 만족스러워서요.”

“구단에서 이적이나 임대를 허락해도 내키지 않는다 이거구나.”

“네, 근데 가수의 입장에선 이번 제안도 참 솔깃하단 말이죠.”

거기다 밴드의 다른 멤버들은 함부르크 투어에 긍정적이었다.

외국 구경도 하고, 해외에서 이름도 날릴 수 있는 기회이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하기도 그렇고, 저렇게 결정을 내리기도 그러니까 나에게 의견을 물으러 왔다?”

“네, 마침 프랑스에서 돌아온다고 구단에서 알려 줘서 찾아왔어요.”

“흠…….”

준영은 곧바로 답을 주지 못했다.

실제 역사에서 비틀즈는 함부르크에서 약 2년간 많은 공연을 하면서 실력을 쌓았다.

하지만 이 당시 활동은 거의 혹사 수준.

그렇다 보니 멤버들 다수가 약물에 빠지게 되고, 진로 문제 때문에 방황하던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도 요절하고 말았다.

‘거기다 노예 계약으로 부려 먹던 클럽 측에서는 비틀즈가 다른 클럽으로 옮기려 하니, 조지 해리슨이 미성년자라고 고발해 버렸지.’

이에 앙심을 품은 비틀즈 멤버들은 클럽에 방화 범죄까지 저질렀다.

이리저리 흑역사를 써 버린 것이다.

“나라면 함부르크 투어를 추천하지 않겠어. 외국 생활이란 게 너희가 생각하는 것만큼 낭만적이지 않아.”

“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조지 해리슨의 요청에 준영은 자신이나 미래의 대표팀 친구들이 겪은 일들을 가공해서 얘기해 주었다.

“국내에 있으면 너희는 유망주로 어른들의 보살핌과 지원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어. 하지만 외국에서는 그렇지 않아. 그냥 일개 용병이나 일꾼에 불과하지.”

어린 나이에 성급하게 해외 진출을 했다 낭패를 본 선수들이 많다.

물론 준영 본인처럼 성공한 사례도 있지만, 이는 매우 드문 경우였다.

그 성공도 보육원의 동생들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실패해선 안 된다고,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스스로 수없이 채찍질한 결과였다.

“그리고 내가 너희들 형이라고 가정을 하고 얘기하자면…….”

“가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주장은 제 형님이 맞으니까요.”

“그래, 레논. 그렇게 생각해 주니 기쁘구나. 아무튼 그래서 난 그 매니저나 그 사람과 연결된 클럽이 신뢰가 안 가. 너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네 잇속만 차릴 것 같으니까.”

21세기에도 노예 계약으로 어린 아이돌 가수들을 부려 먹는 소속사나 매니저들이 많다.

하물며 미래보다 여러모로 인권 개념이 부족한 1960년 현재는 말할 필요도 없을 터.

“확실히 계약서를 보니 공연 일정이 좀 빡빡하긴 했어요. 처음 봤을 땐 연주할 기회가 많다고만 생각했는데, 주장 말을 듣고 보니…….”

“혹시 벌써 사인한 건 아니겠지?”

“예, 일단 생각해 보고 결정하기로 한 거니까요.”

“잘했다.”

준영은 이참에 비틀즈 멤버들의 활동에 도움이 되도록 법률 대리인을 붙여 주기로 마음먹었다.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대처는 변호사 일을 그만뒀지만, 그녀가 일했던 사무소는 여전히 준영과 계약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요청해 보기로 했다.

“오늘 오지 않은 친구들에게도 잘 설명해 줘. 지금은 성급하게 둥지를 박차고 나갈 때가 아니라 날개깃을 더 키워야 한다고.”

“알겠습니다. 근데 그래도 좀 아쉽네요.”

“걱정 마. 나중에 더 좋은 기회가 올 테니까.”

훗날 이들의 매니저가 되는 브라이언 앱스타인이나 프로듀서 조지 마틴을 미리 연결시켜 줘 볼까?

하지만 준영은 이런 생각을 곧바로 접었다.

성급하게 진행하기보다 역량과 인지도를 더 갖춘 후에 진행하는 게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래서 일단 잘 다독여서 레논 일행을 돌려보냈다.

***

리버풀 대성당 북쪽의 그레이트 샬롯 스트리트.

‘NEMS’라는 간판을 건 음반 가게로 많은 젊은이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혹시 Stand up이 든 음반 있어요?”

“Stand up? 누구 노래죠?”

“쿼리멘이요. 아, 이번에 실버 비틀즈로 이름을 바꿨다든가, 독립을 했다든가…….”

찾아오는 손님들 상당수가 쿼리멘, 아니 실버 비틀즈의 ‘Stand up’이라는 노래를 찾았다.

사장인 브라이언 앱스타인은 이런 손님들의 요청에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밴드 쪽으로 잘 아는 직원들을 불러다 물어보았다.

“쿼리멘인지 실버 비틀즈인지 하는 녀석들이 대체 누구야?”

“꽤 잘나가는 스키플 밴드입니다. 로큰롤뿐만 아니라 색다른 풍의 장르까지 노래하고 있어서 젊은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죠.”

그래서 지난해에 그들의 노래가 음반으로 발매되었다고.

하지만 문제의 ‘Stand up’이란 곡은 아직 발매되지 않았다고 한다.

“공연 때는 부르고 있고?”

“예, 음반으로 안 나온 게 자신들 곡이 아니라서 그렇답니다. 잘 아는 형님이 고향 사람들에게 보내는 노래를 부를 때 연주를 거들었을 뿐이라고…….”

대중이 음반을 찾고 있는 걸 보면, 충분히 가치가 있는 곡임은 분명하다.

얼마나 좋은 곡인지 궁금했던 앱스타인은 그 노래를 녹음했던 음반사를 수소문해서 찾아갔다.

“Stand up이요? 쿼리멘 녀석들이랑 캡틴 리가 같이 부른 곡 아닙니까.”

“캡틴 리? 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맞아요. 가창력이나 기타 연주 실력도 괜찮다고 트래퍼드 인근에 소문이 자자하죠.”

설마 그 유명 인사가 부른 노래일 줄이야.

앱스타인은 혹시 그때 녹음한 음반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때 작업한 음반은 Korea로 보냈는데… 아, 운송 중 파손을 대비해서 복사해 둔 게 있어요.”

음반사 관계자가 창고에서 복제 LP판을 찾아와서는 턴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잠시 후 재생되는 노래에 앱스타인은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미국의 포크송이랑 비슷한 느낌의 밝고 희망찬 리듬에 절로 고개와 다리가 들썩였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으니 아쉽군.’

그러나 캡틴 리의 한국어 노래가 끝난 후, 쿼리멘이 같은 곡을 영어로 부른 게 뒤이어 재생되었다.

「Stand up, Stand up. We’re going to try again once more~」

“오오, 대단한데!”

노래도 굉장히 좋지만, 가사의 내용을 감성으로 잘 살리는 쿼리멘의 연주 실력이나 보컬의 가창력도 매우 훌륭했다.

‘이 녀석들, 생각 이상으로 거물이잖아!’

왜 이런 녀석들을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밀려오는 아쉬움과 후회감에 앱스타인은 곧장 쿼리멘의 다른 노래들도 찾아 들어 보았다.

“굉장해. 좀 더 다듬기만 하면 굉장한 스타가 될지도…….”

앱스타인은 곧장 음반사를 통해 쿼리멘 멤버들의 주소와 연락처를 알아냈다.

미래에서 온 사람도 모르게, 세계를 흔든 스타 뮤지션들의 운명은 가속화되고 있었다.

***

벅스턴의 팰리스 호텔.

재작년 연말에 이곳을 찾았던 준영은 오랜만에 다시 방문했다.

“여기가 온천 호텔이라고요?”

“와! 으리으리하네요!”

그때는 리즈와 단둘이었지만, 이번에는 절친한 동료들, 그리고 그들의 부인과 애인이 동행했다.

그리고 그때와 다른 점이 또 하나 있었다.

“리버풀과 승점 차이가 계속 벌어지는데 이래도 되나 모르겠어요.”

2월 중순, 리그가 29라운드까지 진행된 상황에서 리버풀은 여전히 1위였다.

놀랍게도 그동안 그들은 단 한 번밖에 패하지 않았다.

1월 초 맨체스터 시티와의 경기였는데, 버트 트라우트만이 그야말로 미친 선방을 선보이며 펠레와 로저 헌트의 득점 행진을 막아 냈다.

하지만 그 밖의 다른 팀들은 패하거나 무를 맛봤다.

그렇게 리버풀이 쾌속 순항을 하는 가운데, 2위로 그들을 추격 중인 맨유는 13일 경기에서 무 재배를 하고 말았다.

9위 프레스턴 노스 엔드와의 경기였는데, 전반 5분 만에 데니스 바이올렛의 선제골로 앞서갔지만, 후반 70분 톰 피니에게 뼈아픈 동점 골을 맞았다.

“진짜 다들 짜고 치는 것 같다니까! 우리랑 할 땐 기를 쓰고 밀집 수비를 하는 놈들이 리버풀이랑 할 땐 안 그래.”

“내 말이! 진짜 진심으로 우리 발목을 잡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더라.”

평소 으르렁대던 알렉스 퍼거슨과 데니스 로가 이때만큼은 사이좋게 다른 팀들을 씹어 댔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던 던컨이 말했다.

“그렇게 견제받을 정도로 우리 팀이 대단하다는 거지. 안 그래, 존?”

“맞는 말이야. 최강자는 선망과 동시에 질투를 사기 마련이니까.”

아무래도 올해 리그 우승은 리버풀이 유력해 보였다.

그러니 FA컵과 유러피언 컵, 인터콘티넨털 컵을 노리는 데 집중해야 할 것 같았다.

“아무튼 쉴 때 쉬면서 기력을 충전해 두자고.”

“그래야지. 더불어 마님께 봉사를 하면서 말이지.”

온천은 부상과 피로 회복에 좋고, 미용에도 탁월하다.

그렇다 보니 선수들과 그들의 연인들은 드넓은 온천 탕에서 만족스러운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온천수가 탈모에도 좋을까?”

갑작스러운 던컨의 말에 준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탈모는 왜? 던, 너 혹시 머리 빠지고 있냐?”

“아니, 나 말고 바비가. 요즘 매일 한 움큼씩 빠진다고 울상이더라.”

“아…….”

이미 현역 시절부터 탈모가 진행된 바비 찰튼 경.

그의 비극적인(?) 운명을 알고 있는 준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바비 녀석이 그러니까 나도 겁이 좀 나더라. 존, 혹시 탈모를 방지할 수 있는 동양의 비술 같은 거 없어?”

“그런 거 없어.”

“거참…….”

미래에도 해결되지 못한 난제.

준영도 걱정이 되어 머리를 매만지고 있을 때였다.

“존 Y. 리 씨! 존 Y. 리 씨 계십니까?”

호텔 종업원이 온천 탕에 나타나 준영을 찾았다.

바로 탕 밖으로 나온 준영이 그에게 다가갔다.

“전데요. 무슨 일입니까?”

“존 Y. 리 씨를 찾는 분이 계십니다. 바쁘지 않으면 꼭 좀 만나고 싶어 합니다만?”

‘날 찾아서 여기까지 왔다고?’

대체 누굴까.

축구나 사업 쪽으로 관련된 사람일까, 아니면 MI6의 번즈 요원과 관련 있는 사람일까.

일단 누군지 보자는 생각에 준영은 대강 옷을 걸치고 방문객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본문에 언급되었던 스튜어트 서트클리프입니다.

비틀즈라는 이름을 지은 사람인데, 정작 본인은 밴드가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전에 탈퇴했죠.

하지만 그 뒤에도 자주 왕래하며 앨범 표지도 만들어 주고 그랬답니다.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사망했다는데 그게 사고인지, 각성제 부작용 때문인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진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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