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62. 투혼을 불태우는 이들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다리 근육은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거칠게 숨을 내쉴 때마다 심장은 터질 것처럼 벌렁거렸다.
하지만 가장 쓰리고 아픈 것은 마음.
전반전 역전은 그렇다 치더라도, 삽시간에 벌어진 점수 차는 전의를 완전히 무너트렸다.
‘이렇게 될 것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상대는 유럽 챔피언.
국가대표팀이라 해도 축구 변방인 아시아 수준으로 비벼 보기엔 벅찬 상대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점수 차가 나는 건 당연하다.
그러니까 참패를 하더라도 누구도 나무라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대- 한민국!”
쉬지 않고 울려 퍼지는 응원 함성이 무너진 한국 선수들의 전의를 되살렸다.
“자자, 다들 힘내 보자!”
“기죽지 말고! 기왕 시작한 거 마무리는 지어야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자고!”
함흥철과 최정민을 비롯한 고참 선수들이 박수 치며 후배들을 독려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브라이언 클러프가 바라보고 있었다.
“바보 녀석들이군. 이제 와서 힘내 봤자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데.”
“이봐, 브라이언. 그렇게 매정하게 말할 필요는 없잖나.”
숀이 나무라자, 브라이언은 대꾸하지 않고 공을 가진 한국 선수에게 달려들었다.
황급히 동료를 이용해서 전방으로 패스를 보냈지만, 이 공격은 준영이 무정하게 끊어 버렸다.
그리고 직접 한국 진영으로 드리블해 나갔다.
“막아! 파울을 해서라도 저지해!”
“더는 실점하면 안 돼!”
남은 힘을 짜낸 한국 선수들은 사력을 다해 준영을 저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몸싸움에서는 튕겨 나가고, 홀딩 파울로 저지하려는 시도조차 공이 그의 발에서 떠나면서 무산.
날카롭게 들어간 준영의 스루패스를 받은 브라이언이 가차 없이 한국 골대를 향해 슈팅을 날렸다.
함흥철이 쳐 내려 했지만, 강하게 날아든 슛은 펀칭에도 불구하고 골라인을 넘어가 버렸다.
“아… 6 대 1이다.”
“클러프 저 자식, 인정사정없구만.”
경기를 보는 기자와 스카우터들은 혀를 찼다.
같이 뛰는 동료 선수들도 눈총을 줄 정도였지만, 브라이언은 낯빛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실점한 한국 선수들도 마찬가지.
점수가 더 벌어지면서 겨우 피워 올린 전의도 맥없이 빠질 만한데, 냉큼 공을 센터 스폿에 가져다 두고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이놈들, 진짜 바보들이야.”
브라이언이 보기에 이 한국 국가대표라는 놈들은 체력도 부족하고, 실력도 못 미쳤다.
그런데도 포기할 줄 모르고 계속 덤벼들고 있었다.
“그래도 근성은 맘에 들어.”
전에 자신이 몸담았던, 미들즈브러의 얼간이들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실력은 몰라도 마음가짐은 국가대표가 분명했다.
“측면으로 들어온다!”
“크로스 못 올리게 막아!”
정순천이 공을 몰고 들어오자 레이 윌슨이 바로 따라붙었다.
이에 정순천은 공을 앞쪽으로 차고 스피드로 레이 윌슨을 따돌리려 했다.
‘하지만 너무 강하게 찼군.’
레이는 공이 그대로 라인 밖으로 나갈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정순천은 포기하지 않고 쫓아가 공을 살려 냈다!
“어? 나간 거 아냐?”
“완전히 나가진 않은 모양이야.”
“뭐 하고 있어? 빨리 막아!”
레이 윌슨이 황급히 달려든 순간, 정순천이 크로스를 올렸다.
거의 슈팅급으로 낮고 빠르게 들어온 크로스는 최정민과 준영의 발을 차례로 스치고 반대편 조윤옥의 앞으로 떨어졌다.
“쏴라, 윤옥아!”
최정민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조윤옥의 발에서 공이 떠났다.
대표팀 모두의 바람과 결의가 실린 슛은 골대 상단 구석에 세차게 박혔다.
“들어갔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지르던 교포들은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후반 40분에 나온 추격 골.
누가 봐도 경기의 승패에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맥없이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기에는 충분했다.
“좋은 선수들이군요.”
가만히 경기를 지켜보던 버스비 감독의 말에 김용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특한 후배들이지요.”
“저 투지를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다면, 한국 팀도 계속 발전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챔피언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도전해야 한다.
물론 그 도전의 대가가 무참한 패배로 끝날 때도 있지만, 패배의 아픔에서 배운 점들은 발전의 토대가 된다.
그렇기에 용감하게 도전할 수 있는 투지를 잃지 않는 게 중요했다.
삐익- 삑!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최종 스코어는 6 대 2.
참패로 끝난 게 서글프긴 했지만, 최정민은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스위스 월드컵 이후로 다시 고대했던 유럽 강팀과의 경기.
챔피언을 상대로 골을 넣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다 쏟아부어 보았으니까.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준영이 다가와서 건넨 말에 최정민은 그와 악수를 나누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무리한 부탁 들어줘서 정말 고맙다. 진짜 화끈한 풀코스였어.”
“죄송합니다. 연습 경기라도 승부는 승부라서…….”
“알아. 사과할 필요 없어.”
손사래를 친 최정민은 맨유 선수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후배들을 보며 준영에게 물었다.
“네가 보기에 어떤 것 같아?”
“어떤 거라뇨? 대표팀 전력이요?”
“아니, 미래 말이다. 앞으로 다시 월드컵에 나갈 수 있을 것 같냐?”
이 물음에 준영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다시 나가서 첫 골도 넣고, 승점도 따고… 월드컵 4강도 갈 겁니다. 월드컵 챔피언도 조 예선에서 탈락시키고요.”
“하하하, 아우님, 농담도 심하구만. 그건 꿈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잖아.”
“꿈은 이루어집니다, 형님. 포기하지 않는다면요.”
준영의 진지한 눈빛에 최정민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진짜 이뤄졌으면 좋겠다.”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거기다 목표는 하늘에 걸린 별처럼 까마득해 보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도달할 것이다.
내가 아니면 후배가, 그렇지 않으면 제자들이.
뜻을 이어받아 투혼을 불태우는 이들이 있다면 언젠가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
‘어쩌면 원래 역사보다 더 일찍 이루어질지도…….’
준영은 기대와 희망을 품고 미지의 미래를 향해 나갔다.
자신의 곁에 있는 모두와 다 함께.
***
연습 경기를 끝마친 다음 날.
한국 대표팀 선수들은 고국으로 돌아갔고, 맨유 선수단도 유러피언 컵 8강 1차전을 치르기 위해 프랑스 남부로 떠났다.
8강 상대는 OGC 니스.
21세기에도 리그앙 중상위권에 있는 이 팀은 터키 페네르바흐체 SK와 재시합까지 치르는 혈투 끝에 8강에 올랐다.
“절대 방심하지 마! 니스(Nice)는 너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좋은(Nice) 팀이니까.”
머피 코치의 썰렁한 아재 개그에 준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 미소는 경기가 시작된 후에 깡그리 지워지고 말았다.
‘이놈들, 센데?’
체격적인 면에서도 맨유에 크게 뒤지지 않았고, 미드필더 장 피에르 알바와 프랑수아 밀라초의 패스 전개 능력도 상당했다.
거기다 용병 선수들의 기량도 훌륭한 데다, 홈팬들의 열광적인 응원도 있었다.
이에 힘입은 니스는 지난 시즌 챔피언을 상대로 대등한 난타전을 벌였다.
“코치님 말이 맞았네요.”
“그래도 이기는 건 우리라고!”
난타전 와중에 선제골을 넣은 것은 맨유.
과감하게 오버래핑을 한 던컨이 기가 막힌 중거리 슛으로 니스의 골망을 흔들었다.
기선 제압에 성공한 맨유는 15분 후 바비 찰튼의 어시스트를 받은 데니스 바이올렛의 골을 더하며 전반전을 2 대 0으로 끝냈다.
하지만 후반전 분위기는 딴판.
전반전에는 숨죽이고 있던 2명의 공격수가 니스의 반격을 주도했다.
아프리카 말리 출신의 케이타 오마르 바로우, 그리고 룩셈부르크에서 온 빅토르 누렌버그.
185센티미터의 장신 바로우는 아프리카 특유의 탄력과 유연성으로 맨유 수비수들은 물론 준영까지 진땀을 쏟게 만들었다.
탄력이 어찌나 좋은지, 키가 큰 준영보다 더 높이 점프할 정도였다.
“맙소사, 풋볼 리그 흑인 선수들하고 완전 딴판이잖아!”
“걔들이야 대개 자메이카나 카리브 쪽에서 왔으니까…….”
진짜 아프리카 축구를 경험한 맨유 수비수들이 당황하는 사이, 빅토르 누렌버그가 날카롭게 득점 찬스를 낚아챘다.
바로우가 만들어 준 빈틈으로 파고든 빅토르는 빠르고 간결한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추격 골, 동점 골을 터트렸다.
그러다 후반 27분에 알바의 패스를 받아 기어코 역전 골까지 터트리며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와, 뭐 저런 게 다 있냐?”
“룩셈부르크에도 저런 선수가 있구나.”
“근데 룩셈부르크가 어디에 있는 나라야?”
니스의 대역전에 얼얼한 기분을 느끼던 맨유 선수들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반격을 시작했다.
‘우린 챔피언이다. 여기서 맥없이 질 수 없어!’
‘아직 끝나지 않았어. 매운맛을 보여 주지!’
포기하기엔 경기 시간도 꽤 남았고, 점수 차이도 단 1점.
동점, 아니 역전도 충분히 노려 볼 수 있었다.
‘기회는 반드시 올 테니까!’
하지만 승리에 대한 염원은 니스 역시 강했다.
후반전 말미로 가자 그들은 서서히 라인을 내리며 밀집 수비에 나섰다.
그러나 그렇게 수비에 치중한 덕분에 준영도 마음껏 공격에 가세할 수 있었다.
“존, 때려 박아 넣어!”
“맡겨만 둬!”
던컨이 올린 크로스를 향해 준영이 뛰어올랐다.
힘차게 내리찍은 그의 헤딩슛은 공뿐만 아니라 마크를 시도한 니스의 공격수 바로우와 골키퍼 조르주 라미아까지 골대로 밀어 넣었다.
그 무지막지한 광경에 니스 선수들과 팬들은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맨유 선수들은 그들과는 다르게 함박 미소를 지었다.
“하하핫, 믿고 있었다고!”
“역시 우리 주장은 최강이야!”
유럽 챔피언을 이끄는 최강의 수비수.
포기할 줄 모르는 투혼을 품고 있는 그는 또 한 번 팀을 위기에서 구해 냈다.
***
“어서 와요. 힘들었죠?”
“응, 고생 좀 했어. 상대가 생각보다 세더라고.”
8강 1차전을 3 대 3 무승부로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준영은 리즈와 재회의 키스를 나누었다.
이대로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하필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바로 같은 팀원이자, 쿼리멘의 보컬인 존 레논이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주장. 지중해 풍경은 어떻던가요?”
“인마, 풍경 감상할 틈이 어딨냐. 리그 일정 때문에 부랴부랴 돌아오느라 바빴다고.”
“리그 정도는 저나 남은 동료들에게 맡겨도 될 텐데…….”
“그러기엔 맨시티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잖아.”
잠시 레논과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또 다른 손님들이 준영의 눈에 들어왔다.
폴 매카트니와 조지 해리슨.
앤지, 카린과 함께 젠가를 하며 놀고 있던 그들은 준영과 눈길이 마주치자 바로 인사를 건넸다.
“웬일로 다 같이 찾아왔냐? 그냥 놀러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예, 그게… 좀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상의?”
궁금해하던 준영은 최근에 레논이 고민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추측해 봤다.
‘요즘 쿼리멘 멤버들이 자주 교체돼서 아예 새로운 밴드 결성을 생각하고 있다던가?’
이는 쿼리멘의 열성 팬인 앤지가 알려 준 정보였다.
실제 역사에서도 이쯤이 비틀즈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때였다.
“혹시 새로운 밴드 이름 때문에 고민하는 거냐? 내가 좋은 이름을 알고 있는데, 추천해 줘?”
“아뇨. 밴드 이름은 정했어요. 팀원들도 꾸렸고요. 다만…….”
레논은 쉽게 말을 내뱉지 못했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곤란한 문제를 겪고 있는 것 같았다.
***
빅토르 누렌버그는 알려지지 않은 선수이고, 국적 또한 유럽 축구계에서 쩌리(…) 취급받는 룩셈부르크입니다.
니스에서 뛰던 1959-60 시즌에 당대 유럽 최강인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에 3 대 2 역전승을 안겨 줬습니다.
유러피언 컵에서 레알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한 게 이 사람이 최초였지요.
웬만한 축구 강국 선수들도 못한 일을 해냈다 보니, 별세하기 2년 전인 2008년에는 룩셈부르크 대공국 공로 훈장과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