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61화 (261/400)

Round 261. 잊힌 승부

맨체스터의 브리타니아 호텔.

제이크 김은 호텔 방에서 카린 여사가 집필한 SF 소설 ‘The Future Soldier’를 보고 있었다.

‘이게 여사가 고교 시절에 쓴 데뷔작이라 했던가.’

소설의 배경은 빅토리아 시대 말기.

주인공 레너드와 그의 부인은 이상한 암살자들로부터 계속 습격당하며 쫓기고 있었다.

그때 이마에 큰 흉터가 있는 한 남자가 나타나 그를 지켜 주었다.

알고 보니 암살자들은 미래에서 온 나치의 추종자들.

그리고 레너드는 장차 그 나치에 대항해 싸워 이기는 지도자가 될 운명의 사나이였다.

전사 데릭은 미래의 군인으로 레너드 부부를 지키는 임무를 받고 과거로 왔다.

데릭은 최후에 자신을 희생하며 두 사람을 지켰고, 살아남은 레너드는 나치에 승리하는 역사를 지켜 냈다.

“주인공이 누굴 모델로 했는지 너무 뻔하군.”

에필로그에 한 가지 반전이 있었다.

훗날 레너드의 손자가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며 머리를 다친 것.

어린 손자의 이마에 난 상처를 보고 레너드 부부는 데릭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제법 히트를 쳤군.”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출간이 되었다고.

그리고 1980년대 미국의 유명 영화감독은 이 소설에 암살 로봇이 나오는 자신의 악몽을 섞어서 각색, 전설적인 블록버스터 시리즈 SF 영화를 만들어 냈다.

“미래에서 온 자가 역사의 변동을 막아 낸다……. 만약 그렇지 않고 역사 변동을 이뤄 냈다면?”

책을 덮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제이크 김.

그는 스마트폰이 울리는 소리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누가 연락을 했나 봤더니, 지난번 다큐멘터리 제작 건으로 만났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직원이었다.

(제이크, 아직 맨체스터에 있죠?)

“그래요. 한잠 자고 내일 아침 첫 기차를 타려고…….”

(잘됐네요. 지금 올드 트래퍼드로 와 줄 수 있어요? 창고 구석에서 희귀 영상 필름을 발견했어요.)

“희귀 영상?”

(1960년 2월 초에 연습 경기 장면이 찍힌 무비 필름이에요. 상대가 당시 한국 대표팀이더군요.)

“그래요? 곧 가죠.”

당시에 한국 대표팀이 맨유와 경기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 희귀 자료를 놓칠 수 없었던 제이크는 황급히 옷을 걸치고 올드 트래퍼드로 향했다.

***

“대- 한민국!”

“힘내라, 태극 전사들!”

1960년 2월 1일 저녁.

며칠 전 리즈 로드에서 들린 것과 같은 함성과 박수 소리가 올드 트래퍼드에도 울려 퍼졌다.

하지만 교민들의 함성은 그때보다 더 다급했다.

“조심해. 던컨이 치고 올라온다고!”

“막아, 얼른 막아!”

오늘 연습 경기에 맨유의 주전 멤버들이 모두 기용되었다.

사흘 후에 있는 유러피언 컵 8강 경기에 대비할 목적이라고 하지만, 과연 한국 대표팀이 그럴 만한 상대인지는 의문이었다.

하부 리그 팀들과의 시합도 박빙이었다고 할 정도로 전력은 뛰어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끈질긴 구석은 있군.’

‘헝가리 감독도 용감하다고 칭찬해 줬다더니만…….’

맨유는 시작부터 경기를 주도했지만, 전반 30분이 될 때까지 득점에 성공하지 못했다.

한국 대표팀의 끈덕진 수비 때문이었다.

거기다 공격 시에는 최정민과 조윤옥이 빠른 발을 활용하여 맨유 진영으로 치고 들어오곤 했다.

필드 밖에서 경기를 보고 있던 브라이언 클러프는 흥미로운 기색을 보였다.

“꽤 서툴긴 한데, 그래도 과감한 구석이 있군.”

“골키퍼가 잘하는 것 같아요.”

알렉스 퍼거슨의 말에 브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골키퍼가 잘하면 힘이 나니까. 거기다 저 함이라는 골키퍼는 발재간도 제법 좋군.”

방금 전 함흥철은 페널티 박스 밖으로 나와 공을 멀리 찼다.

차태성의 마크를 뿌리친 알버트 스캔론이 무섭게 치고 들어오자, 과감히 달려 나가 공을 가로챘던 것.

“역시 흥철 선배야!”

“흥철이가 아니었으면 벌써 골을 먹고도 남았지.”

수비가 서너 차례 뚫린 상황이 있었음에도 함흥철은 과감한 선방으로 이를 막아 냈다.

심지어 던컨의 무회전 중거리 슛을 막아 내기도 했다.

동료나 관중들 입장에서는 감탄할 만한 활약이었지만, 함흥철 본인은 내심 죽을 지경이었다.

‘으, 홍덕영 선배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 것 같군.’

월드컵에서 헝가리를 상대로 분투했던 홍덕영.

유럽 챔피언 클럽 주전 공격수들의 슈팅을 정신없이 막다 보니 당시에 그의 심정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연합 축구단 놈들은 몇 번이나 득점 기회가 날아갔는데도 동요하지도 않네.’

함흥철의 선방에 맨유 공격수들은 그냥 아쉬움만 토로할 뿐이었다.

단지 연습 경기라서 그럴까?

아니면 언제든지 골을 넣을 자신이 있어서 여유를 부리는 걸까?

‘쳇, 정민아, 이놈들 표정 좀 달라지게 해 봐라.’

크로스로 날아오는 공을 잡아챈 함흥철은 달려가는 최정민을 향해 길게 공을 찼다.

최정민이 그 공을 가슴으로 받아 내기 무섭게, 바비 찰튼이 그를 마크하고 나섰다.

아주 집요한 바비의 수비에 최정민은 공을 뒤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후, 유럽 최고 선수로 뽑혔다더니 진짜 장난이 아니군.’

발롱도르를 받았다는 젊은 선수.

맨유에는 그 상을 받은 선수가 또 한 명 있었다. 바로 지금 오른쪽 풀백을 맡은 던컨 에드워즈였다.

‘너무 견고해. 미드필드 지역을 지나는 것도 힘들 정도이니…….’

현재 맨유 미드필드는 바비 찰튼과 로니 코프가 맡고 있었다.

양쪽 측면도 윙어인 알버트 스캔론과 워렌 브래들리가 수비 가담을 잘하고 있어 만만치 않았다.

그나마 그들을 뿌리치고 들어가면 기다리고 있는 게 던컨 에드워즈과 이준영, 빌 포크스, 레이 윌슨으로 구성된 철벽 수비.

거기다 그 뒤에는 월드컵 올스타로 뽑힌 수문장 해리 그렉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난감 그 자체.

하지만 이런 상황인데도 최정민의 입가엔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 화려한 풀코스야. 준영 아우에게 감사해야겠어.”

성의를 생각해서 제대로 즐겨 보도록 하자!

그리 마음먹은 최정민은 조윤옥이 측면으로 공을 몰고 가는 모습을 보고 중앙으로 달려갔다.

“조, 이 형님을 이기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으으으…….”

조윤옥은 던컨이 마크를 붙자 진땀을 뻘뻘 흘렸다.

던컨은 준영과 절친한 사이이다 보니 윤옥도 그와 간혹 만나서 한 수 지도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던컨의 실력 역시 잘 알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돌파하지 않으면……!’

‘과감하게 달려들겠다? 좋아, 어디 덤벼 보라고.’

이리저리 페인팅을 시도하던 윤옥은 던컨의 다리 사이로 공을 통과시키고 빠져나가려 했다.

“어림도 없다고.”

던컨은 슬쩍 발뒤꿈치로 방향을 바꿔 로니 코프에게로 공을 보냈다.

하지만 로니 코프의 뒤쪽에는 미드필더 김찬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싹 붙어 공을 빼앗은 김찬기는 곧바로 최정민에게 패스.

빌 포크스의 태클을 피해 낸 최정민은 준영이 달려들기 직전 골대 구석을 노리며 슛을 날렸다.

‘한 박자, 아니 반 박자 더 빠르게!’

최정민이 찬 슈팅은 한 차례 바운드가 되면서 그대로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골인!”

“우와, 정민이 형!”

예상치 못한 한국 대표팀의 선제골.

한국 선수들이나 관중석의 교민들은 만세를 부르며 저마다 얼싸안았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외치는 함성은 더욱 커졌다.

“하하핫! 잘했다, 정민아!”

멀리서 지켜보던 함흥철도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좋아했다.

그가 기대했던 대로 맨유 공격수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하지만 그때부터 시련이 시작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

“거참, 설마 했는데 선제골을 내주다니…….”

킥오프를 준비하던 맨유 공격수들은 방금 전 실점이 어이없던지 연방 고개를 내저었다.

“주장이 봐준 거 아니에요? 고국에서 왔다고 말이죠.”

“봐주고 말고 할 틈도 없었잖아. 아무튼 정신 바짝 차리고 경기하자고. 저 잘난 척쟁이에게 비웃음당하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데니스 바이올렛이 턱짓으로 가리킨 쪽에는 브라이언 클러프가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본 공격수들은 전의를 피워 올렸다.

삑-!

심판의 휘슬과 동시에 맨유 선수들은 재빨리 패스를 주고받으며 한국 진영으로 파고들었다.

좌우 중앙으로 빠르게 공을 돌리며 한국 수비진을 흩트려 놓다가 바로 왼쪽 측면으로 들어가는 워렌 브래들리에게 패스를 보냈다.

코너 플래그 부근에서 수비수 한 명을 따돌린 워렌은 중앙으로 쇄도하는 동료를 보며 컷백을 시도했다.

함흥철과 한국 수비수들이 데니스 바이올렛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사이, 데니스 로가 송곳처럼 치고 들어와 논스톱 슈팅을 날렸다.

포스트 바 하단을 맞힌 슛은 골대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우와, 바로 동점 골을 넣어 버리네.”

“지금까지 봐주고 있었나?”

관중들의 생각과 달리 맨유 쪽에서 딱히 봐주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선제골을 넣고 들뜬 한국 선수들의 틈을 파고들었을 뿐.

그렇게 벌어진 틈새는 동점 골을 허용한 후에도 메워지지 않았다.

“야, 인마들아! 정신 차려! 우리 이기고 있는 거 아니야!”

동점 골 이후 맨유의 공격이 더욱 거세지자, 함흥철은 수비수들에게 호통을 쳤다.

하지만 수비수들이 정신 차린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전반 종료를 앞두고 맨유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으니까.

심지어 좌우 풀백이나 센터백인 이준영까지 올라와서 공격에 무게를 더했다.

안 그래도 전반전 내내 맨유의 공세를 막느라 지쳤던 한국 선수들에게 이 같은 공세는 버거웠다.

“우왓! 이준영이 쐈다!”

박스 밖에서 준영이 갈긴 벼락 슛.

함흥철이 펀칭을 해냈지만, 어찌나 슛이 강했던지 뒤로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든 데니스 바이올렛이 리바운드 볼을 골대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 모습을 본 교민들은 아쉬운 한숨을 토했다.

“아, 역전당했네…….”

“역시 무리인가?”

“뭘 낙담하는 거야? 이 정도만 해도 잘한 거라고!”

전반전은 2 대 1로 맨유의 역전으로 끝났다.

그리고 후반전에 양 팀은 선수들을 교체했다.

한국 대표팀은 일부 지친 선수들을 바꿨지만, 맨유는 미드필더와 공격수를 대거 바꾸었다.

로니 코프를 대신해서 조니 자일스가 들어갔고, 좌우 윙에는 알렉스 퍼거슨과 알버트 퀵솔, 중앙에는 숀 코너리와 브라이언 클러프가 포진했다.

“좋아, 어디 몸 좀 풀어 볼까.”

후반 시작과 동시에 브라이언 클러프와 알렉스 퍼거슨은 공을 돌리고 있는 한국 수비수들을 무섭게 몰아붙였다.

주장이 강조하는 전방 압박.

여기에 당황한 한국 수비수들은 함흥철에게까지 공을 돌렸고, 함흥철은 전방 쪽으로 길게 패스를 보냈다.

‘그렇게 단순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으면 공은 쉽게 뺏기지.’

준영의 생각대로 빌 포크스가 헤딩으로 끊어서 조니 자일스에게 패스를 밀어 주었다.

과감하게 중앙으로 치고 들어가던 조니 자일스는 브라이언 클러프에게 공을 밀어 주었다.

함흥철이 달려 나와 그 공을 잡아채려 했지만, 브라이언은 슬쩍 옆으로 공을 흘려 버렸다.

그리고 때맞춰 쇄도하던 바비 찰튼이 세 번째 골을 만들어 냈다.

“끝났군.”

“전세가 완전히 유나이티드 쪽으로 기울었어.”

세 번째 골에서 결판이 났다.

호기심을 갖고 오늘 경기를 보러 왔던 기자와 스카우터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의 예상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후 후반 15분과 18분에 브라이언과 조니 자일스가 차례로 골을 넣었다.

스코어는 5 대 1.

이제 맨유의 승리는 의심할 수 없다.

앞으로 골이 얼마나 더 들어가느냐만 궁금할 뿐.

그런데…….

“대- 한민국!”

“힘내! 포기하지 마!”

대표팀이 무너져 가는 상황에서도 교민들의 응원 함성은 더욱 높아졌다.

***

함흥철 선수는 원래 포지션이 풀백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양공고 재학 시절 심판인 이창석 씨의 권유로 골키퍼로 포지션을 바꾸었다고 하네요.

표정만 봐도 포스가 남달라 보이는데, 실제 체격도 굉장히 건장했습니다.

현역에서 은퇴하고 감독이 된 후에도 항상 선수들과 같은 훈련량을 소화했다고 합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에 대표팀 단장을 맡았을 때가 65세인데, 워낙 단련에 힘써서 겉보기엔 40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하셨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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