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60. 이어받은 투혼
올덤의 공격수 케니 체이터는 현재 4부 리그 선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5년 전인 17살 때 풋볼 리그에 신기록을 하나 남겼다.
바로 프로 무대 최연소 해트트릭 달성자라는 것.
그만큼 기회가 왔을 때는 마무리를 지을 능력은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방금 전 한국 선수들의 발이 무거워진 틈을 타서 뒷공간으로 파고들어 추격 골에 성공했다.
“좋았어! 한 골 따라잡았다!”
“팍팍 넣어 보자고!”
올덤 선수들도 한국 선수들이 지쳤다는 걸 눈치챘다.
무엇 때문에 벌써 퍼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렇게 분위기는 올덤 쪽으로 기울었고, 전반과 전혀 딴판으로 경기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올덤은 추격 골을 넣은 케니 체이터를 중심으로 계속 한국 진영을 들쑤시며 연속해서 슈팅을 만들어 냈다.
후반 18분에 케니는 단독 돌파 후 슈팅, 그리고 4분 후에 다시 페널티 아크 쪽에서 파고들며 강력한 슛을 날렸다.
모두 골문 안쪽으로 향한 유효 슈팅이었지만, 골키퍼 함흥철이 몸을 날리며 연거푸 막아 냈다.
“뭐 하는 거야! 정신 차리고 수비하라고!”
주장 함흥철의 호통이 먹히는 건 그나마 체력이 강한 차태성뿐.
다른 수비수들은 알아듣고도 제대로 상대를 쫓아가지 못했다.
가까스로 어떻게 공을 끊어 내면 황급히 멀리 차 내느라 최전방의 공격수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당연히 공격도 지지부진.
한국 대표팀이 이렇게 주춤하는 만큼 올덤은 공세를 더욱 높일 수 있었다.
‘아, 이거 야단났다.’
동료들의 상태나 경기 흐름을 눈치챈 조윤옥은 황급히 내려와서 수비를 거들었다.
하지만 애쓴 보람도 없이, 올덤의 두 번째 골이 터지고 말았다.
케니 체이터가 갈긴 슈팅이 수비수 김흥복의 발에 맞고 굴절되면서 골대로 들어가 버린 것.
“쯧쯧, 재수도 없군.”
“운도 실력이지. 그리고 코리아 팀은 너무 일찍 지쳐 버린 탓도 있고.”
“거참, 벌써 지쳐서 어쩌자는 건지.”
“이게 중국인들이 말하는 ‘드래곤의 머리에 뱀의 꼬리’인 상황인 거군.”
점수는 3 대 2.
턱밑까지 추격을 허용한 한국 대표팀을 보고 관중과 스카우터들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한국 팀이 강도 높은 체력 훈련의 후유증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아니, 알아도 이해해 줄 사람도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결과가 나쁘면 평가도 박하기 마련이니까.
물론 아직 결과가 확정된 건 아니다.
다만 경기 흐름이 올덤 쪽으로 많이 기울어졌다는 게 문제였다.
‘이런 힘든 상황도 나름 경험이 될 수 있을까?’
준영은 필드에 있는 선수들을 연방 독려하는 민병대 코치를 바라보았다.
혹시 지금 이 힘든 상황은 그가 그린 큰 그림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과연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하려나?’
준영은 어떤 결과가 나오든 나쁘지 않을 거라고 봤다.
뼈아픈 역전패를 당한다면 코치 본인도 자신이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린 것을 뉘우치게 될 것이다.
비기거나 간신히 승리를 거둔다면 X줄이 탄 만큼 깨닫게 되는 게 있을 것이다.
다만 결과가 어떻든 본인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큰일이다.
‘설마 그 정도로 철면피는 아니겠지.’
준영이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관중석에서 또다시 환호성이 터졌다.
미드필드에서 패스를 받은 케니 체이터가 멋진 터닝슛을 날린 것.
다행히 이번에도 함흥철이 동물적인 선방으로 쳐 냈다.
하지만 아직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곧장 올덤의 코너킥 공격이 이어졌기 때문.
“사람 놓치지 마!”
“Hey, Don’t push me!”
페널티 박스에서 양 팀 선수들이 밀고 당기는 와중에 볼이 떨어졌다.
누구에게 맞은 건지 알 수 없는 공은 함흥철이 손쓸 수 없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골문 앞에 있던 차태성이 멀리 라인 밖으로 공을 차 냈다.
겨우겨우 위기를 모면한 한국 선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침착하게 해! 아직 우리가 지고 있는 거 아니야. 힘들어도 정신력으로 버티면서…….”
민병대 코치가 라인 가까이 와서 열심히 외쳐 댔다.
그 말에 준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정신력이라는 것을 완전히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어디 그것만 남발한다고 될 일인가.
어느 정도 기반이 있어야 정신력도 제대로 발휘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이 올림픽 본선이나 월드컵도 아닌데, 무슨 정신력 드립이야.’
준영은 어이없어했지만, 지금 뛰는 선수들은 그렇지 않았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 이 경기도 그들에겐 중요했다.
경기 경험을 키울 수 있는 기회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예선, 아니 본선의 명단에 포함되는 데 눈도장을 받을 시험 무대니까.
그래서 숨이 차고 몸이 무거워도, 금방이라도 근육에 경련이 올 것 같아도 다들 이를 악물고 뛰었다.
“막내야, 패스는 내가 찔러 줄 테니까 넌 최대한 상대 진영을 흔들어.”
“예, 알겠습니다!”
최정민은 힘이 남아 있는 조윤옥을 올려 보내고 본인은 내려와서 수비를 거들거나 전방으로 안정적으로 패스를 공급해 주었다.
그의 이런 플레이에 준영뿐만 아니라 관중들 역시 감탄했다.
“저 8번 Choi라는 선수, 꽤 다재다능하잖아.”
“패스도 꽤 날카로워.”
“힘든 상황에서 팀을 잘 캐리해 주는군.”
최정민의 활약과 한국 선수들의 분전은 관중들의 평가를 돌려놓기에 충분했다.
체력이 부족한 약골들에서 지쳐도 쉬이 물러날 줄 모르는 강한 투혼을 가진 녀석들로.
“와, 저것 봐. 방금 슈팅을 몸을 던져 막았어.”
“저 친구는 쥐가 났나? 절뚝거리면서도 계속 뛰는군.”
“저런 건 우리 팀 놈들도 배워야 해. 조금만 불리하다 싶으면 주저앉아 버리니…….”
그렇게 한국 선수들은 마지막까지 투혼을 발휘한 끝에 추가 실점 없이 경기를 끝낼 수 있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주저앉아 버린 한국 선수들을 향해 관중들이 박수를 보냈다.
잠시 후, 힘겹게 몸을 일으킨 한국 선수들은 올덤 선수들과 악수를 나누고 관중들에게도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확실히 닮았구만.”
조 암스트롱이 중얼거린 말에 준영은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닮았다니, 뭐가 말입니까?”
“자네랑 저 친구들. 실력을 떠나서 포기할 줄 모르는 기질을 가진 건 분명해 보여.”
“그거야 뭐…….”
나도 한국인.
몇 번이고 주저앉고 쓰러져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버티는 저들의 투혼을 이어받은 21세기의 플레이어.
‘나는 저들이 흘린 피땀에서 태어났으니까 말이야.’
그렇기에 답답하고 한심해 보여도 돌아설 수 없었고, 할 수 있는 만큼 도와주리라 마음먹었다.
원래 역사와 다르게, 저들이 꿈을 이뤄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으니까.
***
올덤 애슬래틱 AFC를 3 대 2로 이긴 한국 대표팀은 며칠 후 허더스필드 타운과 연습 경기를 가졌다.
이전 경기와 달리 그 경기에는 건설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한국 교민들이 리즈 로드로 찾아와 열렬한 응원을 펼쳤다.
앞선 경기들은 업무 시간과 겹쳐서 응원하러 올 수 없었지만, 오늘 경기는 다행히 저녁에 했다.
대표팀의 경기를 보고 싶어 하는 교민들을 위해 준영이 허더스필드 측에 양해를 구해 시간을 조정한 것이다.
“대- 한민국!”
짝짝- 짝! 짝! 짝!
단순하지만 힘찬 구호에 이은 뜨거운 박수 소리.
당연하지만 이 응원 구호는 준영이 알려 준 것이었다.
수십 년 일찍, 그것도 머나먼 타국에서 등장한 이 외침은 응원하는 이들이나 필드에서 뛰는 선수들 모두의 마음을 뜨겁게 타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때문일까.
레스 마시에게 선제골을 내줬던 한국 선수들은 체력이 떨어지는 후반전에 더욱 힘을 냈다.
그러다 경기가 거의 끝나 가던 후반 42분, 코너킥 상황에서 최정민이 떨궈 준 헤딩 패스를 정순천이 밀어 넣으며 동점 골을 만들어 냈다.
“들어갔다아-!”
“대한민국 만세! 대표팀 만세!”
신나게 태극기를 흔들며 기뻐하는 교민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준영도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무척 흐뭇해 보이네요.”
함께 경기를 보며 응원을 해 준 리즈의 말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광경, 이런 함성을 또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머나먼, 그리고 21세기와 완전히 다른 조국.
낯선 시대의 현실을 개탄하기도 했지만, 하고자 하니 조금씩 바꿔 나갈 수 있었다.
‘저들에게 미래의 응원 구호를 알려 주지 않았다면… 아니, 애초에 한국 대표팀의 특별 전지훈련을 돕지 않았다면, 이 뜨거운 함성을 듣는 일도 없었겠지.’
정말 이리저리 발품을 팔아 가며 애를 쓴 보람이 있었다.
“뭔가 미래에 조금은 더 가까이 다가간 것 같은 기분이야.”
“좀 더 가까이 다가간다면… 준의 노력으로 한국이 다시 월드컵에 나가는 게 앞당겨진다는 거예요?”
“글쎄, 그건 두고 봐야지.”
그렇지 않아도 올해 후반기부터 칠레 월드컵 예선이 시작된다.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팀은 이번 예선이 무척 험난했다.
아시아에 배정된 티켓은 0.5장.
유럽과 플레이오프를 통과해야 비로소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원래 역사에선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팀이 유고슬로비아였지.’
지난 스웨덴 월드컵에서 유고는 8강에 올랐다.
비록 서독의 헬무트 란에게 일격을 맞고 패하긴 했지만, 조 예선에서 프랑스를 격파했을 정도로 강했다.
‘그 유고슬라비아를 과연 한국이 이길 수 있을까? 아무리 내가 가세한다고 해도…….’
준영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경기가 끝났다.
한국 선수들은 쉴 새 없이 응원을 펼쳐 준 교민들 앞으로 다가와서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여, 아우님, 덕분에 오늘도 좋은 경기를 했어.”
최정민이 준영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준영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대화를 나누었다.
“어떻습니까. 종가의 축구를 경험해 본 느낌이?”
“확실히 빠르고 거칠어. 내 스타일이랑 안 맞다 싶지만,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어떤 상대와도 겨룰 자신이 생길 것 같아.”
“겨룰 기회가 있다면 어쩔 겁니까?”
조 암스트롱은 최정민에 대해 꽤 좋은 평가를 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팀 스카우터들도 한국 대표팀의 후원을 맡고 있는 준영에게 최정민에 대해서 물어보곤 했다.
물론 보기보다 나이가 많고, 군인 신분이라는 점 때문에 입맛만 다시고 물러났지만, 그래도 영입에 관심을 보이는 팀들이 있었다.
“고맙지만 그 기회는 사양하지. 아우도 알잖아. 내가 대표팀 큰형이라는 거. 큰형이면 본가를 지켜야지.”
머나먼 해외에서 선수 생활을 해서는 대표팀에 차출되기 힘들다.
월드컵 같은 큰 무대에 도전하기를 원하는 최정민은 유럽 무대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 10년, 아니 5년만 젊었으면 모르겠다만…….’
아쉽긴 했지만, 이번에 준영이 특별 전지훈련을 도와준 덕분에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더구나 전지훈련 마지막 훈련 상대는 무척 특별했다.
바로 준영과 함께 이번 전지훈련에 협조해 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지금까지 맞붙은 팀들과는 격이 다른 유럽 챔피언이다.
“이봐, 아우님, 한 가지 부탁 좀 해도 되겠나?”
“예, 말씀하십쇼.”
“그러니까…….”
이어지는 최정민의 말을 들은 준영은 표정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심이세요?”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풀코스로 즐기고 싶어.”
진지한 최정민의 눈빛을 본 준영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최정민이라도 그런 부탁을 했을 것 같았으니까.
***
어제 월드컵 최종 예선 경기에서 시리아가 후반 38분에 동점 골을 터트리는 걸 보고 글렀구나 싶었죠.
하지만 손흥민 선수가 마지막에 한 건 해 주더군요.
시차 적응이나 휴식 부족으로 컨디션이 최악인 상황에서도 할 땐 하는 캡틴이 있어 정말 다행이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