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59화 (259/400)

Round 259. 순풍 뒤의 폭풍

힘든 훈련을 마친 선수들을 달래 주는 것은 식도락.

훈련장의 식당으로 온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은 뷔페식으로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싱글벙글했다.

“외국에 오면 빵만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그러게. 이렇게 쌀밥에 김치까지 먹을 수 있게 될 줄이야.”

김치라고 나온 게 백김치와 동치미, 겉절이 정도이지만, 이것만 해도 어딘가.

빵과 치즈 같은 것만 먹고는 못 견딘답시고 고추장과 된장을 챙겨 왔던 일부 선수들은 무안할 지경이었다.

“너비아니나 갈비찜은 한국에서 먹었던 것보다 더 맛있군.”

“두부도 그래요. 훨씬 깔끔하고 단백하다고 할까.”

“매일 이렇게 먹고 훈련하면 진짜 실력이 쑥쑥 늘겠어.”

“실력이 늘기 전에 네 뱃살이 먼저 늘어나는 거 아냐?”

동료들과 즐겁게 식사를 즐기고 있던 최정민은 이번에 현지에서 합류한 막내 조윤옥을 보며 말을 건넸다.

“다음 평가전 상대가 올덤 애슬레틱이라고 하던데, 지금 네가 뛰고 있는 팀 맞지?”

“예, 맞습니다, 선배님.”

“어느 정도 수준이냐? 듣자니 4부 리그 팀이라던데.”

한국 선수들이 영국에 와서 놀란 게 축구팀이 정말 많다는 점이었다.

한 도시에도 여러 개의 팀이 있다 보니 리그로 등급을 나눠서 거의 매주 경기를 하고 있었다.

“4부라고 해도 일단 프로팀이라서 지난번에 붙었던 모즐리 같은 팀보다 훨씬 강해요. 선수들 체력과 스피드도 좋고요.”

“역시 체력과 스피드인가…….”

모즐리 AFC의 경우에도 선수들의 발재간은 대단치 않았지만, 다들 체력이 좋고 발도 빠르고 몸싸움도 잘했다.

그렇게 바탕이 좋아서 잘 밀리지 않다 보니, 플레이도 훨씬 자신감 있게 하곤 했다.

‘그에 비하면 우린 상대와 몸싸움을 이겨 내고 쫓아가는데 바빠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지.’

여독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정상 컨디션에서도 쉽게 경기를 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점을 생각하면 체력 훈련을 강조하는 민병대 코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준영 아우는 너무 막무가내라며 비판하고 있지만.

“어쨌거나 그 올덤 팀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말해 봐.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고 했으니까.”

“예. 그게, 저랑 같이 최전방에서 뛰는 케니 체이터와 피터 스트링펠로라는 공격수들이 있는데…….”

최정민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조윤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많이 먹고 많은 훈련을 한다고 해서 유럽 선수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기대할 수 있는 건 승리를 통한 희망과 자신감.

해 볼 만하다, 더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으면 좀 더 수월하게 성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다들 그런 기대를 품으며 다음 경기를 준비해 나갔다.

***

1월 20일 수요일 오전.

대한민국 대표팀은 올덤 애슬레틱 AFC의 홈구장 바운더리 파크에 도착했다.

평일에 치러지는 연습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많은 관중들이 찾아왔다.

그뿐만 아니라, 몇몇 스카우터나 기자들도 자리를 잡았다.

“캡틴 리의 고국에서 온 팀이라면서?”

“10여 년 전에 런던 올림픽에도 출전을 했던 팀이야. 스위스 월드컵 때는 헝가리랑도 붙었고.”

“다들 캡틴 리나 조만큼 잘할까?”

“크게 기대는 하지 마라. 전쟁 나서 축구고 뭐고 다 망한 나라라고 하니까.”

“그래도 혹시 알아? 개중에 쓸 만한 선수가 있을지.”

다들 호기심과 흥미를 부풀리고 있을 때, 한국 대표팀은 라커룸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이 유니폼은……?”

새로운 유니폼에 다들 고개를 갸웃할 때 준영이 설명해 주었다.

“제가 따로 준비했습니다. 여러분이 기존에 입던 건 품질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서요.”

준영이 준비한 유니폼은 가볍고 통풍이 잘되는 데다 21세기 한국 대표팀 유니폼을 반영해서 디자인도 훌륭했다.

그래서 다들 입이 벌어질 정도로 좋아했다.

“정말 멋지군. 준비해 줘서 고마워.”

모두를 대표해서 감사의 인사를 한 위혜덕 감독은 좀 의아하게 여겨지는 부분에 대해 지적했다.

“근데 태극기 밑에 있는 이 이상한 그림은 뭔가?”

“그건 호랑이 엠블럼입니다. 한국을 상징하는 동물이 호랑이잖아요.”

“아, 그렇게 말하니 호랑이 같아 보이는군. 근데 왜 죄인처럼 목에 칼을 씌워 놓았나?”

“그건 칼이 아니라 축구장을 의미하는 겁니다만…….”

하지만 위 감독의 말을 듣고 보니 진짜 목에 칼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안 그래도 호랑이 표정이 뭔가 불만스럽고 답답해 보이기도 하고.

“이게 호랑이였구나.”

“호랑이면 맹수답게 사나워 보여야 하는데…….”

“축구 실력만큼 그림 실력은 없는 모양이네.”

“구시렁대지 말고 입어. 애써 준비해 온 사람 무안하게시리!”

수군대는 선수들의 반응을 봐도 확실히 이 엠블럼은 이 시대의 감성과는 맞지 않는 듯했다.

‘나중에 바꿔야겠다.’

준영이 그리 다짐하는 사이, 선수들은 필승을 외치며 필드로 나갔다.

“와, 나왔다! 나왔어!”

“드디어 시작하는 건가.”

관중들은 올덤 선수들과 함께 나온 한국 대표팀 선수들을 살펴보았다.

“존 Y. 리는 안 나온 건가?”

“그 녀석은 잉글랜드 대표잖아.”

“신문을 보니 한국 국적도 받았다고 하던걸? 그럼 뛸 수 있는 거 아닌가? 더구나 어차피 친선전이잖아.”

“어쩌면 후반전에 교체로 나올지도 모르지.”

다들 기대하는 가운데, 양 팀은 심판 앞에서 동전을 던져 진영을 정했다.

그리고 잠시 후, 홈팀인 올덤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달려. 모두 앞으로 나가!”

공을 살짝 뒤로 돌리기 무섭게 올덤의 공격수 4명이 한국 대표팀 진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들을 노리고 길게 공중으로 날아오는 패스.

떨어지는 패스를 가슴으로 받아 낸 브라이언 버치는 이번 1월에 올덤으로 이적한 공격수.

그는 맨유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렀을 정도로 화려한 이력이 있었다.

“버치는 잠재력이 있었는데, 그걸 터트리진 못했지.”

“왕년의 유망주라 이거군요.”

준영은 오늘 경기장을 찾은 맨유의 스카우터 조 암스트롱과 함께 시합을 관전했다.

왕년의 유망주 버치는 힘으로 밀고 들어가려 했지만, 오히려 차태성과의 어깨싸움에서 밀려났다.

‘흥, 스코틀랜드 선수들에 비하면 너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오늘 수비수로 출전한 차태성은 하트 오브 미들로디언에서 뛰고 있었다.

아직까지 많은 경기에 출전하진 못했지만, 데뷔전도 치렀고 현지 선수들과의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힘도 키웠다.

부업으로 시작한 동물원의 힘든 업무를 꾸준히 해 온 덕분이었다.

심지어 요즘은 불곰 보이텍과 씨름을 하며 놀아 주기도 했다.

“오, 저 수비수, 돌파력이 굉장한걸.”

“마치 불도저 같군.”

관중들의 감탄에 힘입어 올덤 진영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차태성은 페널티 박스 중앙으로 뛰어드는 최정민을 향해 크로스를 올렸다.

하지만 크로스는 최정민의 머리를 스쳐 가면서 실패.

그 뒤에 있던 정순천이 가슴으로 받아 슈팅을 날렸지만, 크로스바를 훌쩍 넘어가 버렸다.

“급하게 차느라 공 밑동을 맞혔군요.”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군.”

하지만 방금 공격은 기선을 제압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이후로도 한국 대표팀은 주도권을 갖고 연이어 올덤의 골문을 두들겼다.

전반 12분에는 조윤옥의 단독 돌파가 골키퍼의 선방에 막혔고, 20분에는 최정민의 헤딩이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4분 후에는 수비수 셋을 제치며 문전으로 돌파했지만, 마지막 터치가 길어서 아쉽게 기회를 놓쳤다.

“하아, 될 듯 될 듯 하면서 안 되는군.”

최정민은 골이 터지지 않아 아쉬워했지만, 관중들은 그의 플레이에 감탄했다.

최전방에서 경합하면서 주변 동료들에게 기회를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찬스를 만드는 능력도 있었으니까.

“저 Choi라는 선수, 제법 잘하는걸.”

“발재간도 좋고,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아. 2, 3부 리그에서 뛸 실력은 되는 것 같은데?”

“저기서 마무리 능력만 확실하다면…….”

스카우터들이 이리저리 평가를 내리고 있을 때, 또다시 한국 팀에 기회가 찾아왔다.

미드필더 김찬기가 중원에서 끊어 낸 공을 곧장 최정민에게 밀어 주었고, 최정민은 한 차례 공을 컨트롤한 후에 곧장 슈팅을 날렸다.

골문과는 다소 먼 거리.

하지만 그가 날린 강력한 슛은 골대 왼쪽 그물을 크게 흔들었다.

“들어갔다!”

“역시 정민이 형!”

“대단해요, 선배님!”

환호하는 한국 선수들을 향해 박수가 쏟아졌다.

방금 전 슈팅은 정말 멋졌다.

그래서 스카우터들이 최정민에게 내리는 평가도 덩달아 올라갔다.

조 암스트롱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Choi라는 친구, 꽤 하는군.”

“한국, 아니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죠.”

아시아의 황금발.

최정민은 그 별명에 어울리는 활약을 이어 나갔다.

선제골에 올덤 선수들이 당황하는 사이 조윤옥의 패스를 받아 두 번째 골을 터트렸고, 전반 종료 직전에는 문전 돌파 과정에서 페널티킥까지 얻어 냈다.

그리고 그것을 본인이 깔끔하게 성공시키며 해트트릭.

그렇게 전반전은 대한민국 대표팀이 3 대 0으로 리드하며 끝났다.

“잘하는군. 하지만 후반전에는 과연 어떨지?”

“이대로라면 좀 힘들겠죠.”

조 암스트롱과 준영은 최정민의 해트트릭에 가려져 있는 한국 대표팀의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다.

선제골을 허용한 후 올덤이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전반이 끝날 무렵부터 대다수 한국 선수들의 발이 점점 느려지는 게 보였다.

‘이를 대처하지 않으면 후반에 경기 양상이 달라질지 모르지.’

준영은 슬쩍 민병대 코치를 바라보았다.

후반전에 다가올 고난에 그가 무슨 수를 둘지 궁금했다.

***

하프타임에 라커룸으로 돌아갔던 양 팀 선수들은 다시 필드로 나왔다.

조 암스트롱은 관중석으로 돌아온 준영을 보며 물었다.

“존 자네, 후반에 교체 출전하나?”

“아뇨. 오늘은 안 뛸 겁니다.”

위혜덕 감독은 내년 로마 올림픽 본선에 진출하면, 준영을 선발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였다.

다만 그 전에 연습 경기나 예선에서는 가능한 한 기존의 선수들에게 출전 기회를 주고 싶다고 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한국엔 제대로 된 리그가 없어. 그래서 대다수 선수들이 경기 경험이 부족하지.’

그렇기에 이번에 최대한 경험을 쌓을 기회를 주고 싶다고.

준영도 그의 뜻에 동의했다.

자신은 뛸 경기가 많은데 굳이 4부 리그 팀과의 연습 경기까지 욕심낼 필요는 없으니까.

“올덤이 선수를 많이 바꾸는군.”

“공격수들을 죄다 갈았네요.”

“거기에 비하면 한국 팀은 2명밖에 안 바꾸는군.”

갑자기 많은 선수를 바꾸면 조직력이 흔들릴 수 있다.

아마 민병대 코치는 그 점을 우려해서 교체를 최소화한 것 같았지만…….

‘역시 저럴 줄 알았지.’

준영은 후반전이 점점 흐를수록 떨어지는 한국 팀의 기동력을 보며 혀를 찼다.

그동안 계속 강도 높은 체력 훈련을 해 왔고, 전반전에 한바탕 공세를 퍼부었으니 후반전에 슬슬 퍼지게 되는 건 당연했다.

그 피로는 하프타임 때 잠시 휴식을 취한 정도로는 절대 온전히 회복될 수 없었다.

“저런, 뒷공간을 허용해 버렸군.”

“저러면 실점이죠.”

한국 수비 라인이 들쑥날쑥한 틈을 타서 올덤이 뒷공간으로 패스를 찔러 넣었다.

한국 수비는 가속도를 내는 올덤 공격수를 따라가지 못했다.

골키퍼 함흥철이 황급히 각을 좁혔지만, 결국 실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경기 흐름이 바뀌겠군.’

지금부터 진짜 힘든 시간이 될 것이다.

순풍 뒤에 다가온 폭풍.

준영은 한국 선수들이 이를 이겨 낼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

예전에 다음에서 K리그 축구 웹툰을 그렸던 샤다라빠 님은 저 엠블럼을 두고 창틀에 끼여 빡친(…) 호랑이라고 했는데, 제가 볼 땐 칼 쓴 호랑이 같습니다. 옛날 민화를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