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57. 한 해를 보내며
“와, 여기가 우리 팀의 새로운 둥지구나!”
새해를 하루 앞둔 날.
준영과 맨유 선수단, 그리고 코칭스태프와 구단 임원들은 이번에 완공된 클럽 하우스를 찾았다.
다들 싱글벙글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기 때문.
편안하고 아늑한 숙소와 각종 편의 시설이 잘 갖추어진 휴게실, 여러 가지 훈련 용품들이 비치되어 있는 트레이닝 룸 등등.
정말이지 어디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이사를 오고 싶을 정도였다.
“와, 이거 너무 좋은데. 부담스러울 정도야.”
바비의 말에 준영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부담스러울 게 뭐 있어? 그냥 숙소 겸 훈련 캠프라고 생각하면서 지내면 돼.”
“하지만 너무 고급이잖아요. 귀족 나리들이나 사는 곳 같다고.”
“영국 최고의 팀에서 뛰는 특급 선수들이 이 정도 대접은 받아야지.”
다들 옳다는 듯 준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디자인이 그럴싸하고 새집이라서 그렇지, 그리 고급스럽거나 비싼 건 아니야. 있다 보면 금방 지루해질걸.”
“확실히 주변 풍경을 보면 지루할 것 같긴 해.”
맨체스터 시내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보니 클럽 하우스 주변은 무척이나 한적했다.
물론 축구에 전념하긴 좋았다.
“제대로 축구에 전념하자고 클럽 하우스 규범에 금주와 금연을 넣으려고도 했었지.”
“그건 너무하잖아!”
“예쁘장한 수도원을 만들려고 했냐!”
애주가와 애연가들이 발끈하며 항변했다.
그들의 반응에 준영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21세기라면 이렇게 뻔뻔하게 굴 수 없었을 텐데.’
그러나 현재 시대는 다르다.
술 담배에 빠진 선수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준영은 이를 막아 보고자 금연과 금주 보너스도 마련해 봤지만, 이를 무시하거나 몰래 하고 다니곤 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클럽 하우스 규정에도 어느 정도 타협을 하게 되었다.
“허락하는 대신 술 담배는 허가된 장소에서만 허용될 거야. 술은 몰라도 담배는 확실히 지켜 줘. 애써 지은 클럽 하우스가 활활 타오르는 비극을 맞긴 싫으니까.”
“뭐, 그 정도라면 따라 줄 수 있지.”
다들 고개를 끄덕일 때, 데니스 로가 나서서 물음을 건넸다.
“근데 생각보다 일찍 완성되었네요. 무슨 비결이라도 있어요?”
“돈.”
“예? 아하, 상금을 걸었군요. 빨리 지으면 보너스를 준다고.”
“그뿐만은 아니지. 일단 철근 콘크리트 건물인 데다, 모듈 조립 방식을 적용하기도 했어.”
준영은 현장에서 일일이 다 만드는 방식과 다르게, 각 파트를 여러 곳에서 동시에 만들어 최종적으로 옮겨 와서 조립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배나 비행기도 각기 만든 파트나 부품을 한군데 모아다가 조립해서 완성시키잖아. 집 짓는 것도 그렇게 못할 까닭이 없는 거지.”
그러나 처음에 이 제안을 들은 공사 책임자나 인부들은 시큰둥했다.
그들의 입장에선 공사 기간이 길수록 좋았다. 그래야 급료를 받는 기간이 늘어나기 때문.
하지만 준영이 급료를 2배 인상해 준다고 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킨 대로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그럼 빨리 끝내도 손해는 아닌 데다, 공사가 끝난 다음에는 새로운 일감을 얻을 수 있으니까.
“혹시 날림 공사를 한 건 아니겠지?”
“이미 관공서에서 와서 검사는 다 끝냈어.”
한차례 쭉 둘러본 후, 다들 휴게실에 모여 다과를 들었다.
그때 맷 버스비 감독은 문득 잊은 것이 있다는 듯 준영에게 물었다.
“아 참, 존, 여기 이름은 정했나?”
“아뇨. 말이 나온 김에 감독님이 지어 주시죠. 기왕이면 멋지게요.”
“내가 말인가? 정말 내가 해도 되나?”
버스비는 슬쩍 하드먼 회장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하드먼 회장도 버스비가 하는 게 맞는다고 보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버스비 감독은 한동안 머리를 굴리다가 멋지다 싶은 이름을 내놓았다.
“오스길리아스… 는 어떤가?”
“별의 요새라. 그거 괜찮네요.”
“맞아요. 여긴 스타플레이어들이 모인 장소니까.”
준영과 던컨 등 몇몇 선수들은 좋다고 찬성했지만, 숀 코너리처럼 어리둥절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처음 듣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 말이죠? 혹시 리투아니아 말입니까?”
감독님의 부모님은 리투아니아 이민자 출신.
그래서 숀이 물어본 말에 버스비 감독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신다린이야. 소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요정들의 언어지.”
“그런 것도 있었습니까?”
전혀 몰랐다는 숀의 반응에 던컨은 펄쩍 뛰었다.
“아니, 반지의 제왕 같은 명작도 안 봤어요?”
“보긴 봤어. 무슨 마법사가 나오고 호빗이라는 조그만 놈들이 모험을 떠나는 얘기잖아. 도통 이해가 안 돼서 그냥 대충 읽다 말았지.”
“맙소사, 그게 얼마나 재밌는데 대충 읽어요!”
던컨이 반지의 제왕을 본 건 뮌헨에서 비행기 사고를 당한 직후.
그때 병원에 입원해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아내 몰리가 심심할 때 보라면서 건네준 소설이 바로 ‘반지의 제왕’이었다.
초반엔 좀 따분한 감이 있었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점점 중간계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명색이 배우라는 사람이 그런 명작도 안 보다니!”
“명작이라고 다 챙겨 봐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내 취향이 아닌 걸 어떡하라고.”
준영은 숀과 던컨이 아웅다웅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숀, 이해가 안 되더라도 한번 찬찬히 읽어 봐요. 생각보다 재밌을 테니까.”
“글쎄, 다시 본다고 해도 재밌을지…….”
“재밌다니까요! 아, 미국 할리우드 놈들도 벤허 같은 거 찍을 능력 되면 이거나 영화로 만들어 주지!”
던컨의 한탄에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올해 11월에 개봉한 벤허도 후대에 두고두고 언급될 정도로 명작.
이미 내용을 알고 있던 준영도 리즈랑 같이 보러 갔을 때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갤리선에서의 해상전은 치열했고, 전차 경주 신도 듣던 대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수준.
그러나 그만한 명작을 만들었다고 해서 현시대에 반지의 제왕을 영화화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대극하고 판타지는 다르니까. 지금 기술로 특수 효과 같은 걸 하려고 해도 장난이 아니겠지.’
거기다 톨킨이 생전에 영화로 만드는 걸 반대했다는 얘기도 있다.
알버트 역시 준영이 보여 준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보고 잘 만든 영화이지만, 톨킨이 만족하진 않을 거라고 평했다.
“뭐, 다른 사람도 아닌 주장이 권유하는 거니까 한번 완독해 보긴 할게.”
“잘 생각했어요.”
지금 숀 코너리는 모르지만, 먼 훗날 그에게 배우 생활 말년을 화려하게 빛낼 기회가 찾아온다.
실제 역사에선 본인이 그 기회를 거절해 버렸다.
하지만 역사가 바뀐 이 세계라면 과연 어떨지?
준영은 앞으로 40여 년 후가 기대되었다.
***
저택의 홀에 모인 이들의 시선이 벽에 걸린 시계를 향했다.
이제 1분도 남지 않은 1959년.
누가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10초를 남겨 두고 다 같이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5, 4, 3, 2, 1…….”
“Happy New Year!”
프레드로 저택에서 송년 파티를 즐기는 방문객들은 너 나 할 거 없이 주위 사람들과 새해 인사를 주고받았다.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쇼.”
“그래, 이 군. 자네도 하는 일 순탄하게 잘되고 풍요로운 한 해가 되길 바라지.”
준영과 새해 인사를 주고받은 김용식은 홀 안에 있는 방문객들 중 한국인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추석 때 보았던 유학생들 말고 사업가나 회사원 같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요즘 맨체스터에 한국 사람들이 꽤 늘었다더니 사실인 모양이군.”
“유학 말고 취업 목적으로 온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이런 이민자 중에는 집단으로 온 사람들도 있었다.
현재 맨체스터를 비롯해 영국 각 지역에서는 고속도로 건설 및 여러 가지 토목 건설 사업이 진행 중이었다.
당연히 값싼 노동력이 많이 필요했고, 인도나 카리브 등에서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저랑 안면을 튼 토목 업체 대표들도 혹시 한국에서 인력을 구할 수 있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한국에 있는 인맥을 통해서 소개를 해 줬죠.”
현재 한국 경제가 안 좋다 보니, 이런 이주 노동자 선발도 경쟁률이 엄청나게 높았다고.
하지만 영국 쪽에 단지 인력만 대는 게 아니라, 일감도 넘겨받은 과감한 업체들도 있었다.
“저기 있는 왕회장님도 그렇게 일감을 따낸 분이시죠.”
“왕회장? 성이 왕씨인가?”
“아, 아뇨. 별명입니다. 실제론 정씨죠.”
아무튼 이렇게 영국에 온 한국인들은 정말 열심히 일했다.
돈을 많이 벌어야 조국에 있는 가족들도 잘살 수 있고, 새로운 터전에서 기반도 잡을 수 있으니까.
이렇게 밤낮 안 가리고 쉴 새 없이 일한다고 해서 ‘개미’라는 별명도 얻었을 정도.
이런 별명은 언론에도 소개가 되었다.
“그 신문은 나도 봤어. 칭찬인지 빈정거림인지 뭔가 좀 애매하더군.”
“뭐, 범죄를 저질러서 대문짝만하게 나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그리 말한 준영은 잊고 있었다는 듯, 김용식에게 물음을 건넸다.
“아 참, 선생님, 한국 대표팀은 영국에 언제 오는 겁니까?”
“그쪽도 전지훈련 선수 선발에 고심하고 있는 모양이더군. 신정이 지난 뒤에 명단 발표를 할 거라니까, 다음 달 초에 오겠지.”
현재 대한민국 대표팀은 로마 올림픽 예선에 참가 중이었다.
12월에 도쿄에서 1, 2차전을 모두 치렀는데, 1차전은 낙승했지만 2차전은 고전하다 0 대 1로 패했다.
그래도 득실 차에서 앞선 덕분에 예선 다음 라운드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근데 도대체 2차전에서는 왜 고전한 겁니까?”
“듣자니 몇몇 일본 선수들의 활약이 대단했다더군. 1차전에서 뛰었던 거랑 영 딴판이었다는 거야.”
“갑자기 며칠 사이에 그리 돌변할 수 있는 겁니까?”
“이기지 못하면 탈락 아닌가. 배수의 진을 치고 덤벼들었을 테니 그랬을 테지.”
아무튼 그 패배는 한국 대표팀에게도 불안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4월 예선 2라운드에 대비해 특별 합숙 전지훈련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것도 유럽, 축구 종가 영국에서!
“자네나 유나이티드 구단에서 도와주겠다고 흔쾌히 나서 준 덕분이지. 정말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을 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야.”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걸요.”
한국과 영국 두 나라의 레전드로 남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준영.
그래서 그는 한국 대표팀의 전력 향상에 얼마간 도움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4월이면 굉장히 어수선한 상황에서 예선을 치르게 되겠군.’
역사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면 올해 4월에는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히는 혁명이 일어난다.
그것도 어린 학생들이 많은 피를 흘리게 되는 유혈 혁명이.
‘다 알고 있지만, 막을 수도 없는 일이고…….’
아니, 막아서도 안 될 일이다.
미래의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그 혁명의 결과에 달렸으니까.
‘그래도 어떻게든 피 흘리지 않는… 희생이 적게 끝나는 게 좋을 텐데.’
축구 경기라면 출전해서 결과를 바꿔 버리기라도 하겠지만, 혁명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답답한 마음에 준영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
숀 코너리는 반지의 제왕 간달프 역을 거절한 이유에 대해서 ‘원작도 봤고 각본도 봤지만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영화가 개봉되고 봤을 때는 간달프 역의 이안 맥켈런이 그 역에 잘 맞는 것 같더라 얘기를 했죠.
아라곤 역의 비고 모텐슨 역시 반지의 제왕 원작을 몰랐던 건 마찬가지인데, 훌륭하게 연기했던 걸 생각하면 아쉽다고 할까요.
물론 숀 코너리 특유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간달프에 안 맞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특유의 이미지로 대중의 뇌리에 자신의 존재를 깊게 박아 놓은 점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