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53. 완전체
“골이다!”
“펠레가 선제골을 터트렸어!”
“역시 펠레!”
빗속에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리버풀의 원정 팬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들이 펠레의 이름을 연호하는 외침이 올드 트래퍼드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쳇, 완전히 당했군.”
“엄청난 움직임이었어요.”
던컨과 맥닐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빈 공간을 포착하는 시야, 번개같이 공을 치고 들어가는 순발력, 수비수의 마크를 완전히 따돌리는 기가 막힌 테크닉.
지금까지 맞붙었던 그 어떤 상대와도 다른 움직임이었다.
그나마 비슷한 사람이라면 레알 마드리드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정도.
하지만 펠레는 그보다 더 유연하고 자유로웠다.
‘드디어 완전체 축구 황제가 나타난 건가.’
감탄하는 건 준영도 마찬가지.
월드컵이나 지난 시즌 FA컵에서 만난 펠레는 체격도 덜 여물었고, 경험도 다소 부족했다.
하지만 지금의 펠레는 그때와 달랐고,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봤던 실제 역사의 축구 황제와도 달랐다.
‘템포만 해도 21세기, 그것도 초일류 수준이다. 도대체 그동안 어떤 훈련을 한 거지?’
펠레가 풋볼 리그에서도 잘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다.
전력 분석관들이 찍어 온 영상을 보기도 했고.
하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펼치는 플레이는 간접적으로 듣고 본 것과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마치 영화 속에서 보던 공룡을 직접 대면한 느낌이랄까.
‘20세기 최고의 천재가 21세기 수준으로 진화하다니……. 이것도 내가 원인인가.’
펠레가 자신에게 원한을 불태우던 것을 떠올린 준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눈앞에 나타난 공룡을 해치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대로 리버풀에게 패배하면 올 시즌 리그 우승은 힘들어질 수 있으니까.
“혼자서는 펠레를 막기 힘들어. 문전으로 녀석이 접근하면 다 같이 마크해.”
“고작 19살짜리에게…….”
“나이가 아니라 기록을 봐야지. 지금 녀석은 리그 득점 1위를 달리고 있는 초특급 공격수라고.”
준영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던컨은 영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녀석이 현재 초특급 공격수라면, 나는 최강의 수비수라는 걸 보여 주겠어.”
“그래, 반드시 증명해 줘, 던.”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천재 플레이어 던컨 에드워즈.
실제 역사와 다르게 그는 여전히 살아 있고,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선수로 발돋움했다.
준영으로부터 21세기의 축구를 흡수해 가면서.
‘그래, 던이라면 분명 막을 수 있을 거야.’
체격과 기술도 일류일 뿐만 아니라, 투지도 남다른 녀석.
그렇기에 준영은 좀 전에 당한 것을 그대로 갚아 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
당한 만큼 갚아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은 던컨뿐만은 아니었다.
오늘 맨유의 공격을 선도하는 중책을 맡은 사나이 역시 방금 전 펠레의 골에 잔뜩 자극받은 상태였다.
“또다시 저 브라질 꼬마에게 질 순 없지.”
지난 시즌 디비전2에서 브라이언 클러프는 펠레와의 득점왕 경쟁에서 패배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당시 미들즈브러의 전력이 그를 제대로 받쳐 주지 못했던 점이 컸다.
하지만 유럽 챔피언 팀으로 이적한 지금은 그런 변명을 할 수 없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 언론과 팬들은 공격수들을 질타할 터.
클러프는 그들에게 샌드백 신세가 되고 싶지 않았다.
‘패스!’
득점을 향한 그의 강한 의지를 읽은 것일까.
직접 리버풀 진영 깊숙하게 공을 치고 올라온 던컨이 그에게 패스를 찔러 주었다.
그와 동시에 워렌을 비롯한 동료 공격수들이 일제히 박스로 파고들었다.
‘슛? 아님 패스?’
로니 모란을 비롯한 리버풀 수비수들은 순간 고민했다.
클러프를 막아야 할지, 아니면 침투한 다른 공격수들에게 마크를 붙어야 할지.
하지만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슛이다! 분명히 슛을 할 거야.’
‘저 재수 없는 놈은 직접 해결하려 들 테니까!’
클러프의 거만함은 유명했다.
제가 제일 잘난 줄 아는 놈이라면 남에게 기회를 양보하려 들지 않을 터!
그래서 모란과 그와 콤비인 몰리뉴는 곧장 클러프 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클러프는 슛도, 패스도 하지 않았다.
그의 선택은 돌파였다.
‘앗!’
‘흥, 머저리들.’
황급히 몸을 날린 2명의 수비수 사이로 당당하게 툭 치고 들어온 클러프.
그의 발끝에서 떠난 공은 골키퍼 더그 러덤이 반응하기도 전에 골 그물을 흔들었다.
목을 쭉 빼고 공격 과정을 바라보던 맨유 홈팬들은 일제히 함성을 터트렸다.
“Wonderful!”
“잘했다, 클러프!”
“이래야 유나이티드지!”
실점 이후 빠른 동점.
좀 전에 펠레의 골이 터지면서 홈팬들이 느꼈던 답답한 기분은 홀가분하게 씻겨 내려갔다.
물론 선제골의 주인공은 거북할 따름이지만.
‘쳇, 실점이 너무 이르잖아.’
유나이티드라면 분명 당하고 있지는 않을 거라 생각은 했다.
하지만 이제 경기 분위기를 주도해 볼까 싶던 차에 추격을 허용해 버리다니!
‘괜찮아. 안달할 필요 없어.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까.’
아직 전반전도 10분 이상 남아 있다.
펠레는 그 안에 골을 넣고 기분 좋게 전반을 마무리하리라 마음먹었다.
“또 골을 넣어 보려고? 이번엔 쉽지 않을 거다.”
킥오프 이후 재빠르게 공을 받아치고 들어오던 펠레의 앞을 던컨이 막아섰다.
진지한 눈빛만큼이나 그의 움직임도 치밀하기 짝이 없었다.
이리저리 살펴보며 발재간을 부리는 펠레를 전혀 통과시켜 주지 않았다.
‘일단은 후퇴해야겠군.’
전방에 있던 워렌 브래들리까지 달려와 수비에 가세하자, 펠레는 근처에 있던 동료 지미 멜리아에게 패스를 건넸다.
조니 자일스의 마크를 뿌리친 멜리아는 측면에 있는 이안 캘러헌에게 패스를 보냈다.
하지만 그 패스는 길고 깊숙한 위치로 떨어졌다.
‘저건 아웃이야.’
그리 확신한 짐 박스터와 달리, 캘러헌은 공을 끝까지 쫓아갔다.
그리고 완전히 라인이 넘어가기 직전에 살려 내는 데 성공했다.
‘헤헷, 방심하셨구만, 무명용사.’
‘이런……!’
깜짝 놀란 박스터가 마크를 붙었지만, 이미 공은 페널티 박스 중앙으로 빠르게 날아가 버렸다.
‘펠레!’
‘녀석을 막아야…….’
알란 아코트와 위치를 바꾸며 중앙으로 달려 들어온 펠레.
준영은 그가 돌아서지 못하게 바싹 마크를 붙었다.
그러자 펠레는 가슴으로 받아 낸 공을 발등으로 툭툭 치며 띄워 올렸다.
‘설마 오버헤드 킥?’
준영이 흠칫한 그 순간, 펠레가 절묘하게 공을 띄워 뒤로 넘겼다.
그러고는 잽싸게 준영의 옆으로 빠져나갔다.
‘이런, 페인트였나?’
황급히 돌아서 펠레를 마크한 준영.
하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좀 전에 펠레가 넘긴 공을 로저 헌트가 받아 골대 안으로 차 넣었으니까.
“우와아아아!”
“펠레! 펠레! 펠레!”
다시 앞서가는 리버풀.
사실상 골을 만들어 준 펠레를 성원하던 콥스는 우두커니 선 준영의 모습을 보며 통쾌한 미소를 지었다.
“캬캬캬! 저 칭크 녀석, 얼빠진 것 좀 봐!”
“당해 보니 어떠냐?”
“꺽다리 네놈이 망신당할 날이 오기만 기다렸다고!”
콥스가 뭐라고 하든, 준영은 위풍당당하게 리버풀 진영으로 돌아가는 펠레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완전체, 아니 그 이상 진화한 축구 황제인가.’
정말 한 방 크게 맞았다.
하지만 K.O를 당한 건 아니다.
‘그러니까 정신 차려라, 이준영. 아직 시합은 끝나지 않았어.’
승리의 미소를 지을 기회는 아직 얼마든지 있다.
스스로를 다그친 준영은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
전반은 1 대 2로 종료.
라커룸으로 돌아온 준영과 맨유 선수들에게 버스비 감독이 후반전 작전을 설명했다.
“자네들도 느끼고 있겠지만, 저 브라질 소년에 대한 견제 수위를 높일 필요가 있어. 그 녀석이 리버풀 공격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전반전에 펠레에 대한 1차 저지를 맡은 건 조니 자일스.
하지만 그의 적극적인 거친 견제에도 불구하고, 펠레는 맨유 진영을 휘저으며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바비, 후반전에는 자네가 펠레를 맡도록. 디 스테파노 이상으로 보고 마크하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비뿐만 아니지. 어디서든 상관없어. 근처에 펠레가 있으면 반드시 마크하는 동료를 도와서 봉쇄하도록.”
물론 이렇게 펠레에게 집중하다 보면 로저 헌트나 알란 아코트, 이안 캘러헌 쪽으로 기회가 나게 된다.
하지만 공격 선봉장인 펠레를 묶어 두면 그들의 창끝도 무뎌질 것이다.
“그리고 박스터, 9번을 절대 놓치지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박스터는 이를 뿌득 갈았다.
두 번째 실점은 자신이 안이하게 대응한 탓.
그 캘러헌이라는 애송이를 얕보지 않았다면 분명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후반전엔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존, 수비하느라 바쁘겠지만, 후반에는 공격 전개에도 힘을 실어 주게.”
“안 그래도 올라갈 참이었습니다.”
준영은 전반전에는 공격 가담을 자제했다. 펠레를 막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했으므로.
하지만 이제 웅크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경기를 뒤집기 위해서도 과감하게 문을 열고 나갈 필요가 있었다.
“아직 우리에겐 45분이란 시간이 남아 있어. 흐름을 충분히 바꿀 수 있으니 다들 힘내도록.”
“Yes, Sir!”
우렁차게 대답한 준영과 팀원들은 다시 필드로 향했다.
먼저 라커룸에서 나온 리버풀 선수들도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전반을 리드한 상태로 끝냈다고 방심해선 안 된다는 걸 그들도 인식하고 있었던 것.
‘상대는 유나이티드니까.’
‘분명히 캡틴 리나 빅 던크, 바비 찰튼이 치고 올라오겠지.’
‘전반보다 수비에 더 신경 쓰지 않으면……!’
나란히 필드로 나간 양 팀 선수들은 진영을 바꿔 후반전 경기를 시작했다.
휘슬이 울리기 무섭게 바비 찰튼은 펠레를 쫓았다.
바싹 붙는 건 아니었지만,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보니 펠레 쪽으로 쉬 패스가 전달되지 못했다.
‘귀찮게 구는군, 바비 찰튼. 뭐, 상관없어. 어차피 너도 내 타도 대상이니까.’
로순다의 뼈아픈 패배는 여전히 펠레의 마음에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10분을 버티지 못하고 쥘리메컵을 내줘야 했던 아픔.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리버풀의 딕 화이트, 조니 자일스의 견제를 피해 펠레 쪽으로 패스해 줍니다. 약간 뒤쪽으로 전달되는데요…….」
펠레는 바비 찰튼이 가로채기 전에 화이트가 건넨 패스를 확보했다.
그리고 오래 끌지 않고 그대로 전방으로 길게 찼다.
‘설마?’
흠칫하며 고개를 돌린 바비는 펠레의 롱 패스가 측면 수비 뒷공간에 떨어진 것을 보았다.
그 공을 잡아챈 건 이안 캘러헌.
그는 곧장 맨유 문전으로 방향을 잡아 과감한 돌파를 시도했다.
하지만 마크에 나선 준영에게 막혀 나동그라졌다.
‘페널티킥… 은 아니군.’
준영이 먼저 등을 지며 공을 가로챘기 때문에 파울은 아니었다.
하지만 준영은 방금 전 위기 상황보다 그 전에 펠레가 롱 패스를 찔러 줬을 때 더 움찔했다.
‘시야와 패스력도 올라갔다 이건가?’
완전체 축구 황제.
하지만 그에게 마냥 당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곧장 공을 돌려놓은 준영은 리버풀 진영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펠레 하면 뛰어난 축구 실력과 가공할 저주(…)를 먼저 생각합니다만, 브라질 사회에서 그는 혁신가로 통하기도 합니다.
현역 시절에는 브라질 군사 정권의 프로파간다로 이용당한 적도 있었지만, 이후에는 야당 정치인이자 사회운동가인 페르난두 엔히키 카르도주를 적극 지지하며 자선 사업에도 애썼습니다.
결국 카르도주는 1994년에 대통령이 되었고, 이후 펠레를 체육부 장관으로 파격 기용했는데, 브라질 사회에서 흑인이 장관이 된 게 이때가 최초였죠.
체육부 장관이 된 펠레는 젊은 시절 자신과 동료들에게 족쇄를 채웠던 브라질 축구계의 부정부패와 악습을 철폐했습니다.
그리고 선수들의 보수를 보장하고 해외로 자유롭게 이적할 수 있게 했죠.
이 ‘펠레 법’ 덕분에 수많은 브라질 선수들이 세계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