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52. 붉은 제국의 역습
“드디어 나타나셨구만.”
준영은 오늘 출전한 리버풀 선수들 중 살짝 눈이 처진 인상을 한 9번에게 주목했다.
그가 바로 붉은 제국의 건국 공신 이안 캘러헌.
21세기에서 사진으로 본 것과 비교하면 앳된 인상이긴 하지만, 심상치 않은 투지가 느껴졌다.
“왜 그래, 존? 저 애송이가 뭔 말이라도 했어?”
던컨의 물음에 준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 9번, 굉장히 체력이 좋고 활동량이 대단한 놈이야. 절대 방심하면 안 돼.”
“바비랑 비슷한 부류라는 건가?”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바비 찰튼도 이안 캘러헌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체격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확실히 지구력이 좋아 보이는 체형을 하고 있었다.
“리버풀도 점점 좋은 선수들이 모이고 있구나.”
“섕클리 감독님의 안목이 좋거든. 쟤들은 앞으로 점점 더 강해질 거야.”
“재밌겠구만.”
빈말이 아니라 진짜 흥미로운지, 던컨은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삐이익-!
심판의 휘슬과 함께 14라운드 경기가 시작되었다.
리버풀의 공격진은 중앙에 펠레와 로저 헌트, 좌우에 알란 아코트와 이안 캘러헌이 포진했다.
이 중에 이안 캘러헌은 경기 초반부터 엄청나게 뛰어다녔다.
수비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공격 시에도 잽싸게 전방으로 올라가 공간을 만들어 냈다.
그 왕성한 플레이에 던컨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존의 말대로군. 활동량이 굉장해.’
저렇게 뛸 수 있는 건 두 부류뿐이다.
페이스 조절을 할 줄 모르는 바보이거나, 체력에는 진짜 자신이 있거나.
던컨이 보기에 캘러헌이란 애송이는 바보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오늘 라인업이면 충분히 막아 낼 수 있겠지.’
오늘 맨유의 수비는 짐 박스터, 이준영, 빌리 맥닐, 던컨 에드워즈가 나왔다.
그동안 주전으로 나왔던 레이 윌슨와 빌 포크스는 경미한 부상 때문에 오늘 출전에서 제외되었다.
하프백으론 바비 찰튼과 조니 자일스가, 그리고 공격진은 알버트 스캔론, 브라이언 클러프, 숀 코너리, 워렌 브래들리로 구성되었다.
대략 4-2-4라 할 수 있는 포메이션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던컨이나 박스터가 전진해서 미드필드나 공격에 가세할 수 있고, 측면의 알버트와 워렌이 내려와서 수비를 거들 수도 있었다.
즉, 3-3-4 혹은 3-5-2로 변형될 수 있는 것.
이를 위해 버스비 감독은 현재 컨디션이 제일 좋고 2개 이상의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들을 선발로 내보냈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한 전술이라……. 우리 흑진주가 굉장히 신경이 쓰이나 보군.”
빌 섕클리 감독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펠레를 바라보았다.
펠레는 정말 하루하루 무섭게 성장해 가고 있었다.
불 속에서 단련되는 강철처럼, 거친 풋볼 리그에서 체격과 기술이 계속 발전해 가는 중이다.
“거기다 소통이나 팀워크도 훨씬 좋아졌지.”
동료들과 친분을 나누며 부지런히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영어 실력도 많이 늘었다.
말이 잘 통하니 그만큼 발도 잘 맞추게 되었고.
그렇게 단점들을 보완한 결과, 펠레는 현재 풋볼 리그 최강 공격수로 군림하게 되었다.
‘괴물 같은 자식, 괜히 축구 황제가 아니구만.’
준영은 펠레의 플레이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기술이 뛰어난 그를 견제하기 위해 상대 팀 선수들이 일부러 거칠게 나오곤 했는데, 이 때문에 여러 차례 심한 부상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지금 펠레는 조니 자일스의 거친 견제에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몸싸움에도 훨씬 능해졌고, 이를 바탕으로 보다 과감한 테크닉을 선보였다.
「펠레, 로저 헌트의 리턴 패스를 받고 유나이티드 페널티 박스로 달려갑니다. 캡틴 리의 마크에 빙글 돌면서 돌파! 하지만 빌리 맥닐이 멀리 걷어 냅니다.」
라디오 중계 캐스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놀란 건 준영도 마찬가지.
방금 전 펠레의 터닝은 단순한 페인트가 아니다.
마르세유 턴, 이 세계에서는 스트레인지 룰렛이라 불리는 고도의 테크닉이다.
‘이 녀석, 그것까지 습득하다니!’
‘후후후, 당신이 쓰는 기술은 이제 나도 다 쓸 수 있다고.’
펠레는 조 페이건 코치가 구해 온 유나이티드의 경기 하이라이트 영상 필름을 몇 번이나 돌려 보며 준영의 테크닉을 습득했다.
그것도 자신의 체형이나 플레이 리듬에 맞게 개량해서.
“존 Y. 리, 당신의 시대는 이제 끝났어.”
“한 번 제친 거 갖고 우쭐해하지 마라, 꼬마야.”
준영은 펠레의 말에 발끈하지 않았다.
흑마법사가 내린 축복 덕분에 앞으로 자신의 시대는 오래 지속될 것 같았으니까.
「리버풀이 첫 번째 코너킥 찬스를 잡습니다. 높이에서 앞서는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과연 어떨지?」
확실히 맨유의 장신 수비 라인이 부담스러웠던지, 리버풀의 코너킥은 낮고 빠르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준영이 먼저 발을 대서 걷어 냈고, 이것을 주워 받은 조니 자일스가 측면의 워렌 브래들리 쪽으로 길게 패스를 보냈다.
단신이지만 발재간과 스피드가 뛰어났던 워렌은 수비수를 제치고 크로스를 올렸다.
「리버풀 박스로 날아드는 공을 향해 헤딩-! 아, 숀 코너리의 헤딩슛이 아깝게 골대를 넘어갑니다.」
경기 초반이라 그럴까.
미처 영점을 맞추지 못했던 숀의 고공 폭격은 빗나가고 말았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던 리버풀은 패스를 주고받으며 맨유 진영으로 넘어갔다.
“좋아, 이번엔 내 차례다.”
하프백 딕 화이트가 건넨 패스를 받은 이안 캘러헌은 과감하게 측면 돌파를 시도했다.
그의 앞을 가로막았던 짐 박스터는 캘러헌의 움직임을 보다가 발을 슥 밀어 넣어 공을 깔끔하게 빼냈다.
“이런!”
캘러헌은 곧장 빼앗긴 공을 되찾으려 덤벼들었다.
하지만 박스터는 간단한 페인트 동작으로 캘러헌을 따돌렸다.
‘역시 애송이라 쉽게 속는군.’
가늘게 웃음을 지은 박스터는 전방으로 패스를 넣으려 했다.
하지만 방금 전 따돌렸던 캘러헌이 달려드는 바람에 공은 터치라인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쳇, 애송이 주제에 끈질긴 구석이 있군.’
‘존 Y. 리나 던컨 에드워즈면 몰라도, 듣도 보도 못한 녀석에게 당할 순 없지!’
박스터와 캘러헌은 잠시 눈싸움을 벌이다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이쪽이야. 나한테 드로잉해!”
“공격 패스를 못하게 막아!”
경기를 시작한 지 10분여.
점점 필드의 열기가 가열되는 가운데 하늘에 두꺼운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
유럽 챔피언의 타이틀을 갖고 있는 홈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에 대적하는 리버풀 FC는 현재 리그 1위, 풋볼 리그 최강의 공격력을 갖고 있다.
그렇다 보니 경기 전에 많은 이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경기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유나이티드, 역습 찬스입니다. 바비 찰튼이 찔러 준 패스가 브라이언 클러프에게! 클러프, 슛- 골… 아, 부심이 깃발을 들었습니다.」
클러프의 슈팅이 그물을 흔들기 무섭게 환호성을 지르던 맨유 서포터들은 오프사이드 판정에 아쉬움을 토했다.
“오프사이드가 맞나?”
“바비의 패스가 들어오기 직전에 리버풀 수비들이 전진했어.”
“젠장, 함정을 판 건가.”
“오프사이드 트랩은 우리 팀만의 특기일 줄 알았는데…….”
방금 전 깔끔하게 성공한 오프사이드 트랩을 본 섕클리 감독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훈련한 보람이 있군.”
한편으로 멋쩍은 기분도 들었다.
허더스필드 시절, 준영의 오프사이드 트랩을 보고 함부로 쓰지 말라고 충고를 했던 게 자신이었으니까.
한편 주장인 로니 모란을 비롯한 리버풀 수비수들은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클러프 녀석 좀 봐. 완전 뭐 씹은 얼굴인데.”
“예전에 우리 공격수들이 함정에 걸렸을 때 표정이 저랬겠지.”
“세상일은 정말 알 수 없다니까. 우릴 물먹였던 전술을 우리가 쓸 줄 누가 알았겠어?”
동료들과 키득이고 있던 로니 모란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에 깜짝 놀랐다.
“우왁! 비다!”
“기상청 자식들, 가랑비일 거라더니!”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관중석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비를 피해 빠져나가는 사람, 우산을 펼쳐 드는 사람, 우산 때문에 필드가 안 보인다고 투덜대는 사람 등등.
필드 역시 쏟아지는 비에 당황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거 그냥 지나가는 비가 아닐 것 같은데?”
“수중전을 해야 할지도…….”
“아, 진창에서 뒹구는 건 질색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졌다.
하지만 리버풀 선수들의 예상과 달리 필드에 물이 고이거나 진흙탕에 발목이 빠지는 일은 없었다.
“훗, 우린 시즌 휴식기에 필드 보수 공사를 끝내 놓았다고.”
“비가 많이 와도 걱정 없다 이거지.”
맨유 선수들의 자랑에 리버풀 선수들은 부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가 안필드였다면 바로 늪지대가 되었을 테니까.
“유럽 챔피언이 좋긴 좋구나.”
“필드를 통째로 갈아엎을 만큼 돈이 남아돈다니…….”
리버풀의 전력이 놀랄 만큼 상승하긴 했지만, 인프라는 좋지 못했다.
섕클리 감독이 부임해서 시정하기 전까지 안필드의 잔디에 제대로 물도 주지 못했고, 멜우드의 훈련장 역시 크게 개선되지 못한 상태다.
윌리엄스 구단주가 애를 쓰고 있지만, 재정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없는 살림에서 짜내서 영입한 펠레가 연전연승을 이끌면서 후원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반드시 유나이티드를 꺾고 우승해야 돼! 유러피언 컵에도 나가고 말이야!”
“맞아. 그래야 우리도 나아지지.”
“잘하면 클럽 하우스도…….”
기대감을 부풀리는 리버풀 선수들에게서 좀 전보다 강한 투지가 피어올랐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이유를 알았기에.
“저것들 왜 저래? 단체로 각성제를 먹었나?”
“그랬다간 바로 징계 먹을걸.”
“자일스! 내려와서 수비 거들어!”
준영과 맨유 선수들은 바쁘게 뛰어다니며 리버풀의 공격을 차단했다.
필드의 배수가 잘되기 때문에 진창에서 허우적댈 일은 없었지만, 애로 사항은 남아 있었다.
일단 가죽 공이 물을 먹고 더 묵직해졌다.
그런데도 공은 빠르게 잘 굴러갔다. 물기 때문에 필드가 미끄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띄워서 날아드는 공보다 지면을 굴러오는 공을 막기가 더 힘들었다.
‘볼링공을 막는 것 같군.’
알란 아코트가 찬 슈팅을 막았던 준영은 다리에 전해지는 묵직한 느낌에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전달되는 충격보다 난감한 건 미끄럽고 묵직한 슈팅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점이다.
잘못 굴절되면 바로 골대로 들어가 버릴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상대가 아예 슈팅을 시도하지 못하게 막는 게 제일 좋았다.
안 그래도 잔소리할 필요 없이 바비와 자일스뿐만 아니라 측면에서 알버트와 워렌도 내려와서 수비를 거들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수비의 숫자가 늘어난 가운데서도 리버풀의 공격은 둔해지지 않았다.
아니, 볼을 다루는 펠레의 발끝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흥, 브라질에선 이보다 많은 비가 올 때도 경기한 적 있다고.’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드리블하기에 훨씬 수월했다.
‘일단 던컨 에드워즈, FA컵 때 너에게 진 빚부터 갚아 주지!’
던컨을 앞둔 상태에서 공에 스핀을 먹여 슬쩍 앞으로 찬 펠레는 번개같이 맨유 페널티 박스로 파고들었다.
“막아, 얼른!”
“파울하면 안 돼!”
펠레의 앞을 가로막은 빌리 맥닐.
하지만 그 역시 징가(* Ginga, 삼바의 춤과 같은 경쾌하고 자유로운 스텝과 발재간)가 퓨전된 스텝 오버에 속아 넘어가 버렸다.
‘뚫렸다!’
다들 그리 확신한 순간, 펠레의 발끝에서 슈팅이 터졌다.
지면을 맹렬히 구르며 날아든 그 슈팅은 해리 그렉의 펀칭을 뚫고 골대로 들어갔다.
***
징가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일단 사전적으로는 브라질 전통 무술 카포에이라의 스텝을 뜻하지만, 인생을 심각하게 살지 않는 방법, 난관에 맞서는 몸짓, 삼바의 춤동작, 속임수 등을 뜻하기도 합니다.
브라질 축구에 있어서는 재치를 부려 상대를 제쳐 버리는 걸 징가라고 합니다.
그들의 축구가 상당히 현란하고 자유로운 까닭이 이 징가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죠.
펠레는 현재 브라질 축구가 쇠락한 이유에 대해, 과거와 달리 감독들이 전통을 우선하지 않고 유럽식의 전술을 중시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과거부터 유럽식 축구와 전통적인 축구의 충돌이 있었던 걸 생각하면, 그냥 ‘나 때는 말이여…’라는 푸념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