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48화 (248/400)

Round 248. 무엇이라도 해야 할 때

“추석이라. 벌써 그리되었나?”

에딘버러의 하트 오브 미들로시언 FC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던 차태성은 9월 초 이준영에게 편지를 받았다.

9월 17일 추석날 다 같이 모여서 식사나 하자고.

교통비까지 부쳐 준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맨체스터로 향했다.

“실례합니다. 미스터 차 되십니까?”

“그렇습니다만, 뉘신지?”

맨체스터 역에 나오자, 덩치 큰 금발 사내가 그를 맞았다.

“스테판입니다. 리 사장님의 지시를 받고 손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아, 그래요?”

차태성은 스테판의 차를 타고 모즐리 서쪽에 있는 준영의 별장에 도착했다.

정원에 나와 있던 준영이 그를 반갑게 맞았다.

“어서 와요. 멀리서 오느라 힘들었죠?”

“아니요. 별로……. 그나저나 집이 참 크군요.”

“별장이에요.”

이게 별장이라니!

이준영이 산다는 대저택은 이 집이 아니었단 말인가?

‘엄청난 부자라더니……. 진짜 소문대로 고종 황제의 금괴를 넘겨받기라도 한 건가?’

아무튼 별장 안으로 들어가니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여, 태성 군 아닌가. 스코틀랜드 생활은 어때?”

“어이쿠, 선생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먼저 와 있던 김용식 선생을 본 차태성은 곧장 기역 자로 허리를 굽혔다.

그를 도닥인 김용식은 곁에 있던 조윤옥을 그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인사해. 이쪽은 조윤옥이라고, 올덤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 친구지.”

“아, 동북고에서 공을 잘 찬다던…….”

프레드로 저택에는 이들 외에 다른 한국인들도 있었다.

미래 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용우 교수와 그 가족, 노르웨이에서 찾아온 이철호, 그리고 올해 맨체스터에 온 몇몇 한국인 유학생들까지.

차태성은 그중에서 똘망똘망한 인상을 한 소년에게 시선이 꽂혔다.

“쟤도 유학생인가? 좀 어린 것 같은데?”

“이건휘라고, 제1제당 이명철 사장의 삼남이래요. 9월부터 맨체스터에 있는 사립 고교에 편입해서 다니고 있다고 해요.”

“아하, 부잣집 도련님이었군. 어쩐지 귀티가 나더니만.”

초대받은 한국인들은 리즈가 가져온 다과를 들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어떻게 영국에 왔는지, 무엇을 하려는지가 주된 주제였다.

“건휘 학생은 무슨 계기로 영국에 왔죠? 여기 이분들처럼 한영 재단에 선발됐습니까?”

이철호의 물음에 이건휘는 가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께서 영국에 다녀온 일을 이야기하신 적이 있어요. 무척 흥미로웠죠.”

영국은 산업 혁명을 선도한 강대국.

비록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패권이 미국과 소련에게 넘어갔지만, 여전히 중공업과 제조업이 흥성한 산업 국가였다.

“원래는 일본으로 유학을 갈 생각이었는데, 아버지 얘기를 듣고 나니까 멀긴 해도 영국이 더 나을 것 같았어요.”

뭐든 배워도 원조에게서 배우면 더 낫지 않겠는가.

더구나 맨체스터는 영국 산업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곳이고, 아버지와 친분 있는 인맥까지 있었다.

“이철호 씨는 노르웨이에서 무슨 일을 하시죠?”

“호텔의 조리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상업학교에서 경영학을 배우고 있어요. 내년에는 프랑스나 스위스에 가서 요리사 면허를 따려고요.”

“식당을 운영하시려고요?”

“그것도 좋지만, 체인점이나 식품 산업 쪽도 생각하고 있어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식당 쪽에서 군침 도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낯익으면서도 그리운 냄새에 다들 한순간 말을 잊었다.

“다 됐습니다. 다들 식당으로 와 주세요.”

준영의 말에 홀린 듯이 식당으로 들어온 손님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우와, 이건…….”

“혹시나 했는데 진짜 명절 음식이잖아!”

기름기 잘잘 흐르는 쌀밥에 탕국, 생선구이와 수육, 전유어를 비롯한 각종 부침개와 튀김 요리, 약과에 유과, 각종 떡과 과일들까지!

머나먼 영국 땅에서 명절의 정취와 마주한 한국인들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이걸 다 어떻게 만들었나? 준영이 자네가 다 만든 거야?”

김용식의 물음에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서는 무리죠. 오늘을 위해서 한국에서 요리사 한 분을 초빙했어요.”

그것도 조부가 구한말에 대궐에서 숙수로 일하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뭔가 이것저것 요구하는 게 까다롭긴 해도 실력 하나는 확실했다.

‘이대로 한국으로 돌려보내긴 아까워. 미스터리 푸드 연구원이나 코리아 레스토랑을 세워서 책임자를 맡겨 볼까?’

그건 일단 나중에 생각할 일.

준영은 본격적인 만찬이 시작되기 직전, 오늘 모임의 주최자로서 한마디 했다.

“다들 알겠지만, 오늘은 조국의 오래된 명절입니다. 차례까지 지내지는 못하지만, 오늘 하루는 모두 행복하고 풍요로운 시간을 보내기로 하죠.”

말이 끝나자 환호와 갈채를 쏟아 낸 손님들은 이후 만찬을 즐기기 시작했다.

“이 전유어는 명태 살이 아닌 것 같은데…….”

“대구 같네요. 영국 사람들도 곧잘 튀겨 먹죠. 이 정도로 맛있지는 않지만.”

“와, 이거 시루떡이었구나! 케이크인 줄 알았는데.”

약간 고향 음식과 다르긴 해도, 간만에 먹는 한식이다 보니 다들 맛있게 먹었다.

거기다 한국에서 공수해 온 막걸리와 감주까지 나오자, 손님들의 표정은 더욱 밝아졌다.

“다들 만족하는 것 같네요.”

“그러게. 애써 준비한 보람이 드는군.”

리즈와 준영이 마주 보며 웃고 있을 때였다.

식당으로 들어온 경호팀의 스테판이 준영에게 전보를 전했다.

“미스터리 푸드 한국 지부에서 급보를 보냈습니다.”

“억관 아저씨가요? 대체 무슨 일로…….”

전보를 본 준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흥겹게 만찬을 즐기던 손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그러나?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김용우의 물음에 준영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강력 태풍이 한국 남부 지역을 휩쓸고 지나갔답니다. 피해가 엄청나대요.”

사망자는 수백 명, 이재민도 수십만에 달한다고 했다.

그 밖의 재산 피해는 아직도 계산 중이라고 하고.

초대형 재난 소식에 모두의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준영이 자네는? 한국에 자네 라면 공장이나 제화 공장이 있다고 했잖아?”

“그건 서울 근교에 있어 괜찮습니다. 별다른 피해가 없대요. 하지만 국토의 절반이 태풍에 파괴되었다는 게 문제죠.”

도로와 철도, 교량과 부두 시설 등등.

이런 인프라들이 파괴되었으니 수출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 리 만무하다.

인천항은 무사하다고 하지만, 초토화된 부산의 수출입 물동량을 떠안게 되었으니 여러모로 지체될 게 뻔하니까.

“거참, 하필이면 명절에 이런 재난이!”

“아버지께 곧장 전화를 해 봐야겠어요. 대구와 영남 일대의 공장과 창고는 괜찮은지…….”

“나도 집에 연락을 해 봐야겠어.”

아쉽게도 명절 만찬은 여기서 끝.

가족과 친지들의 안전이 걱정된 이들은 바로 국제 전화를 한다, 전보를 보낸다 부산을 떨었다.

준영도 이들을 돕는 한편, 자신도 이억관에게 연락을 보냈다.

상황을 파악하고 서둘러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태풍이 남기고 간 후폭풍에 휩쓸리고 말 테니까.

***

“하아… 완전히 폭격을 맞은 것 같군.”

어렵게 태풍 피해 현장에 도착한 김홍일.

부서진 주택들과 완전히 침수된 농경지, 그리고 주저앉아 울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이 그의 눈에 비쳤다.

이 모든 것이 ‘사라’라고 이름 붙은 태풍의 소행이었다.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는구만!”

하늘을 올려다본 김홍일은 분통을 터트렸다.

35년을 일제의 핍박에 시달린 국민들에게 남북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맛보게 하더니, 간신히 재건한 터전도 태풍으로 쑥대밭을 만들었다.

도대체 이 대한민국의 운명이란 각본을 쓰는 존재가 누군가?

눈앞에 나타나면 당장 총알을 먹여 주고 싶었다.

‘이렇게 되면 혁명이나 쿠데타는 피할 수 없어.’

현재 한국은 농업 국가.

그것도 수확 철에 이런 재난을 만났으니 물가는 폭등할 것이고, 민심은 흉흉해질 것이다.

거기다 내년엔 제4대 대통령 선거가 있다.

현재도 자유당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은데, 내년에는 어찌 될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미 자유당은 민심을 잃었어. 지금 상황에선 그걸 되찾기는 불가능해.’

9월 초 있었던 한강 수해에서도 자유당 정권은 쩔쩔맸다.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수해 현장을 둘러보면서 수습하려 애썼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영남과 호남은 태풍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미국의 원조가 끊긴 정부가 이를 제대로 극복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그들이 순순히 권좌에서 내려오려고 하진 않겠지.’

그동안 정치 깡패와 사법 농단으로 야당을 핍박하며 독재 정치를 일삼았던 자유당이다.

권력을 잃게 되면 어찌 될 것인지 그들 스스로가 제일 먼저 알고 있을 터.

‘지금까지도 부정한 행위를 자행해 왔는데, 내년이라고 다르겠나.’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국민들이 그런 짓을 과연 용납할까.

직접 들고일어나든, 국민들의 분노를 명분 삼아 누군가가 거병하든.

분명히 일은 터지고 말 것이다.

귀국해서 지금까지 국내 상황을 둘러봤던 김홍일은 이를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그 혼란 속에서 무고한 이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 나라를…….’

잠시 생각에 잠겼던 김홍일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입고 있던 양복 재킷을 벗어 던지고 두 팔을 걷어붙였다.

“자, 장군님!”

김홍일의 수행원들이 그의 행동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김홍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흙과 오물 속으로 들어가 복구 작업을 돕기 시작했다.

‘지금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야. 무엇이라도 해야지.’

해결해야 할 일은 산더미.

망연자실해하는 사람들에게 늙은 자신의 힘이라도 보태야 조금이라도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믿었다.

***

“그 망할 태풍이 그 유명한 사라였다니…….”

준영은 한국 지부로부터 이번 태풍 피해와 관련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태풍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는 꽤 놀랐다.

태풍 사라.

한국의 기상 예보에서 곧잘 전투력 측정기로서 들먹여지는 역대급 태풍이었으니까.

‘그게 올해 불어닥칠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말이야.’

현재 미스터리 푸드 한국 지부는 수출할 물량을 모두 이재민 구호에 사용하고 있었다.

이억관이 직접 구호품으로 지원하기도 했지만, 국내 기관과 해외 구호 단체에서 매입한 물량도 적지 않았다.

아니, 그 바람에 주문량이 폭증해서 밤낮으로 공장을 돌리고 있다고.

준영은 재료 수급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맨체스터의 본사에서도 돕도록 지시했다.

‘수출 계약 파기로 적잖은 손실을 입긴 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감수할 만해.’

이 기회에 한국 내수 시장은 확실히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어려울 때 자신들에게 도움을 준 이를 쉽게 외면하지 않으니까.

‘근데 이런 거 말고 따로 도와줄 방법이 없으려나.’

레전드 플레이어뿐만 아니라, 국민적인 스포츠 영웅의 이미지를 확실히 심어 놓고 싶다!

이에 준영은 이번 사태로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그러면서도 득이 될 만한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기왕이면 축구와 관련된 쪽으로.

“그러고 보니 실제 역사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맨유를 도와줬던 일이 있었지.”

그걸 응용해 보는 건 어떨지?

성사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한번 시도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

마치 전쟁 때 폭격당한 것 같은 광경인데, 태풍이 저런 겁니다.

나이 많은 어른들 얘기를 들어 보니 지붕이 통째로 뜯겨 날아갔다거나, 갑자기 불어난 물에 집이 통째로 떠내려갔다는 등 후덜덜한 일화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기상 예보가 발전하지 않아서 사라가 북상하면서 약해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실제론 더 강해졌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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