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47화 (247/400)

Round 247. 9월의 태풍

세 골을 연달아 실점한 첼시는 전열을 추스르며 추격에 나섰다.

더는 웅크리고 있어 봤자 소용이 없었기에, 그들은 선수비 전술을 그만두고 공격에 나선 것이다.

“저런 걸 두고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그러는 거군.”

“우리도 실점했을 때 저랬잖아. 또 저런 꼴이 되지 않으려면 정신 바싹 차리면서 수비해야 돼.”

첼시는 지미 그리브스를 중심으로 3톱, 그리고 그 뒤에 인사이드 포워드 2명을 배치하는 매우 공격적인 포진을 만들었다.

이에 맞서 맨유도 수비의 숫자를 늘렸다.

바비 찰튼과 로니 코프가 미드필드에서 저지에 나섰고, 윙어들도 최후방 수비에 곧잘 가세했다.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5백 수비 라인이 만들어졌다.

“저거 아까 첼시 놈들이 하던 밀집 수비 아냐?”

“크크크, 놈들도 한번 당해 봐야지. 얼마나 허파 뒤집히는지 말이야.”

맨유 팬들의 예상대로, 지미 그리브스는 허파가 뒤집히는 기분을 맛봤다.

‘젠장, 틈이 안 보이니…….’

좌우 중앙 어디 하나 만만하게 파고들 구석이 없었다.

공격하느라 라인을 올렸다가 카운터펀치를 맞았을 뿐, 맨유도 수비가 강한 팀이었다.

이는 유러피언 컵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공세를 막아 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하필 앞에 있는 게 존 Y. 리…….’

안 되겠다 싶었던 지미 그리브스는 뒤쪽에 있던 동료 공격수 토니 니콜라스에게로 공을 건넸다.

공을 받은 니콜라스는 바로 중거리 슛을 날렸지만, 골대를 한참 빗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 슈팅을 마지막으로 전반전이 끝났다.

“휴우, 하는 거 보니 올 시즌도 글러 먹은 것 같아.”

“우리도 외국에서 선수 좀 영입하지…….”

“흥, 구단 이사 놈들이 새 차를 지를 돈은 몰라도 선수를 사 올 돈은 없을걸.”

투덜대며 자기 팀을 성토하던 홈 관중들은 부디 후반전에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기를 바랐다.

확실히 하프타임 때 첼시 선수들도 정신을 차린 것일까.

후반전이 시작되자, 첼시는 부지런히 패스를 주고받고 빈 공간을 파고들며 기회를 만들려 애썼다.

그리고 그 시도는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지미 그리브스가 한 명 제치고 슛-! 해리 그렉 골키퍼가 쳐 냅니다. 후반전 첼시가 첫 코너킥 기회를 잡습니다.」

부디 이 기회가 득점으로 연결되었으면.

그리 바라고 있던 라디오 중계 캐스터는 이어지는 상황에 목소리를 높였다.

「첼시의 코너킥이 낮고 빠르게 페널티 박스 중앙으로 날아옵니다. 혼전 상황에서 볼을 걷어 내는 빌 포크스… 아, 심판에게 맞고 멀리 가지 못합니다!」

엉뚱하게 차단된 공을 확보한 건 공격에 가세하러 왔던 첼시의 주장 피터 슬렛.

그가 다이렉트로 찬 공이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골! 골입니다! 피터 슬렛의 추격 골! 첼시가 추격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시무룩하던 첼시 팬들이 반색을 하였다.

반면 어이없게 실점을 해 버린 맨유 측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21세기면 바로 경기 중단에 드롭 볼인데…….’

하나 이 시대 축구 경기에 있어 심판은 필드를 돌아다니는 장애물일 뿐.

뭐라고 따질 수도 없다 보니, 준영은 동료의 멘탈을 관리하는 데 더 신경 썼다.

“빌, 방금 그건 잊어버려요. 재수가 없었을 뿐이니까.”

“거참, 하필이면…….”

고개를 내저은 빌 포크스는 다시 수비에 집중했다.

한편, 1골 차로 따라잡은 첼시는 계속 공세를 유지하며 슈팅을 날려 댔다.

구석을 노린 지미 그리브스의 슈팅을 해리 그렉이 아슬아슬하게 쳐 내는 일도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동점 골을 성공시킬 분위기.

하지만 준영은 당황하기는커녕 웃음을 지었다.

‘첼시 녀석들, 공격한다고 뒷공간을 죄다 열어 놨군.’

위기가 오히려 기회.

페널티 박스로 들어오는 패스를 끊어 내며 전진한 준영은 전방으로 달려가는 바비 찰튼에게 공을 밀어 주었다.

질주하며 전방을 둘러보던 바비는 데니스 바이올렛 쪽으로 패스를 밀어 주었다.

오프사이드를 피해 수비 빈 공간으로 달려 들어간 데니스는 첼시 골대를 향해 슈팅을 날렸다.

파 포스트 쪽을 노린 슈팅은 레지날드 골키퍼의 손을 스치며 골대 안에 꽂혔다.

“아, 이런…….”

“피터 실렛은 수비를 안 하고 뭐 한 거야?”

희망이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를 들은 첼시 팬들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후에도 위기 상황은 계속 벌어졌다.

어떻게든 만회해야 하는 첼시는 수비보다 공격의 비중을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헐거운 수비를 맨유 공격수들이 인정사정없이 찢어발겼다.

후반 25분, 던컨이 놀라운 단독 돌파로 두 번째 골을 터트렸고, 10분 후에 데니스 바이올렛이 다시 득점을 추가했다.

2 대 6.

경기 시작 전만 해도 이런 스코어는 상상조차 못했던 홈 관중들은 망연자실해 버렸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이건 악몽이야. 현실일 리 없어.”

경기 종료 직전.

맨유 골대로 과감하게 돌파하던 지미 그리브스가 준영의 태클에 걸려 쓰러졌다.

심판은 곧장 페널티킥을 선언했고, 주장 피터 실렛이 깔끔하게 성공시켰다.

그러나 그 골이 추격의 불씨가 되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붉은 악마가 일으킨 골 폭풍 앞에 런던의 자존심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

첼시 원정 대승은 맨유에게 선두권을 추격하는 발판이 되었다.

사흘 후 버밍엄 원정에서도 맨유는 승리를 거뒀고, 9월 9일 리즈 유나이티드를 홈으로 불러들여 6 대 0으로 대파했다.

이후 7라운드 토트넘전과 8라운드 리즈 원정에서도 승리를 추가, 8월의 부진했던 출발을 깔끔히 씻어 냈다.

“9월에만 5연승인가? 그야말로 폭풍 같은 행보가 아닐 수 없군.”

오랜만에 찾아온 윈스턴 처칠의 칭찬에 준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진짜 폭풍은 따로 있죠.”

“아, 머지사이드의 붉은 돌풍 리버풀 말인가.”

리버풀은 개막전인 아스날 원정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7승 1무의 무패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 7승 중에는 지난 시즌 2위인 울버햄프턴에게 거둔 승리도 있었다.

원정에서 1 대 1로 비겼지만, 4라운드 안필드에서 울버햄프턴을 3 대 0으로 박살 냈다!

현재는 리그 단독 1위.

승격 팀의 무시무시한 반란에 영국은 물론 유럽 언론들까지 리버풀을 주목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붉은 제국의 비상이 이렇게 빠를 줄이야.’

리버풀발 붉은 돌풍의 핵은 바로 펠레.

지난 시즌 디비전2 득점왕에 올랐던 그는 1부 리그에 와서도 축구 황제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현재 7골로 득점에서도 단독 선두.

득점뿐만 아니라 어시스트도 잘 만들어 주고, 많은 기회 창출로 리버풀 공격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물론 상대 팀 입장에선 충격과 공포나 마찬가지.

“나도 지난달에 하이버리에 가서 아스날과 리버풀 경기를 봤지. 그 펠레라는 녀석, 정말 굉장하더군. 대체 월드컵 때는 어떻게 이긴 건가?”

“그때 펠레는 아직 좀 어렸죠.”

지난 시즌 FA컵에서 리버풀을 이길 수 있었던 건 팀 전력에서 맨유가 우위였기 때문.

거기다 펠레에 뒤지지 않는 던컨 에드워즈라는 천재가 있었다.

“자네들, 리버풀과 시합이 언제지?”

“14라운드, 10월 24일입니다.”

“자네 팀 감독과 코치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할 거야. 비전문가인 내가 봐도 그 브라질 녀석은 차원이 다른 괴물 같았으니까.”

한동안 축구를 주제로 준영과 대화를 나누던 처칠은 문득 잊은 것이 생각났다는 듯 머리를 탁 쳤다.

“아차, 축구 얘기만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닌데 말이야.”

“다른 일이 있습니까?”

“응, 대륙붕 법안이 이번 달 안으로 통과될 게야.”

북해 유전 개발에 도움이 될 대륙붕 법안.

그동안 보수당에서 처칠, 알버트와 친분이 있는 계파 의원들이 강한 추진력으로 밀어붙였다.

노동당에서도 딱히 반대 의견은 보이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의회 쪽에서도 북해 연안 지역 개발에 도움이 될 거라 보고 찬성하고 있다고.

‘드디어 통과가 되는구나!’

준영의 입장에선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석유 재벌 구단주라는 미래의 목표에 한층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벌써부터 투자자들이 냄새를 맡았는지 정유나 유전 개발 관련 주식이 오르고…….”

콰르릉!

갑자기 우레가 울리며 비바람이 강하게 몰아쳤다.

응접실 창문이 벌컥 열리며 빗물이 날릴 정도.

준영은 황급히 창문을 닫아걸었다.

“갑자기 비바람이라니……. 분명히 일기예보에는 그냥 흐릴 거라고 했었는데요.”

“후후, 이 나라의 날씨가 변덕스럽다는 거 알 때도 되지 않았나?”

처칠은 별일 아니라는 듯 준영이 타 준 홍삼차를 음미했다.

“법안 통과는 변덕스럽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걱정 마. 여기까지 와서 뒤집히진 않을 테니까.”

처칠의 장담에 준영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비바람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

9월 16일.

추석을 하루 앞두고, 이억관은 청담동을 찾아왔다.

8월 말에 많은 비가 내려 한강 주변 지역들이 홍수 피해를 입었는데, 청담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과 농경지들이 유실되는 바람에 이곳에 정착한 주민들은 명절을 챙길 겨를도 없이 피해 복구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억관은 트럭에 잔뜩 싣고 온 송편과 여러 가지 차례 음식들을 건넸다.

“아이고, 사장님, 이게 다 뭡니까?”

“뭐긴요. 내일이 추석 아닙니까. 바빠도 명절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죠.”

이억관의 마음 씀씀이에 주민들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부모 혹은 형제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맞서 싸우다 죽었지만,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다.

나라가 가난하니 금전적인 면은 기대하지 않았다. 명예라도 챙겨 주길 기대했지만, 자유당 정권은 거기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힘겹게 살아가던 유가족들을 챙겨 준 사람은 이억관이었다.

그 덕분에 유가족들은 안정을 누리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겨우 일군 터전을 쓸어버린 하늘이 야속하겠지만, 다들 좌절하지 말고 힘을 내십시오.”

“감사합니다, 사장님.”

명절 음식과 구호품들을 건넨 억관은 강남의 다른 마을로 향했다.

그곳은 청계천 화재로 집을 잃은 주민들이 모여 사는 곳인데, 청담동보다 피해가 더 크다고 들었다.

‘수확 철에 이런 수해라니……. 올해보다 내년이 진짜 큰일이겠어.’

어제 만났던 김홍일 장군은 이렇게 말하며 깊게 탄식했다.

한강 수해가 난 후로, 그 역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구호품을 지원하거나 복구 작업에 손을 거들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큰 피해를 보자니 앞이 깜깜하다고 했다.

흉년으로 인한 물가 상승, 식량 부족, 민심 동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안 봐도 뻔하다.

혁명 혹은 쿠데타.

정부가 정신 차리고 대응하지 않으면 정말 충격적인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남부 지역은, 그쪽 곡창 지대는 무사해야 하는데…….”

이억관의 기원을 비웃기라도 하듯 야속한 하늘은 다시 빗방울을 뿌렸다.

바람까지 심상치 않게 강하게 불었다.

가로수가 크게 휘청이고 트럭도 흔들거릴 정도.

‘이건 보통 비바람이 아니야.’

먹구름이 잔뜩 낀 남쪽 하늘을 보는 이억관의 얼굴이 굳었다.

뭔가 불길하고 거대한 재앙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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