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45. 어둠과 빛
맨유가 유럽 본토에서 한창 전지훈련을 하고 있을 즈음.
웸블리의 축구협회 회의실에는 심상찮은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선수 선정위원들의 따가운 시선이 향한 곳에는 대표팀 전임 감독인 월터 윈터보텀이 있었다.
“월터, 무엇 때문에 오늘 불려 나왔는지 알고 있나?”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서 아메리카 투어를 망쳤다고 호통을 치려는 건 아닐 테고요.”
5월에 잉글랜드 축구대표팀은 남미와 북중미 국가들을 상대로 원정 평가전을 치렀다.
결과는 형편없었다.
제일 먼저 마라카낭에서 열린 브라질과의 경기는 0 대 2로 패배했다.
브라질은 지난 스웨덴 월드컵 결승전의 패배를 갚아 주겠다며 이를 악물고 덤벼들었고, 그 기세에 밀린 잉글랜드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건 그나마 나았다.
현재 브라질은 남미에서 알아주는 강호니까.
하지만 이후 리마에서 열린 페루와의 경기에서 1 대 4의 참패를 당했다.
페루는 지금까지 월드컵에 한 번도 출전한 적이 없고, 올림픽 축구에서도 메달을 딴 일이 없었다.
그런 나라에게 3점 차이로 대패라니!
이후 심기일전하여 멕시코와의 경기를 잘 치러 보려 했지만, 이번엔 고산병이 발목을 잡았다.
선수들의 컨디션이 뚝 떨어지면서 결국 1 대 2로 패배.
그나마 마지막 상대인 미국에겐 8 대 1의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축구 종가이자, 월드컵 챔피언의 위엄은 이미 산산이 부서져 버린 뒤였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대표팀은 재편 중입니다. 톰 피니도, 빌리 라이트도 떠났으니까요.”
오랜 세월 대표팀에 헌신한 두 노장이 떠난 빈자리는 컸다.
실력도 그렇지만, 정신적인 지주가 되고 리더로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 빠지다 보니 팀이 위기에 빠졌을 때 쉽게 헤쳐 나올 수 없었다.
“아쉽게도 지난 아메리카 투어에는 합류하지 못했지만, 우리에겐 좋은 선수들이 있습니다.”
잉글랜드의 새 희망이 될 바비 찰튼, 부활에 성공한 천재 던컨 에드워즈, 측면 자원으로 새로이 주목받고 있는 레이 윌슨.
여기에 지난 월드컵 우승의 공로자이자, 유러피언 컵 2연패의 주역 존 Y. 리까지.
아쉽게도 이들은 소속 팀 일정 때문에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했다.
‘존의 경우는 단지 일정 때문은 아니겠지.’
아메리카 투어 전에 열린 브리티시 챔피언십에서는 바비 찰튼과 던컨 에드워즈가 소집된 적이 있었다.
레이 윌슨은 아직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입지라고 하지만, 존 Y. 리는 월드컵 이후 번번이 발탁에서 제외되고 있었다.
감독 본인의 요청이 있었음에도 선수 선정위원회에서는 이를 묵살하곤 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좋은 선수들이 있음에도 마땅찮은 이유 때문에 발탁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바로 그게 문제야, 월터. 오늘 자네가 불려 나온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라고.”
올 초에 선수 선정위원장이 된 패트릭 알렌은 얼마 전 월터가 제출한 선수 명단을 꺼내 들며 말을 이었다.
“1959-60 시즌 브리티시 챔피언십에 존 Y. 리를 차출하려고 했지. 왜 그를 자꾸 뽑으려고 하는 건가?”
“그야 풋볼 리그 최고의 수비수니까요. 위원회에서는 왜 존의 차출을 반대합니까? 월드컵 때는 다들 찬성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갑자기 이들이 변심한 이유는 알 만했다.
월터는 과거 카네기 대학에서 공부할 때 번역이 된 동양의 고전을 본 적이 있었다.
거기서 고대 중국의 Han 왕조를 세운 초대 황제와 그 부인이 저지른 행각을 보았다.
그들은 반란을 우려하여 함께 나라를 세우는 데 공헌한 신하들에게 누명을 씌워 처형시켰다.
그것을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고 했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사냥개는 삶아 먹는다는 뜻이었다.
‘월드컵 우승을 했으니 이제 존 Y. 리는 필요 없다 이건가.’
알렌 위원장은 대놓고 이런 본심을 밝힐 수는 없었던지 핑계를 늘어놓았다.
“존 Y. 리가 스웨덴 월드컵에 출전할 때 뭐라고 했던가? 영국에서 축구를 하게 해 준 은혜를 갚고 싶다고 했었지?”
“예, 그랬죠. 올바른 도리를 다하고자 한다고 했었습니다.”
“그래, 결국 쥘리메컵을 웸블리로 가져왔지. 하지만 다음번에도 그리한다는 보장이 있나? 우승을 한 번 안겨 줬으니 할 만큼 했다고 여기지 않을까?”
알렌의 주장에 월터는 분노가 어린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선수에게 직접 물어보기나 했습니까? 어떻게 지레짐작만 하고 선발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겁니까!”
“지레짐작은 아니야. 지난 월드컵 조 예선 1차전 때 존 Y. 리는 골을 넣고 유니폼 속에 입고 있던 또 다른 붉은 유니폼을 보였지.”
“그건…….”
“그게 존의 고국인 Korea 대표팀의 유니폼인지는 잘 모르겠네만, 한 가지는 분명하지. 그에게 잉글랜드에 대한 사명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거야.”
“그건 함부로 단정할 수 없는 겁니다!”
“작년에 의회에서도 대영제국 훈장 수여자 명단에서 그 친구를 제외했어. 괜한 이유는 아니라고 보네.”
“아닙니다. 그것은……!”
월터가 아무리 항변을 해도 위원들 중 그의 주장에 동의하는 이들은 없었다.
“다음 월드컵부터는 사명감을 다할 수 있는 진짜 잉글랜드인들로 구성된 대표팀으로 우승에 도전해야 한다고 보네. 자네도 그리 알고 대표팀을 운영해 주게.”
그 권고를 마지막으로 회의는 끝났다.
월터는 부글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분통을 터트렸다.
“어처구니가 없군! 진짜 잉글랜드인? 그게 어떤 건지 제대로 알고 떠벌리는 건가!”
켈트인, 로마인, 앵글로색슨에 노르만… 수많은 민족이 브리튼 섬에 뒤엉켜 살면서 영국인이 되었다.
19세기부터는 세계 각지의 식민지인들이 본토로 들어와 살고 있기도 하다.
제국이라면 응당 수많은 민족을 포용해야 마땅하다. 고대 로마가 그리하지 않았던가!
‘다른 건 몰라도 우승컵을 안겨 준 공신을 축출하려 들다니……. 이래서야 누가 대표팀에 사명감을 가지겠어?’
이건 분명히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그것도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답답한 마음에 월터는 저도 모르게 주먹으로 벽을 후려치고 말았다.
***
아직 사방이 어두컴컴한 새벽.
탁상시계가 요란하게 알람을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조윤옥은 호들갑을 떠는 탁상시계를 잠재웠다.
그리고 찬물 세수로 남아 있는 졸음을 쫓아내고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운동 나가나?”
윤옥이 밖으로 나오자, 하숙집 주인이 친근하게 말을 건네 왔다.
“예, 아저씨도 일찍 일어나셨네요.”
“네 방에 있는 탁상시계가 나까지 깨우더구만.”
“앗, 죄송합니다.”
“괜찮아. 이참에 정원 손질이나 하지, 뭐.”
간단하게 대화를 주고받은 윤옥은 자전거를 타고 배달 대리점으로 향했다.
그는 운동 겸 아르바이트로 아침마다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고 있었다.
덕분에 이웃 사람들과도 꽤 가까워졌고, 대화를 나누면서 영어 실력도 많이 늘었다.
“조, 오늘 개막전에 출전하지?”
“그건 경기 직전이 돼 봐야 알아요.”
“출전하겠지. 조는 우리 올덤의 주전 공격수잖아.”
조윤옥은 지난 시즌, 2월부터 올덤 애슬레틱에 합류했다.
빠른 스피드와 적극적이고 집중력 있는 그의 플레이는 팀의 공격에 무게를 더했다.
그 덕에 부진을 거듭하던 팀은 바닥을 박차 올랐고, 리그가 종료할 무렵에는 중위권인 12위까지 도약했다.
그렇다 보니 올덤 지역 축구 팬들은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를 부풀리고 있었다.
“오늘 홈 개막전 상대가 브랜드 포드 파크지? 응원 갈 테니까 열심히 해 줘!”
“예, 감사합니다!”
신문과 우유를 다 돌리고 나니, 하늘이 환해졌다.
오후 경기에 영향이 안 갈 정도로 조금 더 라이딩을 하기로 한 윤옥은 서쪽으로 자전거를 몰고 갔다.
그러다 맞은편에서 반가운 이들과 마주쳤다.
“오, 윤옥이잖아.”
“잘 지냈어요, 조?”
준영과 리즈.
이 커플도 자전거 라이딩을 아침 운동으로 하고 있었다.
“형님, 발목은 좀 어떠세요? 보기엔 많이 나아진 것 같은데…….”
“괜찮아졌어. 그러니까 자전거를 타고 다니지.”
준영은 지난 유럽 전지훈련 중에 발목 인대 부상을 당했다.
독일에서의 일정이 끝나고, 오스트리아에 갔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상대 팀인 비너 SC는 지난 시즌 유러피언 컵에서 대패했던 일을 벼르고 있었는지 무척 거칠게 나왔다.
준영은 첫 태클은 피했지만, 그 뒤에 에리히 호프가 또다시 태클을 날릴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 자식… 내가 패스한 뒤였는데도 그냥 갈겨 버리더군.”
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비매너 플레이.
격분한 맨유 선수들이 들고일어나면서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졌다.
단지 준영이 당한 것 때문이 아니다.
던컨이나 바비, 데니스 등 다른 선수들도 상대의 거친 파울과 견제에 단단히 열을 받은 상태였다.
가장 압권은 브라이언 클러프.
다들 삿대질이나 드잡이를 하는 와중에 그만 유일하게 상남자답게 에리히 호프의 죽빵을 날려 버렸다.
이 사건으로 비너 SC와의 2차전은 취소, 그리고 브라이언 클러프는 협회로부터 리그 5경기 출전 금지 처분을 받았다.
아무리 그래도 신사답지 못한 대처였기 때문이라고.
준영도 그리 좋게 보진 않았다.
“친선 경기였으니 망정이지, 리그에서 그랬으면 징계가 더 컸을 거야.”
“하지만 그 덕에 팀원들이 돈독해졌다면서요?”
리즈의 말대로 그 소동 때문에 신입 선수들과 기존 멤버들 간의 사이가 꽤 가까워졌다.
특히 비(Be)폭력주의자 브라이언 클러프와 알렉스 퍼거슨이 많이 친해져서 준영이 염려할 정도였다.
‘퍼기가 클러프에게 물드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아무튼 그때 부상을 입으면서 준영은 전지훈련에 제외되어 영국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부상이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고, 재활도 잘된 터라 오늘 개막전에 출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나이티드의 개막전이 웨스트 브롬위치 원정이죠?”
윤옥의 물음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시즌 5위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국대급 공격진인 데릭 케반과 바비 롭슨은 여전히 건재했기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새 시즌 첫 경기부터 만만찮은 상대군요.”
“힘든 경기가 될 것 같지만, 그래도 이겨야지. 첫 단추를 잘 꿰어야 남은 일정도 잘 소화할 수 있으니까.”
“안 그래도 우리 감독님도 그 소리를 하시더라고요. 첫 경기는 무조건 잡아야 한다고.”
“그래, 반드시 이겨라.”
준영과 윤옥은 서로의 선전을 기원하며 헤어졌다.
리즈는 올덤으로 돌아가는 윤옥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는 그사이에 더 의젓해진 것 같네요.”
“그러게. 작년에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애송이였는데, 이제 프로 선수 티가 나는 것 같아.”
그리 말한 준영은 리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왜 그래요? 혹시 얼굴에 뭔가 묻었어요?”
“그건 아니고, 우리 여왕님도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아리따워지셨구나 싶어서.”
준영의 말에 발그레하게 얼굴을 붉히던 리즈는 새침한 미소를 지었다.
“기사님, 갑자기 그렇게 아부해도 드릴 건 없답니다.”
“섭섭하시네.”
“그럼 나 먼저 갈게요.”
“아, 진짜 섭섭하게 그럴 거야? 잡히면 가만 안 둬.”
준영은 먼저 출발한 리즈를 쫓아갔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시즌.
그 먼 여정을 항상 함께하는 연인과 함께 나갈 준비를 마쳤다.
***
비브 앤더슨은 1978년 잉글랜드 대표팀 최초의 흑인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노팅엄에 있을 때 두 번이나 유러피언 컵을 들었고, 1987년에서 1991년까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도 뛰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전에 비백인 대표 선수로 앞서 소개한 프랭크 수나 폴 리니가 있었지만 이들은 혼혈이었고, 순수 흑인은 비브 앤더슨이 최초였습니다.
당시에도 인종 차별은 여전해서 경기 중에 날아온 바나나에 맞는 일도 있었고, 대표팀 발탁에 대해서도 탐탁잖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실력으로 인정받았고, 2004년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올라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