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44화 (244/400)

Round 244. 은밀하게 위대하게

‘이제 와서 생각하면 전부 한패거리가 아닌가 싶단 말이지.’

자신을 곤경에 몰아넣으려는 누군가의 음모가 아닌지?

하지만 증거는 없고, 결과적으로 플레밍에게 남은 건 막대한 도박 빚뿐이다.

‘그나저나 이제 좀 조용하군. 포기하고 돌아간 건가?’

슬쩍 창밖으로 내다보니 놈들이 타고 온 차도 보이지 않았다.

2시간 후, 완전히 마음을 놓은 플레밍은 외출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신문사 국장에게 돈을 좀 빌려서 한동안 멀리 떠나 있을 생각이었지만…….

“한참 기다렸습니다, 선생님.”

“허억!”

귀신같이 튀어나온 중절모 사내들을 본 플레밍은 화들짝 놀라 벌러덩 자빠져 버렸다.

“가, 가까이 오지 마! 경찰을 부르겠다!”

“거참, 우리가 무슨 짓을 하기라도 했답니까.”

말투에 폴란드 억양이 강하게 묻어 있는 금발의 사내는 플레밍을 일으켜 세워 주며 말했다.

“우린 그저 선생님이 갚지 않은 빚을 받으러 온 것뿐입니다. 신변에 위해를 가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네놈들 존재 자체가 내 심장에 나빠!’

내심 투덜거리던 플레밍은 이어지는 금발 사내의 말에 찔끔했다.

“그리고 경찰을 불러 봤자 곤란해지는 건 선생님이죠. 안 그렇습니까?”

“으윽…….”

이안 플레밍은 작가로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주색잡기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독자들은 많지 않다.

만약 이번 일이 언론의 도마 위에 올라간다면 평은 바닥까지 떨어진다.

이미 본가에서도 신사답지 못하다고 하여 의절까지 당한 판국인데, 팬들에게도 외면을 받게 되면 기댈 곳이 없다.

“이보게들, 한 번만 좀 봐주게. 그만한 거금이 갑자기 뚝딱 나올 리 없지 않나. 지금 날 닦달해 봤자 단돈 1페니도 나오지 않아.”

“나 이거야 원…….”

“차기작, 아니 다음 편이 출간되면 반드시 갚겠네.”

플레밍의 말에 금발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저희 사장님은 기한 내로 결과물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빚은 인세 수입으로 갚을 수 있는 금액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 전 재산을 압류해도 자네 사장이 빌려 준 돈은 갚지 못해.”

그리 말하는 플레밍은 투덜대고 있었다.

열성 팬이라는 놈이 작가를 등쳐 먹다니!

정말 그 사장이란 놈은 팬이 맞긴 한 걸까?

“휴우, 저희 사장님이 말씀하시길, 선생님의 채무 청산이 불가능하면 다음 조건을 제시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조건인데?”

금발은 가방에서 꺼낸 서류를 플레밍에게 보여 주었다.

“음, 이건…….”

“선생님 작품을 2차 창작물, 그러니까 연극이나 영화 따위로 만들 권리와 판권 수익을 저희한테 대부분 양도하는 겁니다.”

거기다 플레밍 작품의 캐릭터에 대한 권리도 넘길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건 좀…….”

“좀은 뭐가 좀입니까. 인세를 달라는 것도 아니고, 만들지 안 만들지도 모르는 영화나 캐릭터의 권리를 넘겨 달라는 건데 그리 아깝습니까?”

“그거야 알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인기 소설이 영상화되는 건 드물지 않다.

더구나 자신의 작품은 철저히 대중적이면서 오락 성향이 짙지 않은가.

그 권리를 포기하긴 아까웠다.

“할 수 없군요. 좀 시끄럽겠지만, 저희도 법대로 처리할 수밖에요.”

“이, 이봐, 기다려!”

시끄러워지면 플레밍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서둘러 정리하고 싶었던 플레밍은 결국 이 깡패 같은 놈들이 제시한 조건을 승낙하고 말았다.

이것이 머리를 스스로 쪼개는 어리석은 행동과 같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

***

독일 쾰른의 뮝게르스도르퍼 슈타디온.

새 시즌을 준비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첫 담금질이 이 경기장에서 시작되었다.

“들어가는 쪽으로 패스를 줘!”

“Jagen und aufhören!”

홈팀인 FC 쾰른은 붉은 저지를 걸친 맨유 선수들을 막아 내느라 진땀을 뻘뻘 흘렸다.

여러 차례 기회를 허용했지만, 그때마다 최후방 스위퍼인 칼 하인츠 슈넬링거가 걷어 내곤 했다.

그의 분전에 머피 코치와 버스비 감독은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저 슈넬링거라는 친구, 제법이군요.”

“그러게. 우리 팀에 수비수가 부족했다면 바로 영입하고 싶을 정도로군.”

현재 맨유에는 이준영을 필두로 빌 포크스, 조 캐롤런, 셰이 브레넌 등 좋은 수비수들이 많았다.

이번에 영입된 빌리 맥닐도 오늘 경기에 출전해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만 19세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안정적인 수비를 해내며, 유연한 발재간으로 공을 다루며 공격진에 정확한 패스를 밀어 주었다.

그 패스를 받은 브라이언 클러프는 슬쩍 공을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뒀다가 잽싸게 슈넬링거를 제쳤다.

그러곤 공의 방향만 살짝 바꾸어 골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잘했어, 브라이언.”

“잘난 척할 수준은 되는구만.”

브라이언의 선제골로 전세는 완전히 맨유 쪽으로 기울었다.

쾰른은 홈 관중들의 응원을 받으며 분전했지만, 전력 차이는 극심했다.

몇 차례 역습을 시도하긴 했지만, 미드필드에서 준영에게 끊겼다.

페널티 박스 안까지 밀고 들어갈 기회도 있었지만, 이것도 빌 포크스와 맥닐의 수비에 막혀 저지되었다.

‘맥닐 녀석, 확실히 쓸 만한걸. 몇 년 안에 주전 수비수 자리를 꿰찰지도?’

준영이 맥닐의 플레이에 감탄하는 사이, 전반전이 끝났다.

하프타임이 지나고 후반에 양 팀 모두 선수들을 대거 교체했다.

준영도 교체되어 그가 있던 자리에 짐 박스터가 투입되었다.

“간격 유지해! 상대에게 공간을 주면 안 된다고!”

“측면 뒷공간을 조심해!”

코칭스태프뿐만 아니라, 준영이나 고참 선수들도 지적과 독려를 아끼지 않았다.

대거 교체로 다소 어수선해지면서 양 팀 모두에게 기회가 생긴 상황.

이 와중에 마무리를 확실히 지은 건 맨유였다.

후반에 교체 투입된 데니스 로는 측면에서 존 레논이 올려 준 크로스를 칼날 같은 헤딩슛으로 날려 쾰른의 골대를 흔들었다.

최종 스코어는 2 대 0.

맨유는 전지훈련 첫 경기를 산뜻한 승리로 장식했다.

“다음은 뮌헨이지?”

“응, 거기서 TSV 1860인지 뭔지 하는 녀석들이랑 경기가 잡혀 있어.”

다음 날, 맨유 선수들은 비행기를 타고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의 대도시인 뮌헨에 입성했다.

쾰른에서도 그랬지만, 뮌헨에도 맨유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저게 유럽 챔피언 팀이구나.”

“키 큰 놈들이 많아서 그런가? 확실히 강해 보여.”

훈련장 펜스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달라붙어 구경했다.

그중 제법 체격이 좋은 소년은 선수들의 움직임과 발재간을 집중해서 관찰했다.

“아, 저런 식으로 순식간에 방향을 전환할 수 있구나!”

연방 감탄하며 지켜보던 소년.

그의 친구가 어깨를 툭 치며 불렀다.

“프란츠, 그만 가자. 잘못하면 지각할 거야.”

“잠깐만! 조금만 더 보고.”

유럽 최강팀 선수들의 테크닉을 구경할 기회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렇다 보니 프란츠는 펜스에서 쉬 떨어질 줄 몰랐다.

‘TSV 녀석들은 좋겠다. 유럽 최강팀이랑 경기도 해 보고.’

우리 팀도 우승, 아니 유러피언 컵에 출전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프란츠와 그의 친구가 몸담은 바이에른 뮌헨은 남부 오베르리가에서 2부 리그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다.

유러피언 컵보다 당장 승격이 급했다.

‘뭐, 지금은 무리지만 나중에… 내가 프로 선수가 되었을 때는 반드시 출전하고 말겠어!’

그땐 붉은 악마들을 이끄는 저 동양인처럼 프란츠 베켄바워의 이름을 유럽 전역에 알릴 수 있으리라!

자신이 활약할, 앞으로 몇 년 후의 미래를 기약하며 프란츠는 발걸음을 돌렸다.

***

TSV 1860 뮌헨과의 경기에서 버스비 감독과 머피 코치는 새로운 포메이션을 시험했다.

헝가리식 MM 전술을 응용한 것인데, 하프백 2명으로 수비를 두껍게 하면서, 3명의 공격수들을 전방보다 미드필드 쪽으로 내렸다.

최전방에는 몸싸움을 잘할 수 있는 장신 공격수와 결정력이 뛰어난 해결사를 콤비로 배치했다.

‘이거 3-5-2 포메이션이잖아.’

준영이 알기로 70년대에 브라질의 기술 축구에 대응하기 위해 독일에서 개발한 전술.

아마 레알 마드리드같이 강팀에 대응할 목적으로 생각해 낸 것 같았다.

‘단점이 없지 않지만, 일단 중앙으로 들어오는 공격에 대응하기 좋고, 전술적으로 단순해서 금방 숙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거기다 맨유에는 좌우 측면에서 활동량이 좋은 레이 윌슨과 던컨 에드워즈가 있다.

여기에 바비 찰튼은 플레이메이커로서 능력도 뛰어났다.

또 빌드업에 능하고 수비 지휘 능력도 좋은 준영도 3백의 센터백으로 최적.

쓸 만한 전술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TSV 1860 뮌헨과의 경기에서도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

좌우 측면에서 레이와 던컨이 왕성하게 뛰면서 날카로운 크로스를 올렸고, 이것을 알렉스가 헤딩슛으로 날리거나 데니스 바이올렛에게 기회를 만들어 줬다.

중앙에서는 바비 찰튼이 넓은 시야를 활용해 좌우 중앙으로 파고드는 동료들에게 정확한 패스를 보냈다.

“어째 유나이티드는 굉장히 쉽게 축구를 하는 것 같군.”

서독에서 유학 중이던 오카노 슈니치로는 오늘 경기를 보면서 탄성을 내뱉었다.

마치 어른과 아이의 시합을 보는 것 같았다.

그만큼 뮌헨은 피지컬이나 속도에서 맨유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빈틈을 노리고 반격을 시도했다.

전방의 공격 숫자를 늘리고, 맨유의 좌우 측면을 공략하는 대응을 시도했다.

하지만 득점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안 돼. 전술과 작전을 떠나서 선수들의 기본 기량에서 너무 차이가 나.”

포메이션에 앞서 선수들의 기량에서 차이가 나다 보니, 뮌헨의 공격은 번번이 실패.

이와 달리 맨유는 전반에 데니스 바이올렛이 두 골을 넣으며 앞서 나갔다.

후반전에도 공세가 이어지며 교체 출전한 짐 박스터의 골, 그리고 세트 플레이에서 준영의 헤딩골과 던컨의 중거리 슛이 터졌다.

그렇게 푸짐하게 골을 만들며 5 대 0의 대승을 거두었다.

경기장에서 나온 오카노는 돌아가는 길에 수첩에 적어 둔 오늘 경기 내용을 복습했다.

“역시, 체력이든 기술이든 선수의 기량이 어느 정도 수준은 되어야 뭐라도 해 볼 수 있군.”

일본 선수들의 기량은 유럽은커녕 아시아에서도 뒤처지는 수준이다.

블랙번에 있는 가와부치 사부로의 실력이 꽤 늘었다고 하지만, 선수 한둘 실력이 오르는 정도로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 축구협회나 우익 세력에선 더 많은 선수들을 유럽으로 보내려 애쓰고 있었다.

‘축구로 탈아입구를 해 볼 목적인가? 가와부치처럼 자리를 잡는 선수가 과연 몇이나 될 수 있을지?’

오카노는 이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가뜩이나 물도 얼마 없는데 말이다.

“아무튼 오늘 유나이티드의 전술은 단순하고 수비적으로도 효율적으로 보이는군. 이걸 우리 일본 축구에도 잘 적용할 수 있다면…….”

높으신 양반들의 기대와 달리, 당장 눈앞의 결과를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최소 10년, 아니 50년은 내다보면서 준비를 해야 한다.

이렇게 판단한 오카노는 열심히 보고 배우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

1. 바이에른 뮌헨 유스 시절의 프란츠 베켄바워(왼쪽)와 그의 친구들입니다.

베켄바워가 누군지는 다들 잘 알고 계실 테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

2. 앞서 나온 적이 있었던 오카노 슈니치로는 일본 축구가 도쿄 올림픽에서 8강,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는 데 공헌한 사람입니다.

당시 데트마어 크라머 기술 고문의 통역을 맡으면서, 해외에 근무 중인 도쿄대 인맥을 십분 활용해서 상대국의 선수와 전술 정보를 모아서 분석을 했다고 하지요.

티 안 나게 조용히 준비하는 이런 사람이 진짜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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