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42화 (242/400)

Round 242. 최고가 될 사나이

준영은 브라이언 클러프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언더독(Underdog)의 반란이 무엇인지 보여 준 명장으로 유명한 데다, 그의 일대기를 찍은 영화도 있으니까.

거기다 90년대 맨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주장 로이 킨의 은사이기도 했다.

‘문제는 다혈질이라 걸핏하면 주먹질도 하고 다녔다는 거지.’

그래서 어제 입단식에서도 자신의 면박에 발끈해서 달려들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브라이언의 낯빛이 굳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입단식이라 그런지, 아니면 기자들이 많아서인지 브라이언은 돌발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쉬 눈을 뗄 수는 없다.

그래서 머피 코치도 건방지기로 유명한 신참이 뭔가 사고를 치지 않을까 싶어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트러블은 일으키지 않고 있었다.

팀에 합류한 뒤 첫 훈련을 수행하며, 팀원들과도 곧잘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제 마찰이 일어났던 준영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이봐, 주장, 난 이런 방식의 스트레칭은 처음 해 보는데…….”

“웜업 프로그램이라고 하는 거야. 기억해 뒀다가 열심히 해.”

기초적인 워밍업에 각종 코어 운동을 통한 밸런스 단련, 여기에 신체를 정렬하는 관절 운동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게 도움이 되나?”

“그래. 근육이나 인대 부상 위험을 덜어 주지.”

“누가 그러는데? 감독이? 아님 코치?”

브라이언의 물음에 준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매번 팀에 새로 합류하는 선수들이 21세기의 훈련 방식을 접하고 나서 이런 식으로 묻곤 했다.

“나에게 축구를 가르쳐 준 분이 알려 준 거야. 지금은 이 세상에 없어.”

“그건… 유감이군.”

이 세상에 없다.

그 말이 죽었다는 게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거라는 걸 알면 브라이언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지만 굳이 털어놓을 필요가 없었기에, 준영은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비밀을 함구했다.

***

브라이언은 항상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런 자신감 덕분에 과감한 플레이를 할 수 있었고, 남다른 기량과 경험도 쌓았다.

실력이 높아지는 만큼 자존심도 올라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새가 창공을 날기 위해서는 열심히 날갯짓을 해야 하는 것처럼, 남몰래 땀방울을 쏟았다.

그렇게 애쓴 결과 풋볼 리그, 아니 유럽 최강의 구단에 들어올 수 있었다.

‘듣던 대로 다들 대단하군. 괜히 악마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어.’

첫 훈련에서 그들의 월등한 체력과 기량을 보고 놀랐다.

그중에서 던컨 에드워즈, 바비 찰튼, 그리고 존 Y. 리는 단연 으뜸이었다.

‘확실히 실력이 있어. 그러니 내 시시한 도발에도 간단히 받아칠 수 있었던 거고.’

브라이언은 어제 준영이 날린 팩트 폭력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준영 본인이나 맨유 선수들은 트레블 달성으로 실력을 증명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어떤가?

머저리 같은 수비수들 때문이라지만, 친정 팀에 우승이나 승격을 안겨 주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득점이라는 개인 기록에서도 리버풀에 있는 브라질 꼬마에게 뒤처진 게 현실.

그렇다 보니 기자들 앞에서는 몰라도, 자신이 달성하지도 못한 목표에 도달한 당사자 앞에선 큰소리를 칠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최고다. 그동안은 기회가 없었기에 정상에 올라가지 못했을 뿐!’

최강의 팀에서 최고의 동료들과 함께한다면 유럽, 아니 세계 정상에도 오를 수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했지만, 이해 못할 점도 있었다.

그 불만은 첫 훈련이 끝나고, 단골 클럽에서 환영식을 겸한 뒤풀이를 할 때 불거졌다.

“이봐, 신입, 뭐 불만 있어?”

던컨의 물음에 위스키 한 잔을 비운 브라이언이 대답했다.

“유럽 최강 팀이라기에 꽤 기대를 했지. 확실히 유니폼이나 훈련복, 축구화, 기타 지급되는 장비들도 다 좋아. 그런데 훈련장은 왜 그 모양이야?”

오늘 맨유의 훈련장을 본 브라이언은 혀를 찼다.

친정 팀인 미들즈브러의 훈련장도 이보다는 낫다고 생각되었기 때문.

“지금까지 다들 이런 데서 훈련을 했던 거야? 혹시 환경이 열악해야 실력이 올라간다는 멍청한 생각을 하는 건가?”

“거긴 임시로 빌려 쓰는 곳이야.”

숀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현재 올드 트래퍼드 필드랑 훈련장은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하고 있어.”

“뭔가 문제라도 생겼어요?”

“비가 많이 오면 배수가 잘 안 돼서 말이야. 난 딱히 상관없는데, 우리 주장은 진창에서 공을 차는 걸 싫어해.”

원정 경기는 어쩔 수 없지만, 홈에서도 논두렁 축구를 해서야 쓰겠는가!

이렇게 필드 문제를 지적했던 준영은 이번에 구단 임원들의 동의를 얻어 내 필드 보수 작업에 나섰다.

여기에 일전에 하드먼 회장에게 지적했던 여성 전용 화장실을 증설하는 공사도 함께 진행해 나갔다.

“주장이라 해도 일개 선수잖아요. 그런데 그 요청을 구단에서 승낙한다고?”

“다른 팀이라면 어림도 없지. 하지만 존은 꽤 손이 크거든.”

준영이 여러 가지 사업에 투자해서 크게 성공한 이야기는 언론을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쌓은 부로 구단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캡틴(Captain)이 아니라 보스(Boss)였던 건가.”

“지금은 싱어(Singer)지.”

브라이언은 클럽 무대에서 열창 중인 준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음악은 잘 모르지만, 능숙하게 기타를 다루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상당히 근사해 보였다.

“축구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군.”

브라이언의 말에 던컨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뭐, 못하는 것도 많아. 포커는 호구에 낚시 가서는 하루 종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지.”

“덩치에 안 맞게 술도 약하고.”

“잔돈 계산도 서툴더라고. 전쟁 때였으면 스파이라고 당장 잡혀갔을걸.”

“솔직히 그건 나도 헷갈린다고요. 펜스에 실링, 파운드, 기니, 크라운… 단위마다 기준이 제각각이잖아.”

팀원들과 어울려 준영의 흉(?)을 듣고 있던 브라이언.

그에게 던컨이 잊은 것이 있다는 듯 말을 전했다.

“아 참, 신입, 여권을 준비해 둬. 얼마 후에 해외 전지훈련을 갈 거니까.”

“해외라면 어디로?”

“올해는 독일부터 갈 거야. 그다음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 남부를 순회하기로 되어 있어.”

전지훈련 겸 초청 친선 경기를 치르면서 구단은 수익을 올리고, 선수들은 팀워크를 맞출 계획이었다.

“재밌겠군. 역시 챔피언은 달라.”

“주전 경쟁에서 뒤처지면 재밌다는 소리도 나오지 않을걸.”

던컨의 말에 브라이언은 자신감 어린 미소를 지었다.

“내가 뒤처질 거라 생각해? 두고 보라고. 나랑 같은 포지션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길 테니.”

“훗, 배짱 한번 두둑한걸.”

“자, 콧대 높은 신입을 위해 한 잔 내지.”

“나도 내겠어.”

저마다 한 잔씩 따른 위스키 잔들이 줄지어 브라이언의 앞으로 전달되었다.

하지만 브라이언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잔을 쭉쭉 비워 나갔다.

심지어 두 번째로 전달된 술잔들도 죄다 위장으로 털어 넣었다.

“앞으로 똑똑히 보라고. 이 브라이언 클러프 님이 최고가 될 테니까!”

“하하, 이 녀석, 취했구만.”

얼굴만 보면 확실히 취했다.

하지만 취중진담을 내뱉는 브라이언의 눈빛은 뜨겁고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

2028년, ‘Football, The Great Player’를 제작 중인 BBC 다큐멘터리 촬영팀은 벨파스트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들이 만난 사람은 1963년부터 1980년까지 맨유에서 뛰었던 윙어 조지 베스트였다.

이름처럼 최고의 활약을 보여 줬던 레전드 플레이어.

그는 어린 시절 처음으로 맨유 관계자들과 접선했을 때를 회고했다.

“그땐 정말 깜짝 놀랐지. 내가 응원하러 온 팀에서 날 보러 찾아왔으니까.”

1957-58 시즌 맨유는 기적과 같은 유러피언 컵 우승을 거두며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그 결과 맨체스터 지역 주민이 아니라도 그들을 동경하고 응원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소년 조지 베스트도 그런 팬 중의 하나였다.

“벨파스트에서 내가 좀 유명하긴 했지만, 설마 그쪽에서 날 찾아올 줄은 정말 몰랐다고. 어떻게 알았냐고 하니까 캡틴 리가 날 추천했다고 그러더군.”

조지 베스트의 놀라운 잠재력을 파악한 맨유 구단에서는 곧장 그와 유소년 계약을 맺었다.

그러고는 그의 가족들도 모두 맨체스터로 데려왔다.

“그때 이사했던 곳이 캡틴 리가 살던 마을이었어. 주장은 나에게 있어 정말 삼촌 같은 사람이었지. 날 정말 잘 보살펴 주고,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어.”

“존 Y. 리가 은사였다는 말입니까?”

MC의 물음에 조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앞서 말했듯이 주장은 삼촌 같은 사람이었고, 날 가르쳐 주신 분은 따로 있었어. 저기 저분이지.”

조지는 벽 한편에 걸린 사진을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그 사진에는 공을 트래핑하는 낯선 동양인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Kim 선생님은 한국에서 오신 분인데, 당시에 유나이티드에서 지도자 연수를 하면서 어린 선수들의 관리를 돕고 있었어. 정말 축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셨지.”

조지는 그가 매우 성실하고 도덕적인 인물이었다고 했다.

아이들이 축구를 잘하기에 앞서 성실한 학생이 되도록 지도하고, 어른들이 즐기는 술과 담배 등도 손대지 않게 단속했다고.

“솔직히 어릴 때 나는 모범생이랑 거리가 멀었어. 걸핏하면 학교 수업을 빼먹고 불량아들과 어울려 지냈으니까. 그건 맨체스터에 와서도 마찬가지였지.”

“그랬는데, 저 Kim이라는 분이 다잡아 주었다는 겁니까?”

“음, 주장도 많이 꾸짖긴 했지만, Kim 선생님만큼은 아니었어. 내가 농땡이를 부릴 때마다 찾아다니면서 다그치셨지.”

“어떻게요?”

“한번은 이렇게 꾸짖으셨어. ‘조지, 너에겐 최고(Best)가 될 재능이 있어. 하지만 최악(Worst)이 될 기질도 있지.’라고…….”

그 말을 실감하게 된 것은 15살 때였다.

베리 FC 유소년 팀과의 경기에서 대패를 하고 만 것.

“그때 난 한 골도 넣지 못했어. 상대 팀에 콜린 벨이란 녀석이 있었는데, 그놈에게 철저히 당했지.”

콜린 벨이라는 이름에 MC가 감탄을 내뱉었다.

“오, 콜린 벨이라면 맨체스터 시티의 레전드 아닙니까? 대영제국 훈장도 받았고요.”

“그랬지. 하지만 그땐 정말 듣도 보도 못한 놈이었다고. 그런 녀석에게 대망신을 당한 거야.”

당시 여러 팀들이 맨유나 존 Y. 리의 훈련과 선수 육성 프로그램을 훔쳐 배우고 있었다.

콜린 벨은 바로 그 프로그램으로 키워진 선수였고.

“그때 알게 되었지. 선생님 말씀대로 정말 열심히 하지 않으면 베스트가 아니라 워스트가 되겠구나, 라고 말이야.”

개과천선한 소년 조지는 캡틴 리와 김 선생의 지도 아래 올바르게 성장해 나갔다.

그리고 17년간 맨유의 측면 공격을 이끌며, 발롱도르와 대영제국 훈장도 받았다.

“애송이 조지가 늙은 조지가 되는 동안 많은 선수들을 봐 왔어. 나처럼 재능 있는 선수들이 술과 여자, 약물에 무너지는 모습도 많이 봤지.”

제대로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패배에서 깨닫지 못했다면 그들처럼 되었으리라.

조지 베스트는 그 점에서 항상 캡틴 리와 김 선생님께 감사하고 있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감사의 인사라도 할 텐데…….”

아쉽지만, 지금은 그저 추억을 곱씹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

브라이언 클러프나 조지 베스트나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하다 죽었죠.

조지 베스트의 경우엔 이렇게 망가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무너졌었고요.

바비 무어 역시 알코올 중독까지는 아니지만, 술을 즐겨 마시다 대장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지나친 음주의 말미는 좋지 않다는 걸 보여 주는 예라고 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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