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40. 뿌리
해변이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한 아담한 별장.
이번 휴가를 위해 프레드로 일가가 숙소로 빌린 곳이다.
이곳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오드리는 빼빼Ro 이후 새로운 문물을 경험했다.
“말도 안 돼. 마요네즈에 옥수수, 치즈… 거기에 야채 조금 가미했을 뿐인데 이런 기가 막힌 맛이 난다니!”
“저희도 첨 먹었을 땐 깜짝 놀랐어요. 흔한 재료들인데, 왜 이런 레시피를 몰랐던 건지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이걸 존이 만들었단 말이지? 존은 정말 축구뿐만 아니라 요리도 잘하는구나.”
저녁 식사로 준영이 내놓은 요리 중엔 갈비찜이나 다른 요리들도 있었지만, 오드리는 콘치즈를 제일 좋아했다.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 리필을 또 요청했을 정도.
바로 프라이팬에서 콘치즈를 덜어 준 준영은 오드리에게 물음을 건넸다.
“헵번 씨, 아니 오드리 누님, 아까 낮에 물어보려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피하느라 미뤘는데요. 절 닮았다는 그 아이, 이름이 뭐였습니까?”
“이름? 그러니까 캉욘이라든가, 캉얀이라든가 그랬지.”
분명하진 않았지만, 오드리가 말한 이름은 실제 할아버지 성함과 비슷했다.
이건 나중에 이억관에게 물어봐야 할 듯싶었다. 필립의 친구라니 본명을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그 정도로 닮은 걸 보면 남남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먼 친척인 거 아니야?”
“글쎄요. 생각보다 가까울지도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자신은 할아버지를 쏙 빼닮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필립의 친구라는 저 소년은 할아버지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존은 한국계 홍콩인이라고 했지? 어쩌다가 한국에서 홍콩까지 가게 된 거야?”
“글쎄요…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제 의사가 반영된 건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래도 지금 와서 보면 잘된 거지만요.”
준영이 자세히 언급하지 않고 넘어갔지만, 오드리는 딱히 캐묻지 않았다.
그녀도 어린 시절에 세상이 얼마나 미쳐 있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 광적인 전쟁에 휘말린 기억은 최대한 들추지 않는 게 좋았다.
“아무래도 실례되는 질문을 해 버린 것 같네. 미안해.”
“아뇨. 괜찮아요.”
이후로 오드리는 준영이 불편해할 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냥 늦게까지 영화나 자선 활동 등의 다른 주제들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가 떠났다.
***
“오늘 저녁 식사에 초대해 줘서 고마워. 다음에 기회가 되면 내가 대접할게.”
“네, 누님. 다음에 또 뵙죠.”
준영은 리즈와 함께 멀리까지 나와 오드리를 배웅해 주고 다시 별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돌아오는 중에 그는 아까 오드리가 보여 준 사진과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정말이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거참, 설마 할아버지가 필립이 친구였을 줄이야.”
“한국에 갔을 때 만날 수도 있었던 거네요. 근데 정말 준의 할아버지가 맞아요?”
세상엔 남남이지만 빼닮은 사례도 존재했다.
그래서 리즈는 의문을 가졌지만, 준영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성함이 오드리 누님이 이야기한 거랑 비슷해. 거기다 용모까지 나랑 똑같으니 이건 뭐 빼박이지.”
“그래요? 혹시 한국에 가서 만나 볼 거예요?”
분명히 한국에 가려고 하지 않을까.
리즈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의외로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부러 만나는 건 안 좋다고 생각해.”
“어째서요?”
“일단 만난다고 해도 마땅히 할 말도 없거든.”
‘너는 장차 내 할아버지가 될 거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냥 대충 먼 친척이라며 둘러대는 게 고작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할아버지의 인생에 개입해서 영향을 끼치게 되면, 지금 내 존재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해.”
“그렇군요. 준은 미래에서 왔으니까…….”
단순한 호기심으로 인한 만남으로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면?
그럼 아버지도 태어나지 못하고, 준영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사실 리즈가 걱정할까 봐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1월에 한국에 가기 전에 이상한 꿈을 꾸었어.”
미래 북미 월드컵에 출전했을 때의 일.
실제와 달리 꿈에서는 골을 넣고 갑자기 소멸해 버렸다.
“그 꿈에서 루이스 대령님을 봤어. 굉장히 걱정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시더라고.”
“그럼… 아버지가 꿈을 통해 경고를 해 준 거란 말인가요?”
“응. 아마 한국에 가면 네가 위험할 수 있다고 일러 주신 게 아닌가 싶어.”
그때 할아버지를 만났다면? 할아버지의 인생에 영향을 끼칠 만한 일을 했다면?
꿈에서 그랬듯, 모래처럼 부스러져 사라졌을지 모른다.
이런 준영의 주장에 리즈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의견을 밝혔다.
“괜찮지 않을까요? 우리 세계는 준이 온 세계의 과거랑 좀 다른 점이 있다면서요. 레논이나 숀 씨가 축구를 한다는 것도 그렇고.”
“평행 우주라는 건가? 확실히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긴 한데…….”
“더구나 이미 실제 역사랑 바뀐 것도 많잖아요. 준이 바꾸기도 했고, 준의 영향으로 바뀌기도 했고 말이죠.”
확실히 뮌헨 비행기 사고의 결과는 실제 역사와 달랐고, 잉글랜드는 8년 일찍 월드컵에서 우승을 거뒀다.
거기다 유럽 클럽에서 뛴 적도 없는 펠레가 리버풀에 입단하기도 했다.
축구뿐만 아니라 국제 정세도 그랬다.
미국은 쿠바 혁명에 대해 사실상 묵인했고, 피델 카스트로도 시장 경제를 유지하며 개혁을 진행하겠다고 발표, 소련과 외교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이미 역사는 준영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할아버지 인생이 바뀐다고 해도, 다른 우주에서 온 준의 존재에 문제가 되진 않을 거라고 봐요.”
“그렇다면 다행인데…….”
꿈에서 루이스 대령이 해 준 경고가 마음에 걸렸다.
평행 우주고, 리즈의 말대로 아무런 상관도 없고, 문제가 안 된다면 굳이 경각심을 세워 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정 그렇게 안심이 안 되면 한국에 있는 리 셰프, 아니 리 사장님에게 지켜봐 달라고 요청하세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하지만 그런 조치도 나중에 뭔가 큰 문제를 야기하는 건 아닐지?
나비 효과라는 이론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것도 신경 쓰고 저것도 신경 쓰다 보면 결국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에 일단 이억관에게 부탁해 두기로 마음먹었다.
***
“안녕하세요, 아저씨.”
“음, 강윤이 왔냐?”
회사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이억관은 아들 필립과 숙제를 하고 있던 이강윤을 보았다.
처음에 필립이 학교 친구라며 집에 데려와서 소개했을 때 깜짝 놀랐다.
필립이 학교에 준영과 닮은 친구가 있단 얘기를 한 적이 있지만, 이 정도로 빼닮았을 줄은 몰랐으니까.
‘준영의 아들… 일 리는 없고, 혹시 친척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준영에게 연락이 왔다.
오드리에게서 강윤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며, 친척이 맞으니 지켜봐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근데 왜 강윤이에게 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한 걸까?’
이런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갔다.
유명한 사람의 친척입네, 지인입네 하고 으스대며 못된 행실을 하는 자들이 있었으니까.
어쩌면 준영도 그 점을 우려하는 걸 수도 있다.
실제 대통령의 양자인 이강석의 행실이 안하무인이라 이승만이나 친부 이기붕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일단 착실한 녀석 같은데…….’
강윤의 집은 부유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빠듯한 수준도 아니었다.
필립의 말을 들어 보면 성적은 평범하고, 달리기나 운동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걸 보면 확실히 준영의 친척이 맞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 숙제하기 싫다.”
“싫어도 어떡하냐. 내일까지 끝내지 않으면 선생님한테 혼난다고.”
아이들이 무슨 숙제를 하는 걸까.
이억관은 궁금해서 녀석들이 하는 걸 바라보았다.
신문의 기사를 잘라서 공책에 붙여 스크랩을 하고, 기사에 대한 감평을 적고 있었다.
“많이 힘드냐? 아저씨가 도와주랴?”
억관의 말에 강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힘든 건 아닌데 뭐랄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래? 의욕이 들지 않는 이유가 뭐냐?”
마땅한 이유를 대지 않으면 엄히 호통을 쳐 줄 테다.
그리 마음먹고 있던 억관은 이어지는 강윤의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
“신문 기사에 대해 평가해 보는 것 자체는 재밌어요. 근데요, 선생님이 스크랩하라고 그러는 기사가 순 대통령 할아버지 관련된 것밖에 없어요.”
“뭐? 그게 정말이냐?”
“예, 그것도 비판하는 기사는 모으지 말래요. 대통령 할아버지 욕하는 놈들은 다 빨갱이래요.”
오로지 대통령과 정부의 치적과 관련된 기사만 모아서 감평을 적으라고 했단다.
교사가 그런 편향적인, 더구나 지극히 정치적인 목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다니!
“근데 어른들 얘기를 들어 보면 대통령 할아버지가 잘못하고 있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다들 많이 힘들대요. 그 사람들도 전부 빨갱이인 거예요?”
“그렇진 않지. 너희 선생님은 아무래도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 같구나.”
해방 직후에 그런 이들을 많이 봤다.
조금만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주장을 하면 빨갱이라는 둥, 반동이라는 둥 떠들면서 비판과 총질을 해 대곤 했다.
한때 일제라는 거대한 적을 상대로 함께 싸웠던 동지들에 대해서도 예외는 없었다.
‘그런 행태가 한심하고 답답해서 이 나라를 떠났건만…….’
해방 이후 십수 년이 흐른 지금도 그런 자들은 여전히 득세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제는 자라나는 세대에게도 극단적인 관점을 강요할 줄이야!
“강윤아, 네 불만은 지극히 당연하다만, 드러내지 않는 게 좋을 게다.”
“어째서죠? 선생님이 힘이 세서요?”
“그래, 선생님이나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이 만만치 않지. 자칫 너뿐만 아니라 네 가족과 주변 사람들까지 몹시 힘들어질 수 있단다.”
“으…….”
불만스럽게 인상을 찡그리는 강윤에게 억관은 보다 희망적인 얘기를 해 주었다.
“뭐, 그래도 그들도 오래가지는 못할 게다. 한쪽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자신이 늪 속으로 걸어가도 모르니까.”
도중에 늪에 빠졌다는 걸 깨닫기도 하지만, 그땐 발을 빼기 너무 늦었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고, 깊이 빠져 버렸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조용히 참고 기다리렴. 기다리다 보면 좋은 날이 올 테니까.”
“정말요?”
“그럼. 좀 더 좋은 날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땅을 일구며 묵묵히 재건에 힘쓰는 국민들, 회사를 세우고 미래를 향해 나가는 기업인들, 자유당의 독재에도 굴하지 않고 소신 있게 목소리를 높이는 정치인들.
거기다 나라 밖, 저 멀리 지구 반대편에서는 편견에 맞서 영광을 쟁취하고 많은 이들에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 주는 선수도 있었다.
“작은 돌 하나로는 강물에 쓸려 갈 뿐이지. 하지만 수많은 돌이 모여 쌓이면 거대한 물줄기도 바꿀 수 있는 법이야.”
억관의 이야기에 강윤은 물론, 필립도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살아갈 아이들.
부디 좌절하지 말고, 세태에 영합해 주저앉지 말기를.
억관은 먼 길을 걸어 나갈 아이들의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
1. 횟집에서 사이드 메뉴로 곧잘 나오던 콘치즈가 실은 국산 레시피였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죠.
저도 무척 좋아합니다만, 자주 먹진 못합니다. 체중 조절해야 하기 땜시로. OTL
2. 우리나라의 발전을 두고 미국이 돈 퍼 줘서다, 대통령이 잘해서다, 국민성이 좋아서다, 라고 이리저리 주장합니다만, 다 복합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에도 언급했지만, 돌멩이 하나로 강줄기를 바꾸는 건 힘드니까요.
20년간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고도 도로 아미타불이 된 중앙아시아 어떤 나라를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