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39화 (239/400)

Round 239. Channel Holiday

프랑스 노르망디 서쪽 바다.

이곳에는 영국 왕가의 직할령인 채널 제도가 있다.

쌀쌀하고 습한 영국 본토와 달리 이곳은 연중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기에 예로부터 휴양지로 유명했다.

“우와! 오빠, 저것 봐. 해변이 하얗게 빛나고 있어.”

“그래, 예쁘구나.”

새하얀 백사장의 풍경을 보고도 준영은 덤덤한 기색을 보였다.

아니, 뭔가 맥이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앤지와 리즈는 조금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형부는 여전히 기운이 없네.”

“그럴 수밖에. 시험을 망쳤으니까.”

트레블을 달성하고 당당히 개선한 준영은 코앞으로 다가온 대입 시험 준비에 돌입했다.

여전히 완고한 알버트에게서 리즈와의 관계를 제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합격은 필수.

그러나 학력 인증 시험과 대입 시험의 난이도는 넘사벽 수준으로 달랐다.

결국 시험은 망쳤다. 아직 성적 발표는 되지 않았지만, 문제를 절반 이상 풀지 못했으니 결과는 뻔했다.

‘쉽지 않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설마 그 정도일 줄이야.’

이번 시험은 언론에서도 주목하고 있었다.

트레블에 성공한 거인이 대학이라는 관문도 넘을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라면서.

‘그 작자들, 내가 낙제했다는 거 알면 신나게 까대겠지?’

준영은 몇몇 기자들이 자신을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낙제 사실이 알려지면 조롱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축구나 하지 왜 대학에 기웃거리냐는 둥, 시건방 떨다 꼴좋게 됐다는 둥.

물론 무슨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대입이 쉬운 게 아니니 그다지 논란이 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언론이야 무시하면 그만.

다만 리즈와 관계가 깊어진 걸 탐탁잖아 하는 알버트에게 당당하게 좋은 결과를 보여 주지 못해 아쉬웠다.

그렇다 보니 모두와 함께 아름다운 남쪽의 휴양지에 와도 기분이 쉬이 풀리지 않았다.

“너무 실망하진 말게. 시험이야 내년에 또 치면 되니까.”

준영의 옆자리에 파라솔을 펼친 알버트가 위로하듯이 말했다.

“비록 결과가 시원찮긴 했지만, 정진하는 자세는 좋았어. 노력해야 결과를 이뤄 내는 법이니.”

그 말에 준영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럼 리즈와의 관계를 인정해 주시는 겁니까?”

“내가 좀 투덜대긴 했어도 딱히 훼방을 놓은 것도 없지 않나. 자네가 계속 신사답게 정진한다면 인정 못할 것도 없지.”

알버트는 신사라면 지덕체(智德體)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풍부한 지성과 올바른 도덕, 그리고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어야 어엿하고 나무랄 데 없는 인물이라 할 수 있으니까.

그런 인물이라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를 얼마든지 맡길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덤으로 재력도 있으면 삶도 윤택할 터.

“자네는 건강하고, 행실도 바른 사람이지. 사업도 착실하게 성공해서 부도 쌓았고……. 거기다 2년 사이에 영국인들이라면 누구나 알 정도로 명성도 얻었어.”

“남은 것은 지성이라 이거군요.”

“맞아. 풍부한 지성을 갖춰야 정확한 분석과 판단을 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아. 다시 말해 고생을 안 한다는 소리지.”

‘고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핵심이로군.’

자신이 고생하면 리즈도 근심과 고난을 겪게 된다.

결코 그런 상황을 원치 않는 알버트는 준영에게 계속 분발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준영은 그의 심정과 고집을 백분 이해했다.

자신이 알버트의 입장이라도 자식과 손주들이 고생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 때문에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를 하는 게 사실이고 말이야.’

북해 석유라든가, 강남땅이라든가, 인재 양성이라든가.

이는 단순히 은퇴 후 자신이 거둘 결실이 아니라, 후손들이 누릴 것이기도 했다.

“나 같은 늙은이가 오래 살아 봤자 앞으로 10년, 아무리 길어도 20년이 한계겠지. 그 뒤로 이 집안을 맡길 만한 사내는 자네 말고는 없어.”

“그렇게 믿어 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마워해야 하는 건 나라네, 존.”

아들 루이스가 먼 미래에서 보내 준 청년.

뜻하지 않은 상황에 좌절하거나 빗나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으며 주변 사람들을 보살펴 왔다.

루이스가 부탁한 대로 준영은 정말 ‘모두를 구해 낼 인물’ 같았다.

프레드로 가문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리고 그와 연이 닿은 수많은 사람들까지도.

“근데 한 가지만 부탁하겠네. 자네는 미래의 사람이니 나 같은 늙은이와 가치관이 다를지 모르겠지만…….”

“어떤 거 말입니까?”

준영은 무리한 부탁이라도 들어줄 생각이 있었다.

자신이 21세기에서 왔어도, 지금은 20세기 중반이니까.

“내가 젊을 때 아버지께 들은 충고야. 면허 없이 운전하는 일이 있어도 절대 속도위반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지. 자네도 이 점은 따라 줬으면 하네.”

“속도위반이라면… 아, 예! 주의하겠습니다.”

무슨 말뜻인지 금방 이해한 준영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21세기의 대표팀 동료 중에서도 ‘과속 스캔들’을 일으킨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기자들에게 걸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지금이라고 다르진 않을 터.

아니, 가치관이나 규범이 다른 이 시대는 더 심할지 모른다.

그러니 그런 일은 최대한 피하리라 다짐했다.

***

준영 일행이 온 백사장은 섬 한쪽 귀퉁이에 자리한 곳으로, 아는 사람만 아는 명소였다.

그렇다 보니 사람도 별로 없었다.

알버트가 느긋하게 일광욕을 즐기는 사이, 준영과 리즈는 수영복 차림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마치 지중해 바다 같군.”

투명한 바다에 몸을 담근 준영은 21세기 모나코의 해변을 떠올렸다.

거기 바다 풍경도 아름다웠지만, 이곳 채널 제도도 만만찮았다.

아니, 더욱 돋보이고 아름다워 보였는데, 준영은 그 이유를 금방 깨달았다.

바로 주인공의 유무 때문.

준영의 시야에 비친 그 주인공은 바로 리즈였다.

“와, 생각했던 것보다 물이 차가워요.”

“그러게. 깊이 들어오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이유를 알겠어.”

제일 먼저 물에 뛰어들었던 카린은 모래성을 건설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고, 앤지는 화보를 촬영하듯이 한가로이 해변을 거닐기만 했다.

“저쪽에 있는 바위섬까지 누가 먼저 가는지 아이스크림으로 내기해 볼래요?”

“내기할 것까지 있나. 내가 이길 텐데.”

“피,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거라고요.”

준영과 리즈는 백사장에서 수십 미터가량 떨어져 있는 작은 바위섬을 향해 헤엄쳐 갔다.

‘확실히 생각만큼 쉽지 않군.’

밀려오는 파도를 헤치며 전진해야 하다 보니 꽤 힘이 들었다.

놀랍게도 준영보다 리즈가 훨씬 앞서 나가면서 바위섬에 도착했다.

“파도를 이기려고 하면 안 돼요. 피해 가야지.”

‘그렇군. 잠영으로 나간 건가.’

물밑으로 헤엄치면 파도의 저항을 덜 받으니 그만큼 빨리 전진할 수 있다.

숨을 오래 참을 수 있으면 잠영이 가장 효율적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튼 내기에 졌으니 아이스크림 쏴요.”

“그래. 일단 해변으로 돌아가자.”

다시 백사장으로 돌아간 두 사람은 대강 겉옷을 걸치고 가까운 거리로 향했다.

“뭔가 군사 시설 같은 게 많군.”

준영이 길가에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을 바라보자, 리즈가 설명해 주었다.

“지난 전쟁 때 독일군이 점령해서 섬을 요새로 개조하려 했대요. 영국 왕실령이니까 반드시 되찾을 거라 봤던 거죠.”

하지만 정작 연합군은 이 작은 섬들을 무시하고는 노르망디로 바로 상륙해 버렸다고.

“거하게 삽질을 한 거구나.”

“그래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투는 없었으니, 독일군들이나 섬 주민들 입장에선 다행이었죠.”

산책하듯 얼마쯤 걸어가자, 마을 거리가 나타났다.

거리에는 아까 준영 일행이 지나쳤을 때보다 많은 인파가 북적이고 있었다.

항구에 큰 배가 정박한 걸 보니 새로 관광객들이 많이 들어온 듯했다.

그런데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관광객들이 쓰는 언어는 영어가 아니었다.

“프랑스 사람들이군.”

“이곳 채널은 영국 왕실령이지만, 프랑스 땅이랑 더 가까우니까요.”

그런데 영국인이든 프랑스 관광객이든 공통점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준영을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앗! 존 Y. 리다!”

“맞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캡틴 리야!”

“와, 여기서 보다니……!”

월드컵과 유러피언 컵에서의 활약 덕분에 준영은 유럽 본토에서도 얼굴이 꽤 알려져 있었다.

당연히 프랑스 사람들도 알았다.

특히 이번 달 초에는 스타드 드 랭스를 쓰러트리고 트레블을 달성하면서 프랑스 언론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사인 좀 부탁해요!”

“같이 사진 좀…….”

몰려드는 사람들의 요청에 준영과 리즈는 한동안 거리 한복판에서 정체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부 여성들은 아주 노골적으로 들이댔다.

그 바람에 준영은 여왕님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건 아닌지 눈치를 봐야 했다.

“다음엔 변장 도구 같은 거라도 챙겨야겠어.”

“후훗, 소용없을걸요. 준은 너무 눈에 띄니까.”

“거참, 키를 줄일 수도 없고…….”

최대한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이동한 끝에, 마침내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가게 앞에서 뜻밖의 인물을 보게 되었다.

***

“어머, 이게 누구야. 존이랑 리즈잖아!”

“헵번 씨?”

준영과 리즈를 알아보고 반갑게 말을 건네는 여인은 바로 오드리 헵번.

베일이 있는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기에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다.

“쉿! 목소리 낮춰. 사람들 눈에 띄면 곤란해진다고.”

“아차, 그렇죠.”

준영은 냉큼 아이스크림을 사서 사람들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누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헵번 씨?”

영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이스크림을 맛보던 오드리 헵번은 리즈의 물음에 서운한 기색을 보였다.

“헵번 씨가 뭐니.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그냥 언니라고 하라니까.”

“네, 언니. 근데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영화 촬영 때문에?”

오드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기분 전환이나 할 겸 여행하다 들른 거야. 촬영이면 예전에 끝났지. 아마 곧 있으면 개봉도 할걸.”

“그래요? 어떤 내용인데요?”

“그냥 어떤 맘씨 좋고 심지가 굳은 수녀님 이야기야.”

그리 말하는 오드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과로로 쓰러질 정도로 고생하며 찍은 작품인데, 대중이 그다지 호응을 할 것 같지 않았으니까.

이미 전작도 흥행에 실패했다 보니 심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데 리즈는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졌네.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 거야?”

“딱히 비결이라곤……. 그냥 준이 가르쳐 준 대로 운동이랑 테니스를 열심히 했어요.”

“흐음,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은근한 웃음을 지으며 준영과 리즈를 번갈아 보던 오드리.

그러다 뭔가 생각난 것이 있던지 박수를 쳤다.

“아 참, 나 얼마 전에 한국에 또 다녀왔어. 이 사장님이 강남이란 곳에 빈민들을 위한 마을을 짓는다고 해서 보러 갔었지.”

“혹시 이상한 놈들이 영화 찍자는 소리는 안 하던가요?”

준영은 올 초에 한국에 갔을 때 임화수가 주절대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래서 물어본 것인데, 오드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몰래 다녀온 거라 다들 나 온지도 몰랐어. 영화 쪽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고.”

“그랬군요.”

“그보다 존, 나 존이랑 닮은 아이를 봤어. 이 사장님 아들이랑 친구라던데…….”

그러면서 오드리는 한국에 갔을 때 찍었던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 사진을 본 준영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오드리가 필립과 찍은 사진에 있는 또 다른 인물.

그 아이는 정말 자신과 붕어빵처럼 닮아 있었다.

***

1959년 6월에 개봉한 오드리 헵번의 영화가 바로 ‘The Nun’s Story’입니다.

실존 인물의 일화를 바탕으로 한 1956년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인데, 우리나라에서는 ‘파계’라는 제목으로 개봉했지요.

이 작품은 흥행 부진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성공을 거둘 정도로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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