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35화 (235/400)

Round 235. 상처 입은 호랑이

‘동양인의 몸 상태에 문제가 생겼다!’

준영의 이상을 눈치챈 건 푸스카스뿐만이 아니었다.

디 스테파노를 비롯한 레알 공격진 전원이 그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알아챘다.

“녀석에겐 불행이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그렇죠. 승부는 냉정한 법이니까.”

선제골을 넣고 주도권을 잡은 레알 마드리드는 계속 준영이 있는 쪽으로 돌파와 패스를 시도했다.

뇌진탕 쇼크로 판단이나 대응력이 무뎌진 준영은 레알의 집중 공세가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헤딩이나 인터셉트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상대 공격수의 돌파에도 쩔쩔맸다.

“저 5번, 왜 저러지?”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된 것 같군.”

“아마도 매직 마자르의 캡틴이 건 저주에 걸려든 모양이야.”

대다수 관중들은 준영이 쩔쩔매는 모습을 보며 반색을 했다.

던컨과 빌 포크스가 준영이 실수할 때마다 커버를 해 주었지만, 이미 균열이 일어난 수비 라인을 수습하기는 너무나 버거웠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생각했던 것보다 존의 상태가 나빠. 이대로 두면 금방 또 실점을 하고 말 거야.”

“포지션을 바꾸는 게 최선이겠죠.”

맷 버스비 감독과 지미 머피 코치는 서둘러 대처에 나섰다.

하프백인 로니 코프를 내리고 준영을 앞쪽으로 전진시킨 것.

이런 대응은 리그에서 준영의 공격력을 활용하기 위해 써 봤던 적이 있었다.

“흥, 부실해진 아랫돌 대신 윗돌을 빼서 박아 넣은 건가?”

“그 정도로 우릴 막을 순 없어.”

로니 코프는 앞서 준영보다 침착하게 플레이를 했지만, 연달아 레알 공격수들의 돌파와 패스가 들어오자 진땀을 쏟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광경을 보던 영국인 취재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밸런스가 중요한 거지. 유나이티드는 그 점에서 완전히 흐트러졌어.”

“균형이 무너졌다고요?”

옆에 있던 후배 기자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돌벽을 만들 때 무너지지 않게 잘 짜 맞춰서 쌓잖아. 팀도 마찬가지야.”

모든 선수의 기량이 벽돌처럼 똑같을 순 없다.

큰 돌과 작은 돌을 구분해서 알맞게 쌓아야 하듯, 선수 기용이나 배치 역시 그랬다.

“그런데 유나이티드는 가장 큰 돌에 문제가 생겼지. 윗돌을 빼서 넣는다고 쉽게 해결되지 않아.”

“그럼… 이대로 무너집니까?”

“지금 상황에선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겠지.”

현재 레알이 주도권을 계속 이어 가는 것도 단순히 선제골 덕분은 아니었다.

로니 코프와 위치를 바꾼 준영이 동료들이 공을 끊어 냈을 때 역습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특유의 빠르고 정확한 패스가 나오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공이 가 버리거나, 멈칫하는 사이 레알 쪽에서 대응할 시간을 줘 버렸던 것.

맨유의 공격이 시원찮아지고, 그만큼 볼 점유율이 높아진 레알은 2선 공격수들뿐만 아니라 하프백들까지 전진해 와서 맨유 골대를 두들겨 댔다.

“어떻게든 전반은 0 대 1로 끝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우와아아아!”

영국인 취재원의 말은 관중들의 우레 같은 함성에 묻혔다.

준영의 엉성한 태클을 뛰어넘은 푸스카스가 강력한 왼발 중거리 슛으로 맨유의 골대를 흔든 것!

환호하는 레알 마드리드와 달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눈앞에 보이던 트레블이 저만큼 멀어져 가고 있는 듯했기에.

***

전반전을 0 대 2로 마친 맨유 선수들은 납덩이같은 표정으로 라커룸으로 돌아왔다.

말없이 타는 속을 달래고 있던 선수들을 슥 둘러보던 버스비 감독은 가장 답답한 표정을 하고 있던 준영에게 말을 건넸다.

“좀 어떤가, 존?”

“…최악입니다.”

주먹이 절로 떨렸다.

뇌진탕 때문이라고 하지만, 중요한 경기에서 이 정도로 형편없는 플레이를 한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거기다 겨우 전반전을 뛰었을 뿐인데도 마라톤을 한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 최악의 상황도 적응해 나가야겠죠.”

“할 수 있겠나? 억지로 무리했다가 더 나빠질 수도 있는데?”

오늘 경기에 패배한다면 아쉬움이 크겠지만, 그래도 이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일어나는 것보단 나았다.

만약에 준영의 뇌진탕 증세가 악화되어 이후 선수 생활, 아니 실생활에도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럼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미 뮌헨 비행기 사고로 여러 제자들을 필드에서 떠나보낸 적이 있는 버스비 감독은 비슷한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이대로 물러서고 싶진 않아요!”

강한 의지가 묻어 있는 준영의 눈빛에 버스비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알겠네. 대신 조심해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일단 후반전에 포메이션부터 바꾸자.

그리 마음먹은 버스비는 던컨을 전진시켜 중원에서부터 레알의 공격을 저지하고, 역습을 시도하기로 했다.

“수비는 로니 코프, 빌 포크스, 레이 윌슨… 힘들겠지만 자네들 셋이 레알의 공격을 막아 줘야겠어.”

하프백에는 기존의 바비 찰튼과 던컨 에드워즈, 이준영이 트라이앵글을 이뤘다.

이런 식의 포메이션 변경과 전진 배치는 점수가 뒤처지고 있을 때를 대비해서 훈련해 본 적이 있었다.

비록 올 시즌 실전에 적용하는 건 처음이지만, 뮌헨 비행기 사고가 터지기 전에도 바비와 던컨, 준영을 하프백 삼총사로 기용해 본 적이 있었다.

“바비, 던컨, 자네들이 존을 잘 지탱해 줘야 하네.”

“염려 마십쇼.”

지금까지 준영에게 여러모로 큰 빚을 졌다.

그래서 바비와 던컨은 준영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퍼기와 로, 자네들이 우리 팀에서 가장 어려. 그만큼 에너지가 넘치지. 측면에서 공격은 물론 수비도 신경 써서 뛰어 주게.”

“맡겨만 주세요. 로 녀석보다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입만 산 퍼기 자식보다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티격태격하는 두 스코틀랜드 소년들의 모습에 버스비 감독이나 다른 선수들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저 두 녀석은 여전하구만.”

“우리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야지! 어디 끝까지 해보자고!”

“Glory Man United!”

힘차게 구호를 외친 선수들은 다시 필드로 나갔다.

***

“저 동양인, 후반에도 뛸 모양이군.”

“괜찮을까?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던데…….”

킥오프 직전,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은 준영을 힐끔 쳐다보았다.

가장 많이 신경을 쓴 사람은 푸스카스였다.

‘저 녀석, 한국인이라 했던가.’

5년 전 스위스 월드컵에서 한국인들과 맞붙어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의 기량은 부족했고, 경기에 뛸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자신의 첫 골을 시작으로 9골을 내줬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부상과 탈진으로 4명이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뛰고 또 뛰었다.

‘그때 세베슈 감독이 그랬지. 사자처럼 용감한 놈들이라고.’

거대한 적을 상대로도 겁먹거나 물러서지 않는 투사들.

저 존 Y. 리라는 녀석도 그때 한국인들, 특히 자신의 슈팅을 수없이 막아 냈던 골키퍼와 눈빛이 비슷했다.

삐익-!

심판의 휘슬이 울리자, 레알 선수들이 일제히 맨유 진영으로 넘어갔다.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골을 터트려 맨유를 완전히 주저앉힐 생각이었다.

하지만 디 스테파노가 기세 좋게 찔러 준 패스는 리알의 발끝에 가기 전에 던컨에게 인터셉트를 당했다.

“네놈들 뜻대로는 안 될 거다!”

가로채기 무섭게 오버래핑을 시도한 던컨.

그는 레알 수비들을 끌어내다 측면의 알렉스에게 공을 보냈다.

패스를 받고 한 차례 툭 치고 들어간 알렉스는 빠르게 크로스를 올렸다.

숀 코너리의 머리를 노린 것이었지만, 도밍게스 골키퍼가 먼저 쳐 냈다.

그리고 이 리바운드 볼을 준영이 잡아챘다.

‘바로 슛을……!’

마음이 너무 급해서였을까.

거기다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몸은 공을 발에 맞히지 못했다.

발등에 스치고 튀어 오른 공을 준영은 가까스로 흘리지 않고 잡아채서 골대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사이 앞에는 수비수가 떡하니 가로막고 서 있었다.

“주장, 이쪽이 비었어요! 이쪽으로 패스해요!”

측면에 있던 알렉스가 손을 들며 펄쩍펄쩍 뛰었다.

하지만 준영은 그에게 패스를 넘길 수 없었다.

‘인마, 거긴 오프사이드 위치…….’

준영이 알렉스를 바라보고 있을 때, 레알 수비수 가르시아가 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준영은 황급히 발바닥으로 공을 굴리며 피해 냈다.

그리고 한 차례 치고 들어가 슈팅을 시도하려는 순간, 가르시아의 태클에 걸려 쓰러졌다.

삐익-!

“헉!”

휘슬이 울리자, 레알 선수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준영이 쓰러진 위치가 페널티 박스 안쪽이었기 때문.

“으악! 페널티킥인가?”

“아냐. 프리킥으로 판정했어.”

모리코니 주심은 페널티 박스 선 외곽에서 일어난 파울이라고 판정했다.

이 판정에 알렉스와 숀이 펄쩍 뛰었다.

“뭐가 외곽이야! 분명히 안에서 걸려 쓰러진 거라고!”

“페널티 박스 안쪽 잔디가 파인 거 안 보여요?”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주심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준영은 계속 항의하는 둘을 만류하고 나섰다.

“그만들 해. 이 위치에서 프리킥이라도 따낸 것도 소득이라고.”

“그래도 너무하잖아!”

투덜대며 두 사람은 자기 위치로 돌아갔다.

그사이 레알 선수들은 수비벽을 단단히 쌓았다.

여기서 골을 내주게 되면 스코어는 1 대 2가 된다.

단순히 맨유에게 추격의 기회를 줄 뿐만 아니라, 그대로 경기가 끝나더라도 중립 지역에서 재경기가 열린다.

레알 마드리드 입장에선 전혀 달갑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왼쪽, 왼쪽으로 좀 더 이동해! 띄우지 말고 바싹 붙어!”

동료들을 닦달하던 도밍게스 골키퍼는 맨유의 키커로 나선 게 누군지 살폈다.

던컨 에드워즈.

축구 종가에서 낳은 천재 플레이어로 유명한 선수다.

그런 그가 골대를 응시하며 발을 구르더니 곧장 달려들며 강력한 슛을 날렸다.

뻐엉-!

수비벽을 살짝 스치며 날아온 무회전 슈팅은 도밍게스가 반응할 틈도 없이 골대에 박혔다.

“들어갔다아-!”

한순간 고요해진 경기장.

레알 선수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혹시나 했는데 달갑지 않은 상황이 끝내 일어나고 말았으므로.

그와 달리 사기가 오른 맨유 선수들은 싱글벙글했다.

“정말 잘했어, 던!”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을 얻어 낸 네 덕이지.”

던컨은 자신과 하이파이브를 나눈 준영에게 말했다.

“최악이라더니, 아직 쓸 만하잖아. 괜히 엄살 피운 거 아니야?”

“엄살 아니거든. 아까 그건 운이 좀 따랐던 거였어.”

“운도 실력이지. 남은 시간도 잘 부탁해, 캡틴.”

등을 툭 쳐 준 던컨은 다시 자기 위치로 돌아갔다.

격려를 받은 준영도 한결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아직 눈앞이 살짝 어지럽고 몸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 할 수 있어. 난 혼자가 아니니까.’

우리 팀엔 실력이 뛰어난, 아니 전설이 될 만한 선수들이 여럿 있다.

그러니 그들을 믿고 끝까지 뛰어 보자.

그럼 멀어진 것 같은 목표와 희망도 다시 눈앞으로 돌아올 테니까!

“좋아, 다시 수비하자. 버티면 기회는 또 온다!”

상처 입은 호랑이.

하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는 투사의 외침이 필드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

스위스 월드컵 한국과 헝가리의 경기 시작 직전에 찍힌 사진입니다.

왼쪽이 페렌츠 푸스카스, 오른쪽이 당시 우리나라 대표팀 주장인 주영광 선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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